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역사 이야기] 해방과 김일성

BoardLang.text_date 2004.05.06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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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김일성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새로운 국가 형성을 위해 매 지도자들이 수행한 첫 행보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그들의 초창기 정치 활동이 향후의 전략적 방향을 결정할 밑그림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귀국 직후 김일성의 활동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먼저 지적할 것은 김일성의 입지에 대한 국내공산주의자들의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알려진 대로 9월 11일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은 식민지 시기의 오랜 공백 기간을 뒤로 하고 마침내 재건되었다. 소련이나 김일성의 관여 없이 독자적으로 결성된 조공은 처음에는 해외 공산주의자들을 배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일성만은 예외로 취급하였다. 박헌영 지도부는 아직 귀국하지 않은 김일성을 사실상 조공의 2인자로 앉혔다. 이로써 그의 입지는 귀국 전에 이미 국내공산주의자들에 확인됨 셈이 되었다.

해방 후 한 달 여가 지난 9월 19일 원산항에는 소련 화물선 ‘푸가초프호’를 타고온 소련군 복장을 한 70여명의 조선인들이 내렸다. 김일성이 이들을 이끌었고, 항구에서 그를 마중한 인물은 원산시 경무사령관 V. 꾸추모프 대좌와 일부 국내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수년간 기다리던 대일 항전에 참여하지 못한 채로 귀국한 김일성으로서는 해방의 감격 못지않게 진한 아쉬움이 있었을 것이었다. 이 점은 광복군의 참전이 좌절된 채 쓸쓸하게 귀국한 김구의 심정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의 귀국에 맞춰 서울에서는 ‘김일성장군 환영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귀국은 은밀히 이루어졌고 떠들썩한 환영 인파도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김일성은 줄곤 마음속에 품어온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가 취한 제일보는 자신의 동료 부하들을 북한 각지에 파견하는 일이었다. 원래 그들의 임무는 각지에 설치된 소련군 경무사령부를 지원하는 일이었지만 이 보다는 해당 지역의 정세를 파악하고 현지 정치세력들과 접촉하는 일을 맡았다.

9월 22일 평양에 들어온 김일성은 외부의 노출을 꺼린 채 건국이라는 총체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를 위해 지역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면서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당 조직 건설을 서둘렀다. 이 과정에서 김용범(金鎔範), 박정애(朴正愛) 등 평남지역 공산주의지도자들의 협력과 지지를 받았다. 사실 국내적 조직기반이 별로 없었던 김일성으로서는 이들과의 ‘자연스런’ 합작이 향후 정치 행보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귀국 직후 김일성이 북한 전역의 공산주의자들을 즉시 장악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동료 부하들이 각지에 파견되면서 일부 지역에서 현지 토착공산주의자들의 ‘냉대’를 받았던 데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김일성이 공산주의자들 내의 상징적 입지와 소련군 당국의 지원 등에 힘입어 북한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박헌영의 조공은 자신의 영향력을 북한 지역에 전파하는 데 힘쓰고 있던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측은 남북이 미소양군에 의해 분리된 조건을 고려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인 공산당 조직에 착수하였다. 남과 북은 통치의 주체가 다른데다가 미군이 주둔한 남한 지역에 본거지를 둔 조선공산당 중앙에 의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10월 13일 평양에서는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가 열려 조선공산당 직속으로 북부 분국이 창설되었다. 북부분국은 조공 중앙의 지휘를 받는 기관으로 탄생하였지만 사실상 독립적인 당 창당이었다. 이 과정에서 오기섭(吳琪燮), 정달헌(鄭達憲) 등 일부 국내공산주의자들이 ‘1국 1당’ 원칙을 들어 반발하기도 했으나 명분과 대세를 거스르기는 어려웠다. 김일성은 분국 창설을 주도하였음에도 실제로 책임비서 자리는 김용범에게 양보하였다. 자신이 한 정파의 수뇌보다는 인상보다는 범민족적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필요했던 시점이었던 것이다.

분국결성을 결정할 다음날인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는 10만 이상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평양시군중대회가 열렸다. 김일성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을 보인 자리였다. 이 대회는 소련군을 환영하고 새조선 건설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였다. 그런데 이 행사에는 일제하 ‘전설적인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이 나온다는 예고에 따라 수많은 인파들이 운집하였다. 김일성으로서는 자신의 명성이 눈으로 확인된 행사였고, 소련군당국은 그의 대해 더욱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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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정치노선은 조선이 사회주의로 곧바로 이행하는 것보다는 일정한 자본주의적 단계를 거치는 방향으로 자리하였다. 당시 이는 북한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권력’ 수립 노선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노선은 소련측이나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취한 노선과 거의 동일한 입장이었다. ‘부르주아민주주의 권력’ 수립 노선의 실천은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을 기초로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일이 우선시되었다. 이때 민족주의세력의 범주에서 친일분자는 당연히 제외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 기준에 맞는 반일민족주의자와 친일파를 엄격히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부 공산주의자들도 그렇거니와 일제 시기 상층 민족주의자들 가운데 친일적 색채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과 반일은 기준은 얼마만큼 ‘능동성’을 발휘했는냐의 여부로 가려지기가 쉬웠다.

김일성측이 주목한 통일전선의 주된 대상은 평안도 민족주의자의 ‘대부’ 고당(古堂) 조만식이었다. 조만식은 1920년대 초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여 국산품장려운동을 전개하였고, 1927년에는 좌우합작단체인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하기도 한 대표적인 민족주의 지도자였다. 일제 말기 조만식이 친일행위를 했다는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그 ‘근거’는 훗날 김일성조차도 의심할 만큼 박약한 것이었다. 아무튼 민족주의 진영의 거목이자 대중적 상징성과 명망 있는 인물을 공산측이 놓칠 리가 없었다.

민족주의 세력의 명망가를 협력자로 찾고 있었던 소련군 당국과 김일성은 조만식의 위상과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적극적인 통일전선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였다. 조만식도 공산측과의 협력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물론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합작은 김일성 귀국 이전에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라는 자치기관에 양측이 공동 참여한 것으로 이미 실현된 바 있었다. 조만식은 이 기관의 위원장직을 맡았었다.

김일성이 대중앞에 공개적으로 등장하기 전 조만식과의 만남을 통해 깍듯한 예를 갖추고 협력을 요청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조만식 역시 김일성의 항일투쟁 공적이 높이 평가함으로써 양자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김일성은 조만식에게 민족주의세력의 정당 결성를 권유하였고, 조만식은 이를 받아들여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조선민주당 창당은 김일성 동료인 최용건(崔庸健)과 김책(金策)이 직접적인 관여를 할만큼 공산측이 신경을 쓴 사안이었다. 특히 최용건은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당수를 맡기까지 하였다. 조선민주당 일부에서 나온 최용건 중용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그의 오산학교 스승이었던 조만식 자신이 직접 무마하였다. 창당 당시 조선민주당은 “김일성의 주도에 의해 당이 창당되었다”고 공공연히 선언할 만큼 김일성과의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진영과 공산진영간의 협력적 분위기는 기본적인 정치적 견해와 각종 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점차 간극이 생기게 되었다. 예를 들면, 조만식은 중앙행정기관으로서 ‘북조선임시위원회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공산측의 요청을 “분단을 우려하여” 거부하였다. 또한 소작료율 책정에서 공산측은 지주와 소작의 배분을 3:7제로 하자로 한 데 반해 민주당 측은 4:6 내지 5:5제를 주장하면서 갈등적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해방 직후 몇 달 간에 존재한 민공의 합작만을 보면 그해 12월 말에 터진 조선 문제에 대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의한 한반도 정치세력의 결정적인 분열을 예상할 수는 없었다.

한반도 운명에 관한 불확실한 정세가 전개되어 가는 가운데 김일성은 점차 활동의 폭을 확대해 갔다. 그는 12월 중순 김일성은 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는 책임비서로  선출되면서 처음으로 공산주의자로서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 각 지방당에 대한 분국의 조직적 지도와 상하부의 조직체계가 혼란에 빠진 상황은 김일성 자신이 나서서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판단한 것이었다. 이 때 이후로 김일성은 사실상 북한의 지도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의 행보는 한편으로 박헌영의 ‘지휘’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해 나가기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