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의 사회사]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조선의 유배 (2)

BoardLang.text_date 2009.05.13 작성자 심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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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조선의 유배 (2)


심재우(중세사 2분과)


1. ‘권불십년’을 되새기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

잊을 만하면 한번 씩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하는 정치인들의 비리 소식을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이다. 아무리 예쁜 꽃도 열흘 넘기기 힘들며, 권력은 기껏해야 십년을 가지 않는다는 너무나 상식과도 같은 이야기!

  그런데 재임 중에 유난히 도덕성을 강조한 참여 정부 시절의 대통령과 연루된 금품 수수 관련 최근의 의혹은 정치 보복적 성격, 살아있는 권력과의 처벌의 형평성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그 자체로 국민들에게 주는 충격이 크다. 과연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가?

  한국 현대사는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권력의 무상함은 과거 조선시대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한 때 권력을 틀어 쥔 수많은 조선시대 정치인들이 사화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실각하는 불운을 겪었다. 때론 권력형 비리로 인해, 때론 반대파란 이유 만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그들. 다행히 목숨을 부지한 상당수는 기약 없이 외딴 곳에 유폐되어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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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조선시대의 기본 형벌 :『대명률』에 나오는 태, 장, 도, 유, 사형의 다섯 형벌을 말한다. 이 중 유형이 곧 유배형이며,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었다.

여러 조선의 정치인들이 겪었던 유배형은 자신의 생활 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지역에 처박혀야 하는 종신 추방형이었다. 조정에 복귀할 가능성이 큰 자인가 실세한 인물인가에 따라, 그리고 관리 신분인가 일반 무지렁이인가에 따라 유배 길에서의 이들에 대한 처우는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유배형은 사형 다음의 중형이었고, 당연히 유배지로의 노정은 물론 유배지에서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었다.

  몇 년 전에 유배가사의 내용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귀양살이의 여러 면모들을 생생하게 밝힌 서울여대 정연식 교수의 글이 제출되었다. ‘권불십년’의 가르침이 절실한 오늘, 정교수의 글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유배지에서의 생활상을 추적함으로써 권력의 무상함과 아울러 고난 속에서도 희망의 꽃을 피웠던 사람들의 삶의 교훈을 되짚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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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명나라 정치범의 감옥행 : 명나라에서 출판한 『의열기(義烈記)』에 나오는 삽화 일부분으로, 오른쪽에 수갑을 차고 줄에 목을 맨 죄인의 정확한 죄명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좁은 공간에 수감되는 것보다는 유배형이 그나마 좀 낫지 않았을까? (출처:『도설 중국혹형사』 148쪽.)

2. 천덕꾸러기 신세, 유배인

유배에 처해져 유배지로 떠나는 여정이 사람들마다 제각각이었듯이 유배지에서의 삶 또한 지역, 시기, 신분에 따라 다양하였다. 우선 유배객의 유배지에서 생활을 좌우하는 자로는 아무래도 고을 수령을 첫 번째로 꼽아야 할 것 같다. 유배인 관리 감독을 총괄하고 있는 수령은 유배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유배인들의 거처 및 보수주인(保授主人) 선정을 좌우하였다.

  여기서 보수주인이란 유배지에서 유배인의 숙식을 책임진 사람을 말하는데, 어떤 보수주인을 만나느냐는 유배객의 앞으로의 생활의 질을 가늠하는 중대 사안이었다. 대개 자신의 가족들 챙기기도 빠듯한 생활에 군식구가 느는 일이므로, 당연히 보수주인이 유배객을 떠맡는 일은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보수주인은 수령의 명을 거역하기 쉽지 않은 읍내의 아전(衙前), 군교(軍校), 관노(官奴) 등 관속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 백성들의 경우 관에서 유배객을 배정할라치면 갖은 핑계로 빠져나가기 일쑤였고, 어쩔 수 없이 유배객을 떠맡는 경우에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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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유배지 호적에 올라있는 유배인 : 1759년 『경상도 단성현 호적대장』의 일부로, 단성현 현내면 죽전 마을의 제1통 부분이다. 모두 다섯 집 가운데 첫 번째가 속오군(束伍軍) 이세남 집인데, 이세남 가족 기록 말미에 형조(刑曹)에서 유배 온 31세의 홍일창이란 인물이 보인다. 여기서 이세남은 형사 범죄를 저지르고 단성에 유배된 홍일창의 숙식을 책임진 보수주인(保授主人)이다.

정조 때 대전별감 출신으로 추자도로 유배간 안조환(安肇煥)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보수주인으로부터 구박을 받은 사례이다. 그는 추자도 유배지에서의 비참한 생활 모습을 유배가사 「만언사(萬言詞)」에 묘사하였는데, 추자도에 도착한 첫날 아무도 그를 맡으려 하지 않아 관원이 강제로 한 집을 지정하자 집 주인은 그릇을 내던지며 그에게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자기도 세 식구 먹고살기 힘든 마당에 무슨 유배객을 맞느냐는 것이다.

  이처럼 유배객이 유배지에 도착하면 거처를 정해야 했지만, 보수주인에 내맡긴 처지에서 돈이 없으면 궁색한 꼴을 면할 수 없었다. 관에서 특별히 보살펴주지 않는 이상 심한 경우 끼니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고을에서는 보수주인에게 일방적으로 책임을 맡기는 대신에 마을민 전체가 돌아가면서 급식을 제공하기도 하였지만 유배객이나 마을민이나 마뜩찮은 것은 매 한가지였다.

  다산 정약용은 곡산부사 시절에 고을에 배정된 유배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예 기와집 한 채를 사서 유배인들을 모두 그곳에 지내게 하였고, 고을 기금을 별도로 마련하여 이들의 곡식, 반찬, 생활용품을 충당할 수 있게 하기도 하였다. 유배인 숙식을 일방적으로 보수주인에게만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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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조선시대 남원의 감옥 : 전남 남원시 춘향 테마파트에 복원되어 있는 감옥 세트장이다. 유배인들은 유배지를 벗어나지 않는 한 이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화면에 보이는 감옥에 구속되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사실 조정에서도 고을의 골칫거리인 유배인 배정에 신경이 쓰이긴 매 한가지였다. 그래서 정조 8년(1784)에는 흉년이 든 재해 지역에는 유배인을 내려보내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이보다 4년 뒤에는 아예 한 고을의 유배인 숫자를 10명으로 못박았다. 고을민에게 유배객은 곱게 이야기해서 불청객이요, 한 마디로 천덕꾸러기였다.

3. 산 무덤이나 다름없는 ‘위리안치’

비록 생면부지의 땅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긴 했지만 유배인들의 유배지에서의 생활에 큰 구속은 없었다. 대개 한 달에 두 차례, 즉 초하루와 보름에 행하는 고을 수령의 점고(點告) 때 관아에 들어가 자신이 도망가지 않고 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수고를 해야하는 것 외에는 관으로부터 별다른 통제를 받지 않았다.

  고을 경내를 벗어나지 않는 한 이동에도 큰 제약이 없었으며, 원칙적으로는 유배지에 가족을 데리고 와 살 수도 있었다. 조선에서 법으로 쓰고 있는 명나라의 『대명률』 규정에 가족 동반을 허용하고 있으며, 세종 31년(1449)과 정조 14년(1790)에 유배인의 가족들이 모여 살며 왕래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데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마땅한 호구책이 없는 이상 척박한 변방이나 시골마을, 외딴 섬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대개 유배에 처해질 경우 가족은 고향에 두고 혼자 떠났지만, 법 자체가 가족 동반을 막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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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영월 청령포에 복원된 단종의 거처 :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뺏기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이곳은 지세가 험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단종은 이곳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했다고 한다. 가시울타리를 두른 것은 아니지만 ‘위리안치’나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위리안치(圍籬安置)’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위리안치는 무거운 죄를 짓고 국왕의 큰 노여움을 산 왕족이나 관료들에게 종종 내려졌는데, 유배형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조치였다. 위리안치에 처할 경우 가족 동반 자체를 금지시켰음은 물론, 집 주위에 탱자나무 따위로 가시울타리를 둘러 감옥살이나 다를 바 없는 감금과 격리 조치를 취하였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에는 형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 전라도 익산 등지에 안치된 화의군 이영, 한남군 이어에게 의금부에서 1464년(세조 10) 거주지 제한 조치를 취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 무렵 위리안치 죄인의 감금 생활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즉, 집의 담장 밖에 나무로 일종의 바리케이트를 치고, 열흘에 한 번씩 음식을 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항상 자물쇠로 잠갔다. 또한 담장 안에는 우물을 파서 생활하게 하였으며, 행여 집 안 사람과 내통하거나 물품을 제공하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처벌하였다.

  한편, 집 주위를 둘러싼 가시울타리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높아서 낮에도 햇빛조차 볼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중종 때 기묘사화로 함경도 온성(穩城)에 위리안치된 기준(奇遵)의 경우 가시울타리의 높이가 4-5길(丈), 울타리 둘레가 50자(尺)였다고 하며,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오빠로 1776년 흑산도로 유배된 김구주(金龜柱)도 문집 속에 자신의 거처 주변 울타리의 높이가 3길 정도였다고 쓰고 있다. 또한 경종 때 명천에 유배된 윤양래(尹陽來)의 집 주위 울타리 높이도 5길이었다. 이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위리의 높이는 5-9미터에 달하는 셈이다.

  이처럼 둘러친 높은 가시울타리가 처마를 가려 집안에 햇빛이 들지 않아 대낮이라도 한밤중과 같았으며, 숨을 쉬려고 해도 공기가 통하지 않았다는 기준의 불평이 지나친 과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고을 사람들은 기준의 집을 ‘산 무덤(生冢)’이라 부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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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위리안치’된 유배인 그림 : 가시울타리를 두른 집에서 허망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유배인의 모습이 애처롭다. 『사법제도연혁도보』에 실려 있다.

중종 때의 기준에 비한다면 광해군 6년(1614)에 영창대군을 죽인 강화부사 정항의 처벌을 주장하다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된 정온(鄭蘊)의 경우는 사정이 그나마 조금 나았다고 할 수 있다.

  정온은 대정현 동문 안에 위치한 작은 민가에 안치되었는데, 진흙으로 된 집에는 그나마 부엌과 노비들의 거처, 손님방까지 갖추고 있었고 대정현감의 배려로 서실(書室) 두 칸에 수 백권의 서가를 비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온의 집 또한 하자가 있었으니, 집이 너무 낮아 똑바로 설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갑갑한 감금 생활은 안치된 죄인에게 자연히 탈출을 떠올리게 했을 법 하다. 실제로 인조반정으로 졸지에 폐세자(廢世子)가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된 광해군의 왕자 이지(李祬)가 땅굴을 파 울타리 밖으로 통로를 낸 뒤 밤중에 빠져 나가다가 나졸에게 붙잡혔으며, 이보다 앞선 선조 2년(1569)에는 보성군에 안치된 종친 신의(申檥)가 아예 소홀한 감시망을 뚫고 제멋대로 밖으로 나가 대담하게도 남의 애첩 몸에 손을 대 조정에 압송되는 일도 있었다.

4. 그 때 그 때 다른 유배생활

앞서 보았듯이 대개 유배인의 거처가 편안할 수는 없었고 처우 또한 조정에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유배를 온 건지, 유람을 온 건지 알 수 없는 정도로 호화판 귀양살이도 있었으니 철종 4년(1853)에 함경도 명천에 유배된 김진형(金鎭衡)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김진형은 이조판서 서기순이란 자를 탄핵하다 관직을 삭탈당하고 명천에 유배되어 두 달 동안 생활하였는데, 그곳 생활을 자신이 지은 가사 「북천가(北遷歌)」에 자세히 소개하였다.

  김진형은 명천 유배지로 오는 길에 이미 여러 수령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며, 명천에 도착해서는 삼천석꾼을 보주수인으로 배정받아 넓은 집에 살며 그곳 선비들과 어울리며 음주가무를 즐겼다.

  배소를 벗어난 경성(鏡城)의 칠보산 구경을 떠난 것은 물론, 스물도 안 된 기생과 동침하며 꿈같은 날들을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기생과 만나 맘껏 즐기며 방탕하기까지 한 경험을 「북천가」곳곳에 늘어놓았으니, 근신과 반성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도대체 누가 그를 유배객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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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김정희 초상 : 소치 허련이 제주도에 유배 중인 스승 김정희의 모습을 그린 그림의 부분. 『추사 김정희-학예 일치의 경치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101쪽)

  김진형보다 조금 앞선 1840년(헌종 6)에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의 경우에도 딱히 군색한 생활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처음 대정현에 도착한 추사가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거처로 삼은 곳은 읍성 안 송계순의 집이었다.

  이후 그는 거처를 옮겨가며 대정현에서 무려 9년 가까이 지내며 외로움을 달래야 했지만, 하인 서너 명이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그의 수발을 들었고 제자들도 몇 차례나 귀한 책을 사서 보내는 등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여유로웠다.

  이처럼 유배인의 삶이 늘 고단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배인의 경우 유배지에서의 삶은 외롭고 고단하였으며, 정계 복귀 가능성이 없는 인물이나 빈한한 사람의 경우 유배생활이 길어질수록 생존을 위한 극도의 수치와 고통까지 경험해야 했다.

  제주도의 최초 여성 유배인으로 알려진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의 경우는 광해군 5년(1613) 제주에 유배되어 명색이 왕비를 낳은 귀한 몸에도 불구하고 막걸리를 팔며 생활해야 했으며, 선조 24년(1591) 함경도 부령(富寧)의 귀양길에 오른홍성민(洪聖民)은 그곳에서 식량이 바닥나자 데리고 온 종과 함께 상업에 나서면서 차라리 농부가 부럽다고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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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추자도 : 정조 때 안조환의 눈물겨운 귀양살이의 현장 추자도의 현재 전경. 추자도는 행정구역상 제주특별자치도에 속하나,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며 생활은 전라남도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 나마 다행이었다. 앞서 소개한 정조 때 추자도에 유배된 대전별감 안조환의 귀양살이는 비참함 그 자체였다. 유배지에 도착한 첫 날부터 주인으로부터 온갖 냉대를 받은 그는 한동안 처마 밑에서 자야했음은 물론, 1년 내내 달랑 옷 한 벌로 버티며 버선이나 이불도 없이 추운 겨울을 지내야 했다.

  두둑한 돈이 있는 것도 아니요, 코흘리개 애들이라도 가르칠 학식을 쌓아 둔 것도 아닌 이상 척박한 외딴 섬에서 살기 위해선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흡사 종살이처럼 주인집 마당쓸기, 불때기, 쇠똥치기, 도랑치기, 집지키기 등 하루도 편할 날이 없던 안조환. 그는 마침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비렁뱅이처럼 동네를 돌며 동냥을 하기에 이른다. 도대체 이보다 눈물겨운 귀양살이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5.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조선시대 심각한 정치대립의 와중에서 유배를 비켜간 관리들은 좀 과장해 이야기한다면 행운아가 아니었나 싶다. 유배는 조선의 정치인들에게 결코 낯선 형벌은 아니었으며, 그들에게 처량하고 비참한 유배지에서의 삶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척박한 불모의 땅 유배지에서도 학문과 예술은 꽃피운다는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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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유배 관련 연구서 및 번역서 : 조선시대 독특한 형벌의 하나인 유배는 정치적, 문화사적으로 새롭게 재조명해 볼만한 주제이다.

허균(許筠)은 자신의 평론집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이산해(李山海)의 시가 늘그막에 강원도 평해에 귀양 가서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예로 들어, 문장이란 부귀영화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려움과 고초를 겪으며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뎌야 묘한 경지에 들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유배의 고통을 이겨내며 시대의 아픔을 극복해나간 조선의 지식인들은 적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활발한 창작 활동을 통하여 후세에 길이 남을 명작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조선 최고의 지식인 다산 정약용이 그 중 하나이다.

  다산은 정조가 죽은 이듬해인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강진에서 그는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무려 18년의 세월동안 외로운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다.

  당시 다산이 유배지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는 박석무가 번역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청작과비평사, 1991)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절절한 가족 사랑과 학문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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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다산초당 : 다산 정약용이 10여 년간 머문 강진의 만덕산 기슭에 위치한 다산초당. 본래 초가였던 다산초당은 1936년에 무너져 없어졌는데, 1957년 해남 윤씨의 도움을 받아 정다산유적보존회가 복원하면서 지붕을 기와로 덮었다.

편지에서 다산은 자식들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보여준다. 그는 9남매를 두었으나 모두 요절하고 2남 1녀만 장성하였는데, 늘 두 아들의 글공부를 걱정했다. 우리 집안은 화를 입은 폐족(廢族)이니 남보다 학문에 더욱 정진하라는 것이다.

폐족이면서 글도 못하고 예절도 갖추지 못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보통 집안 사람들보다 백배 열심히 노력해야만 겨우 사람 축에 낄 수 있지 않겠느냐? 내 귀양살이 고생이 몹시 크긴 하다만 너희들이 독서에 정진하고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으면 근심이 없겠다. (1802년 2월,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다산의 학문에 대한 열정도 애틋한 가족애 못지않았다. 그는 유배지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채찍질에 힘을 쏟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의 불후의 저작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은 모두 유배지 강진에서 이룩한 쾌거였다. 그에게 있어 유배의 시련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 아니라 그저 빛나는 성취의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