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과 개경사람] 집안으로 끌어드린 자연, 정원(庭園)

BoardLang.text_date 2004.12.30 작성자 신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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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으로 끌어드린 자연, 정원(庭園)

삶이 부유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새로운 재미와 멋을 찾으려는 것이 인간의 습성일 것이다. 이런 삶에는 대궐 같은 저택 혹은 화려한 별장을 가지는 것을 먼저 상상할 수 있다. 별장에서 거문고를 타고 술잔을 기우리면서 시를 읊는 한가로움, 게다가 뜻 맞는 사람들과 풍류를 즐기는 멋스러운 생활은 누구나 한번쯤 누리고 싶어 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한양에는 산수가 뛰어난 곳이면 당연히 부유층의 별장이 있게 마련이었고, 오늘날까지도 인왕산․북한산․한강․임진강 주변 등에서 그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개경에도 많은 별장이 지어졌음은 물론이다. 국왕, 고관, 은퇴한 관리, 부유층 등 삶의 여유로움을 가진 신분 층들이 풍류 혹은 휴식공간으로서의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집안의 한적한 공간이나 풍광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다 인공으로 꾸민 정원도 자연을 즐기는 한 방편이었다.

자연을 집안으로

옛날 우리 조상들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라고 생각하였다. 고려 무인집권기의 이규보는귀로 새 우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맑게 흐르는 물소리를 듣지 않으며, 눈은 화려하고 사치한데 게을러서 푸른 산 빛을 보지 않는다면, 번거롭고 막히는 마음이 때로는 싹트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자연의 좋은 경치를 먼 곳에서 구하기는 쉬우나 가까운 곳에서 구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이런 점이 곧 자연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거나 아름다운 풍광이 있는 곳에 정원을 만드는 배경이 될 것이다

 

고려시대엔 송나라 산수원림(山水園林)의 영향을 받아 궁궐의 정원[宮苑]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정원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형태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정원을 멋스럽게 부른 칭호로는 고려시대 때부터 사용한원림(園林)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자연 상태의 동산과 숲을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칸과 정자(亭子)를 배치한 것이다.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최고의 정원은 국왕의 정원이었으며, 이를어원(御苑)이라고도 불렀다. 궁궐의 정원은정자 남쪽 계곡에 흙과 돌을 쌓고 물을 막아 호수를 만들고, 언덕 위에 초가 정자를 짓고, 오리와 기러기가 놀고, 갈대가 우거진 것이 완연히 강호(江湖)의 경치와 같았다. 그 가운데에 배를 띄우고 어린아이로 하여금 뱃노래와 어부노래를 부르게 하여, 놀이를 마음껏 즐겼다.라고 하였듯이, 그 화려하고도 멋스러움을 상상할 수 있다. 정자에 초가를 덮었던 것은 소박함보다는 좀 더 자연적인 색채를 돋우기 위함이었고, 이를 더욱 화려하게 꾸민 것이 청자기와 지붕이었다.

국왕 이외에 권력층 혹은 부유층의 여유로운 생활의 한 방편에도 정원 문화가 있었다.양생 응재란 사람이 성 북쪽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꽃과 나무를 잘 접목시켜 기르며, 그 원림이 좋기로 경도(京都)에서 소문이 났다거나,지주사 우공이라는 자는 대궐 가까이 집을 지으면서 샘 줄기를 찾아 돌을 쌓고 우물을 만들어 마시며, 세수하고, 차 끓이며, 약 달이는 것을 모두 이 우물물로 하였으며, 샘이 넘쳐흐르는 것을 이용하여 저수하고, 큰 못을 만들어 연꽃을 가득하게 심고, 앵무새와 오리를 그 가운데 놓아길렀다라는 사례 등이 있다. 이러한 정원은 비록 도연명의 무릉도원은 아니더라도, 멋스러운 정원에서 한가로움을 즐기는 맛이야 당사자만이 아는 것 아니겠는가.

고려 정원의 전통, 청평사 문수원

현재까지 고려시대 정원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온전한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현재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청평사 문수원 정원의 터와 일부 유구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원으로 이자현이 문수원에 머문 1089∼1125년(선종 6~인종 3) 사이에 만든 것이다. 그는 문수원이 위치한 오봉산 자락 전체를 사찰 경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청평사 길목의 구성폭포에서 오봉산 정상 언저리까지 약 3km에 걸쳐 계획적인 정원을 만들었다. 이 정원은 현재 거의 자연 속에 파묻혀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발굴 작업을 통한 보고에 따르면, 그 공간이 동․서․남․북원(苑)의 네 구획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자현은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려 계곡에 물길을 만들고, 그 물을 끌어들여 정원 안에 영지(影池, 南池)를 꾸며서 오봉산이 비치게 하였다. 또한 오봉산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높고 가파른 계곡을 돌로 쌓고 다듬어, 도량과 암자의 수도 분위기에 걸맞게 도량 전체를 하나의 자연숲으로 절묘하게 가꾸었다. 즉, 시각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누석식(壘石式) 정원을 심으로 영지와 정자를 만들었고, 청각적 효과를 위해서는 수구식(水溝式) 정원을 배치하였으며, 땅의 형태에 따라서는 평지의 정원[平庭], 계곡에 자리한 정원[溪庭], 산 속의 정원[山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원을 꾸몄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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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사 문수원 영지>

중앙 관료사회에서 출세할 수 있었던 이자현이 개경이 아닌 멀리까지 와서 정원을 만든 것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까이에서 찾지 못하면 멀리서라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이는산수(山水)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은 부귀(富貴)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고, 부귀를 깊이 즐기는 자는 산수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없으니, 둘 다를 겸하는 자가 적다고 하였듯이, 자연의 신비와 세속의 즐거움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일러 주고 있다. 이자현이 예종을 만났을 때,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한 말에서, 그의 무욕(無慾)한 마음가짐을 이해할 수 있다.

여유로움 속에 깃든 풍류

정원이란 것이 그 소유자의 향유와 과시욕을 위해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는 때로는 국왕의 휴식처, 관직에서 물러나는 늙은 관리를 위로하는 곳으로,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 밀담의 장소 등으로도 쓰였다.

충혜왕 때의 민적은,집 안에 원림을 만들어 매양 꽃이 피면 손님을 불러 주연을 베풀고, 시를 짓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였으며 외롭고 한미하여 출세가 늦은 사람을 접대하기를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라고 하여, 봄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면 혼자 이를 탐하기 아까워 가까운 사람들을 초대해서 즐겼던 것이다. 또한 뜨거운 여름날, 소나무와 괴석이 담쟁이와 칡덩굴과 어울려 서늘한 바람이 부는 정자에서 차를 끓이고 바둑을 두면서 종일토록 담소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이런 자연 속의 정원에서는 마음과 눈이 저절로 유쾌하여 무더위쯤이야 아랑곳하겠는가. 이렇듯 부유함 혹은 노년의 여유로움의 표출에 정원 문화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원 문화 속에는 세속의 시끄러움보다는 한적한 가운데 이상향을 꿈꾸는 모습이 담겨있었다.양지바른 곳에 있으면 기분이 느긋하고, 그늘진 곳에 있으면 마음이 쓸쓸해진다. 높은 곳에 있으면 속이 시원하고 낮은 곳에 있으면 가슴이 답답하여진다. 이것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본래의 마음이다.라고 하였듯이,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통해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정자 아래에 네 바퀴를 단 사륜정(四輪亭)을 만들어 양지바른 곳 또는 뜨거운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다니기도 하였고, 괴석을 모아 선산(仙山)을 만들고, 물길을 끌어드려 폭포를 만드는 등 자연과 인공이 조화되어 속세를 벗어나 신선의 경지를 찾으려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이상을 담아, 중미정(衆美亭) 양성정(養性亭) 대평정(大平亭) 관란정(觀瀾亭) 양화정(養和亭) 영덕정(靈德亭) 옥간정(玉竿亭) 응덕정(應德亭) 황락정(皇樂亭) 만춘정(萬春亭) 상춘정(賞春亭) 관희대(歡憙臺) 미성대(美成臺) 수락당(壽樂堂) 선벽재(鮮碧齋) 등 풍류의 색채가 농후한 멋스러운 현판을 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의 정원 문화에는 집안 혹은 자연 속의 한 모퉁이에 건축물을 세워 자연의 풍광을 한층 빛나게 하고, 자연과 건축물을 일치시켜 휴식 공간이나 사색 공간으로 삼은 멋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정승의 직책이란 수고로운 것이라, 답답한 기운을 해소하고 막힌 뜻을 풀려면 풍류를 즐겨야 한다는 정도전의 변명도 있었지만, 저택을 넓히기 위해 민가를 헐어내거나 머리채를 팔아 중미정 건설공사에 동원된 남편의 점심식사를 마련한 눈물겨운 사연이 말해주듯이, 정원의 풍류에도 권세가의 사치스러움이나 건설공사에 동원되어 시달린 서민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신안식(중세사 1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