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사람들] 유배에 대한 상식과 사실

BoardLang.text_date 2004.08.29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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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에 대한 상식과 사실


유배의 형은 중죄를 범한 자에게 차마 사형을 내리지 못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서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처벌이었다. 조선시대에 유형은 배(配)·적(謫)·찬(竄)·방(放)·천(遷)·도(徒) 등 다양하게 불렀다. ‘유(流)’는 유형을 뜻하는 말로 가장 많이 사용되며 유형에 가장 적합한 용어이다. ‘배(配)’는 도형과 유형에 모두 쓰이고, ‘적(謫)’은 귀양 보낸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찬(竄)’은 역시 귀양 보낸다는 뜻으로 형을 집행할 때 직첩(職牒)을 회수하였다. ‘방(放)’은 내친다는 뜻으로 내쫓아서 안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사(徙)’ 는 옮긴다는 뜻이다. 한편 유형은 거리, 죄의 경중, 집행방법에 따라 구분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유형을 거리에 따라 유(流) 2천리, 유 2천5백리, 유 3천리의 3등급으로 나누었고, 각각 장(杖) 1백의 장형이 부가되었다. 그러나 배소(配所)까지의 거리는 우리 나라의 국토가 좁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경국대전》의 법 규정은 수 차례에 걸친 형전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달라지지 않다가, 1896년 이후에 거리제(距離制)에서 형기제(刑期制)로 바뀌었다.

유배지까지 갈 때 압송관을 배정하여 직접 압송해 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리고 중죄인의 경우는 함거압송(轞車押送)이라 하여 감옥 같은 수레에 실려 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고, 압송관이 동행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 압송관과 유배인은 각각 자신의 여정에 따라 별도로 길을 가서 저녁에 숙박지에서 확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심지어는 서로의 일정이 달라서 숙박지에서 조차 점검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한편 유배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이 위리안치(圍籬安置)였다. 집 주위에 가시나무를 둘러싸 녹각성(鹿角城, 사슴뿔과 같은 성) 같이 하고, 바깥문은 항상 자물쇠로 잠그고, 먹을거리는 10일에 한 차례씩 주며, 또 담안에 우물을 파서 자급하게 하고, 외부인으로 하여금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산 사람의 무덤[생총(生冢)]”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오히려 예외라고 할만큼 적었다.

이런 사정들 때문에 유배 및 유배생활에 대한 일반 ‘상식’은 ‘사실’과 차이가 많다. 유배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고 유배지에서의 생활도 그야말로 다양했다. 비록 거주이전의 자유는 없었지만, 지정된 곳에서는 보통사람들과 어울려 그들과 다름없이 살았다. 간혹 “지체 높은 양반들”은 마치 호화판 여행이나 내려온 것처럼 지내 지탄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자유가 구속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유배는 누구나 원치 않았음은 물론이다.

또 유배인이 다 그렇지만 않았는데, 유배인=고급 지식인으로 여기는데서 오는 오해가 많다. 그런 오해에서 유배문화에 대한 오해도 비롯된다. 즉 고급지식인인 유배인이 그들의 유교 지식을 지역민에게 남겨주었다고 하고, 그 때문에 “우리도 그와 버금가는 문화인”이라고 자랑한다. 그래서 유배문화는 남도문화를 이루는 당당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물론 그런 점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보다 분명 과장되고 왜곡된 측면도 있었다. 오히려 유배인의 유교적 지식을 앞 세워 이곳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려는 가식적 측면이 크다고 보는 편이 맞다. 유배인들은 섬 사람들을 하대하고 섬의 문화를 경멸하는 쪽이었다. 설사 그들의 지식이 이곳에 영향을 주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지역 주민들과는 달랐다. 이런 양면성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유배인에 대한 일방적인 숭배는 자칫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주민들의 주체적 입장에서 유배문화에 접근함으로써 오해에서 벗어나 주민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항상 주민의 입장에서 보고, 나아가 문화를 ‘우열’보다는 ‘다양성’의 차이로 접근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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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의 유배지였던 흑산도 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