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돌려진 역사의 수레바퀴, 위화도회군

BoardLang.text_date 2006.11.11 작성자 신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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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진 역사의 수레바퀴, 위화도회군


신병주(중세2분과)







1. 혁명의 서막, 위화도 회군


1384년(우왕 9) 전라도 나주 거평부곡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농민 생활의 참담한 실상을 목격한 정도전은 함주막사로 들어가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던 장군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성계는 고려말 거듭되는 외침 속에서 홍건족과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는 혁혁한 무공을 세우면서 신흥 무인세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특히 1380년 소년장수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한 황산대첩은 이성계의 명성을 보다 높이게 했다. 고려말의 사회적 모순에 가장 적극적인 비판을 하면서 혁명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정도전의 정치적 야심과 이성계의 군사력이 결합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고려말의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차지하고 있던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세력의 득세로 말미암아 지방의 중소지주와 백성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졌다. 여기에 더하여 남방의 왜구와 북방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국가의 위기도 한층 커졌다. 이러한 시기 권문세족의 특권의식과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이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고려후기 새로운 사상으로 수용된 성리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기득권층의 특권을 견제하고 성리학에 입각한 도덕정치, 왕도정치의 회복을 추구하고 나선 이들이 바로 신흥사대부로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신분적으로는 지방의 향리 출신, 경제적으로는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 신흥사대부의 주류를 이루었다. 정도전은 그 중에서도 가장 열혈남아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국제정세에도 큰 변화가 닥쳐왔다. 전통의 강국인 몽고족의 원나라가 쇠퇴하고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점차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철령 이북의 요동 지역까지 차지하였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고 원나라를  압박하자 고려 조정의 외교 노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친원파와 친명파의 정치적 노선 대립이 그것으로서 당시의 실권자 최영은 친원파의 입장에 서서 이 기회에 잃어버린 요동 땅을 되찾고, 이성계를 그곳으로 내보내 군사적 경쟁자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평소 이성계를 견제하던 장군 최영은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의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조정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입지를 키우고자 하였다. 최영의 주장을 받아들인 우왕은 8도에서 군사를 징집하는 한편, 1388년 4월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좌군통사에 조민수, 우군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는 요동정벌을 감행했다. 최영은 개경에서 군사를 총지휘하게 하고 조민수와 이성계를 요동으로 출병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이성계는 요동 정벌 대신 말머리를 돌려 개성을 공격했다. 압록강을 건넌다는 것은 자신의 영원한 정치적 몰락임을 깨달은 이성계는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켜 개경을 급습하였다(위화도 회군). 요동을 공격할 수 없는 4대 불가론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최영을 비롯한 구세력들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목표였다. 위화도 회군 성공 후 후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성계 일파는 한 단계 한 단계 새 왕조 건설을 준비해 나갔다.


2. 마지널맨에서 혁명의 중심에 선 정도전


신흥사대부내에서도 고려말기의 대내외적 위기를 맞아 시국관에 따라 온건파와 혁명파로 분기되었다. 온건파 사대부는 고려왕조의 테두리 내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한 반면, 혁명파 사대부는 왕조의 교체만이 사회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정몽주, 이색, 길재, 이숭인 등이 온건파였다면,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은 혁명파의 대열에 섰다. 1392년 4월 온건파의 정신적 지주이자 고려왕조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 이방원(후의 태종)의 지휘로 개성의 선죽교 근처에서 피습됨으로써 권력은 완전히 이성계 일파와 혁명파 사대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때 이방원과 정몽주가 주고 받았던 시조인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는 이후에도 널리 회자되면서 정몽주를 고려 충신의 대명사로 널리 인식되게 하였다.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정몽주와 길재의 사상이 조선시대 사림파의 뿌리가 된 것도 이들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학자들이 재야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혁명파 사대부의 중심에는 정도전이 있었다. 정도전은 봉화의 향리 출신으로서 아버지 정운경대에 관직에 올라 개경으로 진출했으나 외할머니가 노비의 딸로서 그에게는 늘상 천민의 피가 섞였다는 신분적 콤플렉스가 따라 다녔다. 정도전이 급진적 성향을 띤 이면에는 이러한 신분적 성향도 적지 않는 영향을 미쳤다. 정도전은 1362년 문과에 합격한 후 공민왕대에 관직에 진출하였다. 개혁정치를 계획했던 공민왕은 기존의 권문세족에 맞설 수 있는 ‘젊은 피’ 신흥사대부를 중용하였고 이 때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본격적인 개혁정책을 구상해 나갔다. 그러나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한 후 권문세족 이인임 일파를 비판하다가 1375년 나주의 거평부곡으로 유배를 갔다. 그러나 유배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보다 더 혁명 의지를 불태웠다. 유배에서 풀린 후 본가인 영주, 외가인 단양, 서울 등지를 왕래하던 정도전은 1384년 마침내 혁명을 위한 파트너 이성계를 함주막사로 찾아갔다. 이성계의 명망과 그의 휘하에 있는 군사력이라면 혁명도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의 ‘문(文)’과 이성계의 ‘무(武)’가 조화되면서 역사는 새로운 혁명의 길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3. 마지막 민심잡기, 과전법의 단행


신흥무장 이성계와 결합한 정도전은 위화도회군 후 이성계 일파가 완전히 권력을 잡자 신속히 전제개혁(과전법)에 착수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고 새로운 왕조에 협조할 관리와 백성들에게 토지를 고르게 분배하였다.(1392년 5월). 이성계 일파가 새 왕조의 개창을 민심과 천심에 순응하는 ‘역성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대규모 경제개혁 조처였다.
이제 고려왕조의 멸망은 시간 문제였다. 우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창왕을 폐위시킨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옹립된 공양왕은 권력의 실세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절차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성계는 1392년 7월 여러 신하의 추대를 받아 선위(禪位:왕위를 능력있는 자에게 물려 줌)를 받는 형식으로 고려의 왕궁인 개성의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1979년 12월 12일, 쿠테타를 성공시킨 전두환 세력은 국무총리로 있다가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취임한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했고 1980년 8월 16일 최규하는 하야(下野) 성명을 발표하고 짧은 대통력직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정해진 수순대로 국보위 위원장이었던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당시 전두환에 대해 난국을 수습할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 극찬했던 신문 사설들은 태조의 신이한 능력을 널리 홍보했던 신흥사대부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조선의 건국 과정과 정권 교체 방식은 1980년 쿠테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모습과도 흡사한 점이 있다. 얼마 전 사망한 최규하 대통령이 퇴임 이후 아무런 정치적 활동이나 증언도 하지 못한 채 역사의 무대에 사라진 것처럼 이성계 일파에 의해 밀려난 공양왕의 마지막도 거의 잊혀졌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