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사람들] 도서군(島嶼郡)의 탄생

BoardLang.text_date 2004.08.19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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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군(島嶼郡)의 탄생

도서군(島嶼郡)의 탄생


1896년(건양 1) 2월 3일 칙령(勅令) 제13호로 「전주부․나주부․남원부 연해제도(沿海諸島)에 군(郡)을 치(置)하는 건」이 고종의 재가를 받아 반포되었다. 이는 이른바 ‘도서군(島嶼郡)’의 설치가 법으로 공식화하였음을 뜻한다. 고려말 조선초 약 70년간 우리나라 연안 각지에 침입하였던 왜구로 인하여 실시된 공도정책(空島政策) 이후 500여년의 긴 세월 동안 완전 공백 내지는 육지군(陸地郡)에 예속된 불완전 행정구역이었던 섬들이 20세기말이 다 되어서 도서군으로 독립 행정단위가 될 수 있었다. 이때 설치된 군은 지도군(나주․영광․부안․만경․무안 등 5군의 98島 19嶼), 완도군(영암․강진․해남․장흥 등 4군의 48島 52嶼), 돌산군(흥양․낙안․순천․광양 등 4군의 52島 17嶼) 등 3군이었다. 행정공백지대였던 섬들이 이제는 아예 섬들만으로 이루어진 독립행정단위로 재탄생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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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 상황봉에서 본 다도해>


섬= “살기 좋은 땅”


뒤늦기는 하였지만,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섬·바다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달라졌다. 인식이 달라진 까닭은 그만한 객관적 조건의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다.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광해군(광해군 1608〜1623) 때가 되면 “근래에 남쪽 변방이 조금 조용해짐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수군 보기를 마치 쓸모없는 것처럼 보아 양호(兩湖) 지방에서 입방(入防)하는 배를 줄이고 본도의 선박 20여 척만 남겨두었습니다.”라는 지적이 나올 만큼 신안 섬 주변은 평화로워졌다. 그때까지 바닷가와 섬은 왕화(王化)의 최외곽지역, 이른바 변지(邊地)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변지는 내지(內地)와 구분되었다. 이렇듯 차별받던 변지에 평화가 찾아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제 섬들은 개척·개발의 땅이 되었고 이에 따라 국가의 관심도 높아졌다.

그런 변화는 먼저 고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국가가 편찬하는 관찬지도에 섬에 대한 표현이 크게 달라졌다. 섬과 바닷길을 보다 자세히, 정확히 그리고 있다. 관찬지도는 국가가 사회변동을 파악하고 그에 대처하기 위하여 만드는 것으로 섬에 대한 표현이 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섬이 달라지고 국가의 대처방안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그렇게 달라진 까닭은 뭘까? 한마디로 “섬=살기 좋은 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평화가 찾아온 서남해의 뱃길이 주는 이익이었다. 바닷가와 섬의 재부(財富)를 이루는 것은 어·염과 조선(造船)이었고 이를 매개로 한 상업활동이었다. 특히 양난이 진정되고, 왜구의 위협도 사라지자 그런 활동은 여유를 찾았고 서남해안의 뱃길도 거침없이 잘 통하였다. 1751년(영조 27)에 박문수(朴文秀)가 지역별로 상선(商船)의 선세(船稅)를 정하면서 왕에게 말하기를 “호남의 상선은 그 이익이 매우 많으나 영남은 도내의 행상에 지나지 않고, 좌도 연해는 단지 동해의 소산뿐이므로 이익이 호남만 같지 못합니다.”라는 말은 그 뱃길이 주는 이점은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다음, 목장이 농지로 바뀌는 변화가 섬의 부를 크게 늘렸다. 목장이 농지로 바뀌는 사정은 목장지도(牧場地圖)(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보인다. 목장지도는 1663년(현종 4) 당시의 사복시 제조였던 허목(許穆)이 그 이전에 작성되었던 목장지도를 보완한 것이다. 원래 목장은 농사와 관련이 있었고, 사복시의 곡물은 호남의 목장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복시의 목장은 서남해의 주요 섬들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선조 중년부터 점차 목장이 공폐(空廢)하기 시작하더니 양난을 겪고 난 지금은 복구하기 어려울 만큼 황폐해졌다. 119개소의 목장 중 말을 기르는 곳은 46개소이고 나머지 73개소는 모두 폐장되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그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 대책 중의 하나가 사람들을 모아 밭을 일구어 그 수입으로 마소의 먹이를 마련하여 차차 복구시켜 가는 방안이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모민개전(募民開田)만 되었지 그것이 다시 목장에 투자되어 목장이 복구되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목장이 농지로 바뀌는 일만 계속되었던 셈이다. 이로 인해 목장과 말은 줄어들었지만 섬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농지가 생겼던 것이다.

한편, 풍락목(風落木 - 바람에 넘어진 나무)의 판매도 섬의 재부를 늘리는 조건이 되었다. 원래 나무는 진휼(賑恤)에 보태는 중요한 재원이었는데, 1732년(영조 8)에 선재(船材)나 가재(家材)로 쓸 수 있는 것 외에는 모두 전라도에 보내 팔아서 진휼에 보태도록 공식 허락하였다.

평화가 찾아온 섬, 뱃길의 자유로운 왕래, 목장이 농장으로, 풍락목의 판매 등 이런 연유들로 호남의 섬들은 살기 좋은 땅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섬 가운데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번성하고 생활이 풍족하여 육지의 백성들보다 나았습니다”라는 호남균세사(湖南均稅使)의 보고까지 나오게 된다. 조선후기에 섬은 분명히 “살기 좋은 땅”이 되었다.

도서군(島嶼郡)의 설치 논의


조선후기의 섬은 크게 변하고 있었다. “살기 좋은 땅”이기도 했고 반역향(反逆鄕)으로 경계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이상사회의 이미지가 겹치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궁방, 사복시, 토호 및 정부의 중첩 수세로 인한 고통의 섬이기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산 정약용은 유원사(綏遠司)라는 전담부서의 설치를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섬의 일은 섬 스스로 해결”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섬만의 군읍 설치”였다. 영조대에 들어오면 섬들을 연해의 군으로부터 독립시켜 별도의 군읍으로 삼으려는 논의가 중앙정부 차원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제 섬은 육지와 같은 땅, 즉 새로운 땅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런 논의의 시작은 1729년(영조 5) 2월 병조판서 조문명(趙文命)이 나주제도의 설읍(設邑)을 주장하면서 올린 상소가 처음으로 여겨진다.

“한 무더기 푸른 산이 분명히 이 고을 앞에 있는데 그 소속된 고을을 물으면 수백 리 밖의 아주 먼 고을에서 이를 관할하고 있다고 한다.”는 《경세유표》의 말처럼 서남해의 섬들은 수백 리 밖의 아주 먼 고을에서 관할하고 있었다. 나주와 영광, 그리고 강진 등의 월경지였다. 육지부와 도서부는 행정의 속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도서가 육지에 예속됨으로써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문제의 출발은 월경지라는 행정체계에 있었다. 따라서 문제 해결은 마땅히 행정구역의 조정에서 찾아야 했다. 그때 논의의 방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섬들을 인접 육지에 소속시켜 관리해야 한다는 ‘육지통합론’과 도서로만 된 별도의 행정구역을 설치해야 한다는 ‘도서분리론’이었다. 도서분리론은 영조 때부터 내려온 연원이 깊은 주장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 두 가지 논의는 팽팽히 맞서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육지와 동등한 땅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 행정체계를 개편하면서 도서분리론이 재개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896년 2월 3일 칙령 제13호로 지도군, 완도군, 돌산군의 3개 도서군이 설치되었다. 실로 1729년(영조 5) 2월 병조판서 조문명이 설읍(設邑) 상소를 올린 지 167년만의 일이었다.

이런 섬만의 군읍을 신설하게 된 데 대하여 당시 내무대신이었던 박정양(朴正陽)은 “지금 이 세 군을 설치한 것은 도서와 육지를 한가지로 여기려는[水陸一觀] 지극한 뜻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도서와 육지를 한가지로 여기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도서군(島嶼郡)의 설치는 “섬으로써 여러 섬을 통합 관리”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이런 뜻은 섬 주민들에게 초대군수 오횡묵의 규약을 통해 전해졌다. 오횡묵은 규약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이번에 조정에서 군을 설치한 특별한 이유는 육지와 도서를 모두 평등하게 하여 임금의 높은 뜻과 은덕을 받들어 백성들에게 널리 전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세 개 도서군(島嶼郡)의 창설은 서남해의 여러 섬들이 공식적으로 육지의 땅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게 되었음을 뜻한다. 변지(邊地)에서 행정 주체로 당당한 국토의 일부가 됨으로써 서남해 섬들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다(고석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