[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의 ‘성공한 쿠테타

BoardLang.text_date 2006.12.21 작성자 신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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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의 ‘성공한 쿠테타’


신병주(중세2분과)


 1453년(단종 1) 10월 10일, 세종 때 북방의 6진 개척에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변방의 큰 호랑이’로 불렸던 거물 정치인 김종서와 그의 아들 승규가 수양대군과 함께 온 자객들의 철퇴를 맞고 쓰러졌다.


수양대군 쿠테타의 성공을 알리는 계유정난의 서막이었다. 계유정난 이후 단종은 왕의 자리를 지켰지만 실질적인 권력자는 삼촌인 수양대군이었고, 이제 단종은 허수아비 왕으로서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타이밍만을 찾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1. 비극의 씨앗, 단종의 즉위

 세종의 사망 후 왕위는 장남인 문종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문종의 병약함은 세종의 근심거리였다. 세종 자신도 건강이 악화되어 대리청정의 형식으로 세자에게 정치를 맡겼지만 불안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한 우려대로 1450년 2월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은 대부분의 시간을 병상에서 보내다가 1452년 5월 사망하였다. 사망 직전에도 문종은 이제 겨우 12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세자가 걱정되었다. 문종은 고명대신(誥命大臣:왕의 유지를 받드는 대신) 김종서, 황보인 등을 불러 마지막으로 세자를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문종의 부탁은 새로운 비극의 싹을 잉태하고 있었다.

세자가 문종을 이어 단종으로 즉위하자 김종서가 좌의정, 황보인이 우의정이 되었고 왕은 형식적인 결재만을 한 채 모든 정사는 의정부에서 관할하는 의정부 서사제가 본격화되었다. 태종 때 신권의 비대를 우려하여 폐지한 의정부 중심의 정치체제는, 단종의 즉위로 다시 그 빛을 본 것이다.

태종이 골육상쟁을 치루면서 확보한 왕권중심제는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왕권과 신권이 조화되는 형태로 나아갔지만 문종과 단종과 같은 허약한 왕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권력의 균형이 깨지고 신하가 주도하는 정치체제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정도전이 그토록 희구하였던 재상중심체제로 회귀되었고, 피를 보는 진통 속에서 겨우 왕권 안정을 다잡은 태종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의정부 대신들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이유로 ‘황표정사’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것은 조정에서 인사 지명권을 위임받은 신하들이 황색 점을 찍어 대상자를 표시하는 방식으로 그만큼 신하들의 권력 남용의 위험성이 있는 제도였다.

김종서, 황보인 등은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세종의 3남인 안평대군과 손을 맞잡았다. 권력욕이 강하고 야심만만한 수양대군 보다는 조정의 대신들과도 비교적 친밀한 교분을 가진 학자풍의 왕자 안평대군이 이들에게는 훨씬 부담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2. 수양대군의 반격과 대호(大虎)의 죽음

 이러한 신하들의 권력 강화에 대해 수양대군은 칼을 갈고 있었다. 누구보다 김종서가 주된 타킷이었다. 쿠테타 직전 수양대군이 심복들에게 “지금 간신 김종서 등이 권세를 희롱하고 정사를 오로지하여 군사와 백성을 돌보지 않아서 원망이 하늘에 닿았으며, 군상(君上)을 무시하고 간사함이 날로 자라서 비밀히 이용에게 붙어서 장차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 한다. 당원(黨援)이 이미 성하고 화기(禍機)가 정히 임박하였으니, 이때야말로 충신 열사가 대의를 분발하여 죽기를 다할 날이다. 내가 이것들을 베어 없애서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김종서에 대한 적개심은 컸다.

한명회, 권람, 신숙주 등 재사(才士)들과, 양정, 홍달손 홍윤성 등 무사들을 심복으로 끌어들이면서 수양은 서서히 거사를 준비해 나갔다. 그리고 거사 1년 전인 1452년 9월 단종의 즉위를 인정하는 명나라 황제의 사은사를 자청하면서 자신에게는 권력욕이 없다는 것을 알려 대신들의 견제를 풀게 했다. 이때 사은사 수양과 함께 명에 갔던 것을 계기로 하여 신숙주는 수양의 편에 서게 된다.

귀국 후 본격적으로 휘하에 재사들과 무사들을 끌어들인 수양은 무엇보다 정국을 장악하고 있는 김종서의 제거만이 실추된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 믿었다. ‘수양대군의 장량’으로 지칭되었던 모사꾼 한명회는 김종서와 황보인의 집에 염탐꾼을 들여 이들의 동선(動線)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마침내 1453년 10월 10일이 거사일로 잡혀졌다. 수양은 거사 당일 직접 김종서의 집을 방문하였다. 자신의 심복 군사 일부만을 대동하였기 때문에, 김종서는 크게 경계하지 않고 있다가 수양의 지시를 받은 심복들에 의해 아들과 함께 철퇴를 맞았다.

수양이 김종서에게 청을 드릴 것이 있다며 편지를 건넸고, 김종서가 편지를 보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임어을운이 재빨리 철퇴를 휘둘렀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김종서가 쓰러지자 아들 승규가 아버지의 몸을 덮었다. 그러나 다시 날아온  수양의 심복 양정의 칼을 맞고 두 사람은 쓰러졌다.

세종 때 북방육진의 개척에 큰 공을 세우며 오늘날 우리 영토를 확립하는데 주역이 된 인물, 대호(大虎: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여진족에겐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었지만, 계획된 기습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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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서의 묘 : 충남 공주시 자기면 대교리 소재
3.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

 김종서 살해 후 수양은 왕명을 빙자하여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을 불러들이게 했다. 그리고 이미 한명회 등에 의해 작성되어 있는 살생부(殺生簿)에 따라, ‘김종서가 황보인, 정분 등과 모의하여 안평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정부의 핵심 인물들을 제거하였다.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 살부(殺簿)에 포함된 인사들은 처형되었고, 정인지, 신숙주 등 생부(生簿)에 포함된 인사들은 목숨을 부지하고 세조의 대표적인 참모가 되었다. 이날만큼은 염라대왕 못지 않는 권세를 누린 한명회였다.

대군중에서 가장 큰 경쟁자인 수양의 동생 안평대군은 강화로 유배한 후에 사사(賜死)하였다. 이것이 단종 원년인 1453년에 일어난 수양대군의 쿠테타, 즉 계유정난(癸酉靖難)의 대체적인 전말이다.

계유정난이 있던 날 단종은 수양에게 모든 군국(軍國)의 중사(重事)를 결정하게 했다. 수양이 정권과 병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43명의 정난공신은 단종이 책봉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모든 것이 수양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수양은 자신을 포함하여 거사에 가담한 정인지, 한명회, 권람 등 12명을 1등공신에 포함한 것을 비롯 43명을 정난공신에 책봉했다. 당시 성삼문은 3등 공신에 올랐는데, 이것은 수양이 성삼문과 같은 인재를 포섭하려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 단종은 허위(虛位)를 지키고 있을 뿐 실권은 완전히 수양에게 넘어가 있었다. 마침내 1455년 윤 6월 수양은 조카 단종을 압박하여 상왕으로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세조는 쿠테타 성공이후 결국에는 왕위에까지 오른 후 집권의 명분과 도덕성의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민본정치, 부국강병책, 왕권의 재확립과 『경국대전』이나 『국조보감』, 『동국통감』과 같은 학술, 문화 정비 사업에 진력을 하게 되고, 세조대에 확립된 이러한 기반은 성종대 조선전기 정치, 문화를 완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세조에게 과연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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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의 어필

 유교정치이념으로 볼 때 세조의 집권에는 명분과 정통성, 도덕성에 하자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당시에도 사육신과 같이 수양대군에 직접 대항하다가 처형된 지식인을 비롯하여, 벼슬을 버리고 재야에 은거하면서 비판 활동을 전개한 학자들이 상당수에 이르렀고 이들은 결국 조선전기 사림파의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노산군일기』에는 ‘불경스럽게도’ 단종은 ‘노산군’으로, 수양대군은 ‘세조’로 기록하였고, 그 후의 어떤 왕도 세조의 집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단종의 묘호 회복과 사육신에 대한 복권도 200여년이 훨씬 지난 숙종 때에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1691년(숙종 17) 숙종은 사육신의 복작(復爵)을 명하면서, ‘이 일은 실로 세조의 유의(遺意)를 잇고, 세조의 큰 덕을 빛내는 것이다.’라 하여 세조의 치명적인 아픔을 가능한 건드리지 않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집권에 성공했다고 하여도 불법적인 쿠테타가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은 현대의 정치사에 재현되고 있다. 한때 ‘성공한 쿠테타’로 선전되었던 1979년 12월 12일 쿠테타의 주역, 전두환과 노태우는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결국은 역사의 심판대에 서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성공한 쿠테타'의 원조 세조가 지하에서 전두환과 노태우의 말년 상황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