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과 개경사람] 개경 어머니들의 교육열

BoardLang.text_date 2004.05.20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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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어머니들의 교육열


자식교육은 노후보험

충목왕, 충정왕때 밀직사, 삼사등에서 고위 관직을 지낸 김광재는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며 노모를 모시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공민왕은 몸소 찾아가 상을 내리고 그가 살던 마을을 영창방 효자리라 칭하도록 하였다. 왕이 직접 찾아가 위로하고 포상을 한 것은 그가 고위관인층이었다는 점이 작용한 결과였겠지만, 고려 사회에서 효에 대한  인정과 배려가 각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사례다. 반면 불효자는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처벌 또한 매우 엄격했다. 어머니에 대한 구타만으로도 극형에 처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대상(大相) 주오(主烏)는 어머니를 구타한 벌로 저자에서 참형을 당했다.

따라서 여성은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았지만 어머니의 권위는 아버지 못지 않았다. 효의 가치를 중시했던 고려사회에서는 어머니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공경과 효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이 나온다는 믿음때문에 효자는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칭송되었다. 고려시대의 각종 기록을 보면 자식들의 존경과 극진한 효도를 받으며 당당하게 노후를 보내는 여성들의 사례가 적지 않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독립이 어려웠던 당시 여성들에게 자녀양육은 그 자체가 안락한 노후를 보장받는 보험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였다.

아들 셋만 급제하면 관료도 부럽쟎다.

고려의 어머니는 아들 셋 이상을 과거에 급제시키면 국가로부터 평생 녹봉을 받았다.  윤언이의 부인은 윤인첨(尹鱗瞻), 윤자고(尹子固), 윤돈신(尹惇信) 등 세 아들을 급제시켜 녹을 받았으며, 김태현의 부인 왕씨도 광철, 광재, 광로 세 아들을 급제시켜 평생 녹을 받았다. 또한 대흥현군에 봉작된 채홍철의 어머니처럼 아들 덕에 봉작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여성 봉작은 국대부인이 최고였으며 조 50석을 받았다. 조 50석은 문반 5,6품 관직자의 녹봉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으므로 자식을 출세시킨 어머니들이 누리던 경제적 혜택은 관직자 못지 않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들 잘 키운 덕에 어머니가 봉작을 받거나 평생 녹을 받았다는 것은 요즘사회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대단한 혜택이다. 당시 사회에서는 그만큼 자녀 교육에 대해 어머니의 공을 적극 인정하고 현실적인 보상을 하였던 셈이다. 따라서 아들을 고위 관직자로 잘 키운 어머니는 뭇 사람들의 선망과 칭찬의 대상이 되었으며, 직접적인 사회진출이 어려웠던 어머니들에게 자녀의 출세는 간접적인 자기실현이며 대리만족의 방식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판 치마바람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 고려 어머니들의 교육열은 요즘 특정 지역의 집값을 좌우하는 교육증후군 못지 않게 뜨거웠던 듯하다. 개경에는 학교가 많았다. [고려도경]에 보면 여염집 거리에도 경관(經館).서사(書社)가 두,세집 건너 바라 보고 있었으며, 백성의 미혼 자제들이 무리지어 글 공부를 받았다고 한다. 또 광종 이후에는 더욱 문교를 닦아 안으로는 국학을 숭상하고 밖으로는 향교가 열지어 있었다고 한다. 개경의 거리에 국학을 비롯하여 두,세집 건너 경관,서사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교육기관이 즐비하였던 것이다. 최근 서울 지역의 학원가를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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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과거시험을 위한 경전교육은 교육기관이 담당하였지만 실제로 아이들 교육을 위한 뒷바라지는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어머니들의 몫이었다. 개경 상류층 어머니의 열성적인 뒷바라지 사례를 몇가지 들어 보자. 고려말에 참찬을 지냈던 박가흥의 처는 평소 외아들을 엄격히 가르쳤으며 교육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또래 학동 10여명을 가숙에 불러다가 함께 독서하게 하고 음식을 해 먹이며 뒷바라지에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다. 결과 그녀는 외아들 박석명의 공으로 후에 진한국부인에 봉해졌다. 고려시대판 치마바람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승장은 재가한 어머니를 따라 義父와 살았는데 의부가 학문을 포기하고 가업을 잇도록 하자 어머니가 학문을 고집해 후에 관직자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재혼녀라는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교육에 집착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김태현은 10세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어머니가 영광에서부터 자식들을 거느리고 송도로 와 교육을 시켰다.  그는 15세에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자식들의 출세를 위한 열의가 대단했음을 보여 준다.

E.Q(감성지수), M.Q(도덕지수)를 기르는 가정교육

그러나 개경 상류층 어머니들의 교육이 단지 과거시험을 위한 뒷바라지에만 그쳤던 것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품격을 갖춘 사대부로서 전인교육이 시작되었다. 당시 어머니들의 자녀교육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 고려시대 여성 묘지명에는 자식을 기르는데 법도가 있었다든지 예에 맞게 가르쳤다는 기록이 자주 나타난다. 나름의 교육방식과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김변처 허씨는 자식이 어려서 아직 생각이 없을 때부터 각자 마땅한 업(業)으로 가르쳤다 . 평상시 아들에게는 삼가고 경계하지 않으면 음험하고 부정하게 되어 쓸모없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딸에게는 여자가 삼가고 경계하지 않으면 도리에 벗어나고 편벽된 곳으로 쏠리게 된다고 하며 행동과 몸가짐을 늘 단속하도록 가르쳤다.

이원구의 처는 아들 형제에게 몽가(蒙哥)에게는 서생(書生)으로서 힘써 공부하고 게으르지 않도록 가르쳤으며, 보한(普漢)에게는 무(武)를 택하였으니 활쏘고 말 모는 일을 잘해야 하겠지만 함부로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일은 삼가야 한다고 훈계했다. 또한 의복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을 취할 뿐 사치하지 말며, 음식은 배고프지 않게 할 뿐 맛있는 것을 좋아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가정교육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기록들을 통해 자녀들 각자에게 맞는 인성교육이나 가치관의 정립에 정성을 쏟던 어머니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이들은 근면하고 절제하는 모습을 통해 실천적으로 자녀를 가르쳤다. 상류층 가정에서도 대부분의 여성은 천짜기와 바느질등 가사노동을 몸소 하였고 생활속에서 근면과 절제의 모범을 보였다. 부유한 관인층인 김원의의 처 인씨도 자녀들이 천짜기와 바느질하는 것을 만류하자 이는 남자들이 문서를 다루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며 끝내 일을 놓지 않았다 한다.

즉 자녀 교육에 성공한 개경의 어머니들은 어려서부터 아이의 성별과 적성에 맞는 가르침과 도덕적 가치관의 정립을 위한 윤리적 교육에 각별히 신경을 썼으며, 예와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근면한 행실로 모범을 보였던 듯하다. 이들의 현실적 바램은 물론 자식들의 출세였겠지만 훌륭한 사대부를 기르기 위한 지적,정서적,도덕적 교육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녀교육에 법도가 있었다고 한 것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가정에서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고려 사대부들은 이렇게 어머니들의 손에서부터 길리워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