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요리집 백년

BoardLang.text_date 2004.06.05 작성자 하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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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집 백년

1910년 대 초 어느 여름날 종로 바닥에 때 아닌 우산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구름 한점 없는 대낮의 우산 행렬에 길 가던 군중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우산을 받쳐 든 꽃 같은 기생들의 행렬이었다. 나이 든 기생이 앞에 서고 뒤에 솜틀도 보송 보송한 어린 동기(童妓)가 뒤를 따르는 행렬은 구경꾼들의 눈을 번쩍하게 했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사람 모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던 일본순사들이 깜짝 놀라 달려왔지만 씩 웃고 돌아서고 말았다.

 

앞서 가던 기생이 선창을 하면 뒤에 따르던 기생들이 화답하면서 가는 행렬은 요리집 명월관 선전이었다. 우산 끝에는 명월관에 꽃다운 기생 산홍이가 새로 왔으니 많이 왕림해 달라는 식의 종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요리집에서나 구경할 기생을 백주 대낮에 구경하게 된 횡재에 군중들은 이들 행렬을 따라 나섰고, 행렬이 종로에서 동대문 쪽으로 방향을 틀자 구경꾼도 이들을 뒤따랐다.

 

우산에 선전문구를 매달던 광고는 뿌리가 있다. 이미 종로에는 조선시대에도 이 같은 광고가 등장했다.

조선시대 종로 육의전은 시골 장시처럼 5일이나 10일만에 열리는 장이 아니라 상설시장이었다. 요즘처럼 일요일도 없던 시절이라 종로거리는 물건사려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붐비고, 호객하는 상인들의 목소리로 시껄벅적했다.

이 소란스런 틈새에서 차일만큼 큰 장옷에 갓을 쓰고 우두커니 서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한삼을 소매 자락에 달고 있었다. 한삼은 소매 끝에 댄 옷감으로 우리말로는 거들지라고도 한다. 원래는 웃어른에게 손을 보이지 않으려는 예의 때문에 만든 것이었고, 춤출 때 소매 끝에 붙여 동선(動線)을 길게 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가게 앞에 서 있는 이들의 한삼자락에는 자기 네 가게 상품의 물목과 가격이 적혀 있었다. 이들을 열립군(列立軍)이라고 했는데 요즘으로 치면 앞뒤에 광고 문안을 써넣고 다니는 샌드위치맨과 같은 역할을 했다. 육의전 거리에 같은 물목을 파는 가게들끼리 경쟁하기 위해 고안해 낸 광고판이었던 것이다. 깃발이나 매달고, 글씨 쓴 나무판을 간판으로 걸어 놓던 광고에 비하면 당시로서는 첨단 광고였던 셈이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광고가 없으면 팔기 어려운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명월관 광고는 이를 원용한 것이었다.

개항이후 서양근대 문물이 수입되면서 신문이 만들어지고 신문에 광고가 실리면서본격적 상품 광고가 시작되었는데, 한말의 신문에는 각종 자본제 신제품에 관한 광고가  많이 실려 있다.

서비스업도 광고시장에 끼어들었는데 요리집 광고가 그랬다.

본쇼에 목욕간이 정결하고

됴흔 술과 각죵 과품이며

본국 요리를 구비하압고

또 입맛에 맞게 쟝국밥을 셜시하였사오니

첨 군자난 왕림하시믈 복망하오 혜천관 고백

(<제국신문>, 1906년11월17일)

요리집 혜천관에서 요리를 팔기 위해 목욕간을 갖추고, 술과 과자를 구비해 놓았다는 광고다.

 

한말의 요리집은 기원이 일본식 요정에 있다. 1880년대에 들어 서울에는 청국인과 일본인 등 외국인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일본인의 거주지는 주로 진고개, 지금 충무로 일대였다. 이 진고개 일대에 일본식 과자점이 생기게 되었다. 이 과자점에서 는 ‘왜각시’라 불리는 일본여자들이 과자를 팔았는데 일본남자들이 여기에 문턱이 닳아지라 들락거렸다. 덩달아 조선 남자들도 왜각시를 보려고 진고개 출입이 잦아 졌다. 당시 진고개에 여럿 들어섰던 일본 요리집에서 왜각시의 인기에 주목하게 되었고, 단순히 요리를 파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시까지 파는 발상을 한 결과가 술과 요리, 그리고 게이샤를 함께 파는 요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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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때 진고개의 일본인 거리>

 

그래서 1887년 처음으로 일본식 요정인 정문루가 만들어지고, 여기에 일본 사람 조선 사람할 것 없이 들끓게 되자 이어 화월루가 생겼다. 친일파의 대명사로 불리는 송병준이 청화정까지 내면서 한말의 3대 요리집이 생겼던 것이다. 특히 송병준의 청화정은 친일정객들이 밤마다 모여들어 나라 팔아먹을 모의를 하다 술 마시고 여자까지 끼고 자던 곳으로 유명하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때 유행했던 요정 정치의 원형이었던 것이다. 나라 팔아 먹고 이권 챙기던 정치인의 모습은 요정의 처마자락 아래에서 100년 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제국신문> 광고 속의 혜천관도 이 같은 일본식 요리집의 한 전형이었다. 광고 문안에 술과 과자, 요리와 장국밥만이 아니라 목욕간이 정갈한 것까지 선전하는 것은 여자가 나오는 일본식 요리집에는 당연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한량들이 이용하던 기생 집에는 목욕간이 따로 없었다.

이 일본식 요리집을 이어 받으면서 한국식 궁중요리를 내 놓은 집이 바로 명월관이다. 명월관은 지금의 동아일보사 자리에 1909년에 문을 열었다. 물론 명월관이전에도 국일관이라는 우리식 요리집이 있었지만, 명월관이 더 인기가 있었던 것은 내 놓은 음식이 궁중요리였던 탓이다. 첫 주인은 안순환이란 인물이었는데 원래 궁중에서 순종에게 요리를 만들어 바치던 사람이었다. 더구나 1890년에 관기(官妓)제도가 없어지면서 일자리가 없어진 기생들이 명월관에 모여들었고, 돈푼깨나 있던 사람들은 기생이 접대하는 궁중요리 맛을 보려고 드나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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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기생학교의 댕기머리 기생>

 

명월관이나 국일관에는 기생이 상주하지 않고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에서 연락을 하면 인력거를 타고 요리집에 나와 손님 접대를 했다. 인력거를 탄 기생을 힐끗거리는 것만 해도 서민에게는 눈 호사였을 정도였는데 우산 쓴 기생행렬을 종로바닥에 풀어 놓는 첨단 광고까지 하는 바람에 명월관은 단박에 장안의 명물로 등장했다. 그래서 조정 대감과 장안부호들의 고급사교장이 되었고 명월관 출입할 신세가 못되는 사람에게도 그 이름은 잘 알려져 있었다. 물론 명월관 기생의 노래 들으면서 궁중요리 맛을 보려고 논 팔고 집 팔아 서울 올라오는 시골부자들도 적지 않았다. 나라가 일본에 먹히고 난 뒤부터는 이완용, 송병준과 같은 총독부에 연줄도 든든하고 돈 많은 친일파 인물이 알짜배기 단골손님이 되었다.

3.1운동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으로 유명한 태화관은 명월관의 별관이었다. 명월관은 1918년 쯤 불에 타버렸다. 그래서 안순환은 새 자리를 물색해 지금의 인사동 부근에 명월관 별관으로 태화관을 열었다. 태화관이 명월관 같이 흥청거렸을 것은 당연한데, 이번엔 좀더 시끄럽게 놀았다. 양악대가 등장해 나팔 불고 깽깽이를 켜는 바람에 양소리에 맞춰 기생들과 손님이 어우러져 몸을 흔들고 춤을 추어댔다.

태화관을 출입한 단골 중에는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가 끼어 있었다. 천도교 교당도 멀지 않은데다가 그는 태화관 기생 주옥경과도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태화관이 독립선언서의 낭독 장소로 쓰이게 된 데는 손병희의 힘이 컸다. 당시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대중의 요구를 외면하고 요정에서 선언서를 읽었던 33인의 대표들이 요정 밖으로 나갔을 때 상당수가 독립을 포기하고 친일파로 변신하게 되는 것도 대중과 무관하게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요정정치의 연장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지난 백년 간 요정이라고 불리던 요리집은 단순히 요리 먹고 여자나 찾는 그런 집만은 아니었다. 한말 친일파들의 망국 음모가 모의되고, 33인의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해방후 군사정권의 밀실정치가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일반 서민은 평생 가야 한 번도 출입하기 힘든 요정에서 꾸려지던 정치가 결코 대중을 위한 것일 수 없다.

박정희는 아예 남들 출입하는 요정도 싫어 자신만을 위한 요정을 소위 안가라는 곳에다 차리고 연예인을 기생 삼아 극소수의 부하 몇 명만 데리고 놀면서 정치를 해댔다. 그가 궁정동 안가에서 살해된 사건은 요정정치 100년의 백미였고 그의 죽음은 요정정치의 종말이었다. 박정희 시대가 끝난 후 요정은 하나 둘 문을 닫고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 박정희시대 거물들이 출입하던 요정 하나는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서울의 명물로 등장하는 판이다.

소수 권력자나 돈이나 지식 가진 자의 밀실에서의 담합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검은 거래가 오가던 요정이 없어져 가는 것은 더 좋은 시설을 찾아 밀실정치가 이동한 탓일까, 아니면 이제 더 이상 대중과 유리된 밀실정치가 어려워진 세상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