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과 개경사람] 개경의 산세와 터

BoardLang.text_date 2004.06.22 작성자 신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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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의 산세와 터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수도는 그 왕조의 등장과 시대적 성격을 담고 있었으며, 왕조의 운명과 함께 했다. 고구려는 대내외적인 여건에 따라 졸본(환인) → 국내성(집안) → 평양으로, 백제 역시 하남위례성 → 웅진(공주) →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겼으며, 그리고 신라는 금성(경주)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이들 수도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 이루어지면서 금성이외에는 몰락하였던 반면, 금성은 찬란한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하대의 대대적인 지방사회의 분열로 인해 금성 역시 몰락해 갔고, 후백제의 완산주(전주), 후고구려의 송악 철원 등의 새로운 도시들이 부각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도시의 성장에는 그 시대의 역동성뿐만 아니라, 국가 중심으로서의 합당한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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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지도의 개경 일대]

풍수지리와 전설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도시 형성에는 풍수지리(風水地理)의 요소가 크게 작용하였다. 땅의 형세를 보고 그 이용 목적을 살피는 풍수 이론은 중국의 곽박(276-324)이 쓴 『장경(葬經)』에 나오는 장풍득수(藏風得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즉,‘사람은 생기(生氣)에 의지해야 하는데, 기(氣)는 바람(風)을 타면 흩어지고 물(水)에 닿으면 머무른다. 따라서 장풍득수란 바람과 물을 이용하여 기를 얻는 법술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풍수 이론이 『주역(周易)』 및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과 결합하면서 이론적으로 더욱 풍부해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수도 중에서 이러한 이론을 기초로 건설된 대표적인 도시가 개경이다.

하지만 땅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사는 인간과 서로 교감하지 않으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일까, 개경에는 태조 왕건 집안과 관계된 풍부한 전설을 담고 있다.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와 오관산과 부소산 사이의 부소군에 처음 자리잡은 시조 호경(虎景), 신라의 풍수가 팔원(八元)의 충고를 받고 헐벗은 부소산에 소나무를 심어 그 산의 이름을 송악산(松嶽山)으로 바꿨다는 3대조 강충(康忠), 강충의 둘째 딸과 고려에 유람 온 당나라 귀인(貴人, 숙종 혹은 선종이라는 설이 있다)이 혼인하여 탄생한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서해 용왕의 딸 저민의와 혼인하여 돌아온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의 전설 등. 이러한 전설들은 태조 왕건의 탄생 단계에 이르면 그 극치를 이룬다.

『고려사』의 고려세계에서 보면, “(도선이 이르기를) 이 땅[송악]의 맥은 임방(壬方, 북방)인 백두산으로부터 수(水)와 목(木)이 근간이 되어[水母木幹] 내려 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이 되었으며, 당신[왕륭, 왕건의 아버지]은 또한 수명(水命)이니 마땅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간으로 하면, 천지의 대수(大數)에 부응하여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왕건(王建)이라고 이름하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태조 왕건이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지맥의 명당에서 배출된 인물이며, 그 땅인 송악이 국가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500년 도읍의 길지, 마두명당

풍수이론의 기초이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 것이 사신사(四神砂) 이론이다.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상징하는 동물을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라고 하는데, 풍수에서는 이를 산에 적용하였다. 하지만 사방에 있는 사신사가 각각 하나의 산으로만 되어 있지 않을 때도 있다. 이 경우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내(內)청룡 내백호라 하며, 그 바깥의 것을 외(外)청룡 외백호라고 한다. 뒤쪽에 있는 현무도 그를 낳아 준 많은 산들의 흐름이 있다. 그것을 마치 족보에서처럼 주산 ― 소조산(小祖山) ― 중조산(中祖山) ― 태조산(太祖山)이라고 표현한다. 앞쪽의 주작도 여럿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 주작 ― 안산(案山) ― 조산(朝山) ― 조산(照山)이라고 차례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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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사의 기본개념, 『고려의 황도 개경』18쪽]

조선후기 『산경표(山經表)』에 의하면 개경의 산세는 임진북예성남정맥에 속한다. 그 지형은 북쪽의 천마산(782m) 국사봉(764m) 제석산(744m), 동북쪽의 화장산(563m), 동남쪽의 진봉산(310m), 서북쪽의 만수산(228m) 등이 외곽지대를 둘러싸고, 북쪽의 송악산(489m)으로부터 남쪽의 용수산(177m)으로 연결되는 구릉들이 서로 연이어져 있다. 따라서 개경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임진북예성남정맥이 서쪽으로 달려 내려오는 천마산 송악산 진봉산의 맥에 자리하고 있다. 이를 사신사로 대입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개경의 주산은 송악산이다. 송악산은 마치 웅장한 병풍을 펼쳐 놓은 것같이 정방형의 모습을 띠고 있어 기운이 뭉친 주산으로서 손색이 없다. 좌청룡은 자남산을 내청룡으로, 덕암봉을 외청룡으로 하고 있다. 우백호는 오공산이다. 남주작은 주작현이며, 안산은 용수산이다. 내청룡과 내백호, 그리고 주산과 남주작으로 이루어진 범위를 내국(內局)이라고 한다. 그리고 외청룡과 외백호, 그리고 주산과 안산으로 이루어진 범위를 외국(外局)이라고 한다. 개경의 경우 내국은 자남산 오공산 주작현으로 형성되고, 외국은 우백호를 공유하면서 덕암봉 진봉산 용수산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지세로 둘러 쌓여 궁궐을 형성하였던 만월대 터가 부소명당 혹은 송악명당이라고 일컬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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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의 산과 물, 『고려의 황도 개경』21쪽]

한편 개경은 산세에 비해 물은 그다지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개경의 물길은 만월대의 내국에서 모아지는 한 줄기와 자남산 동쪽의 선죽교를 지나는 한 줄기, 그리고 오공산의 남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줄기 등 세 줄기로 구성되었다. 이 물길들은 내성의 남대문 밖에서 합류하여, 나성의 동남쪽 장패문(보정문) 아래 수구문을 통해서 성밖으로 흘러 나가 사천강에 합류하여 임진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서출동류(西出東流, 이 점은 조선시대의 한양도 마찬가지)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개경의 자연 지세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모두 중앙으로 모이기 때문에 여름철 강우기에는 물줄기가 거칠고 급격하여 순조롭지 못한 결점이 있었다. 따라서 물길의 합류점인 장패문 부근에 세운 광명사 일월사 개국사 등의 절은 거친 물살을 진압하고자 한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이었다고도 한다.

이와 같이 개경은 처음부터 잘 갖추어진 도시 위에 수도를 건설한 것은 아니었고, 조상들로부터 꾸준한 개척으로 새로운 도시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강충이 부소산에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했던 것은 척박한 땅을 개척하였다거나, 개경이 바다와 근접한 거리에 있어 소금기를 머문 바람을 막아 주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대대로 삶의 터전을 찾아 계속해서 옮겨 다닌 것도 땅의 기운을 끊임없이 탐색하는 과정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겠다.

국토의 중심, 수도

조선후기의 이중환(1690~1756)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개경의 자연지리적 조건을 “개경의 산세는 웅건하고 박대(博大)하다. 동쪽에 마전강, 서쪽에 후서강이 있으며 승천포가 앞에서 조(朝)한다. 교동 강화 두 큰 섬이 바다 가운데 있으며 일자(一字)로 가로 뻗어 남해를 가로막았고, 북으로 한강의 물을 가두어 은연중 하류는 앞산의 바깥을 둘러싸서 깊고 넓으며 굉장히 크다. 한양의 삼각산이 남동쪽 백 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청천(靑天)에 수려하게 솟았으며, 앞쪽은 평탄하고 북서쪽은 높게 가로막혔으며 남동쪽은 멀리 틔었으니 이에 천부명허(天府名墟), 즉 하늘이 내린 고을로 이름난 터가 되었다. 다만 천 리에 이르는 기름진 평야가 없다는 점이 부족할 뿐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따라서 개경이 고려 왕조의 수도가 된 것은 태조 왕건 집안의 자립기반이라는 점, 그리고 황해를 사이에 둔 중국과의 교역 및 내륙과 해양으로 이어지던 각종 유통망을 장악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등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개경은 수도로서의 위상뿐만 아니라 재생산구조나 제반 물류의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원활히 수행할 수 있어, 한 나라의 수도로서 부족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신안식(중세 1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