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분벽화] 연꽃이 담고 있는 수수께끼, 미창구장군묘 벽화

BoardLang.text_date 2005.01.17 작성자 전호태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연꽃이 담고 있는 수수께끼, 미창구장군묘 벽화

전호태(울산대 역사문화학과)

환인은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이 있던 곳이다. 부여의 망명객 주몽 일행은 오랫동안 이곳 비류수 가에 터 잡아 살던 송양국의 왕에게서 나라 한 귀퉁이를 얻어 겨우 떠돌이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송양국을 아우르고 비류수 유역 뿐 아니라 압록강 중류일대의 강자로 입지를 확고히 한 뒤, 고구려는 졸본에서 국내로 서울을 옮긴다. 건국을 선언한 지 40년, 동명성왕 주몽의 뒤를 이은 유리왕 즉위 22년(기원 3년)의 일이다. 이후 졸본은 고구려왕이 시조묘에 제사할 때에 간간히 등장할 뿐 고구려 역사의 주무대로 역할이 주어지지 않게 된다. 고구려 사람들에게 졸본은 시조 주몽을 기리는 동명왕묘(東明王廟)가 있는 곳으로만 기억되게 된 것이다.

환인의 미창구장군묘(중국 요녕성 환인만족자치현 아하향 미창구촌)는 1991년 9월 발견, 조사되었다. 외형이 절두방추형인 이 흙무지돌방무덤의 흙무지 둘레는 150m에 이르며, 바닥부터의 높이는 8m 가량이다. 널길과 두 개의 퇴화형 곁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으로 잘 다듬은 장방형 석재로 널방의 벽과 천장을 쌓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널방 네 벽 위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20군데에 걸쳐 뚫려 있는 못구멍이다. 동벽의 못구멍 2개에 구리못의 일부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널방에는 만장이 걸려 있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무덤주인부부의 장례 당시 곁방과 널방 안은 장식무늬로 채워지고, 널방 네 벽은 만장으로 둘려졌으며 널방 안에는 두 기의 돌관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무덤의 규모, 무덤축조에 사용된 장대한 석재, 무덤칸 내부를 장식한 벽화의 제재와 구성방식이다.

벽화를 먼저 살펴보자. 장군묘, 미창구1호묘 등으로도 불리는 이 무덤의 내부는 연꽃문과 ‘王’자문 중심의 장식무늬로 채워졌다.

126e3353d376b9c27c1031bfcfef68c4_1698397

(그림1)미창구장군묘 내부

 

앞방의 퇴화형으로 볼 수 있는 두 곁방 안은 온통 ‘王’자문으로 장식되었고, 널방은 벽과 천장고임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측면연꽃으로 채워졌다. 4단 평행고임 밑면에는 곁방에서와 같은 ‘王’자문이 묘사되었으며, 벽과 천장고임의 경계에 가로로 길게 띠를 이루도록 그려진 자색 대 안에는 변형용문을 그려 넣었다. 비교적 넓은 천정석 밑면에는 옥벽(玉璧)처럼 바깥은 둥글고 안쪽은 네모진 무늬 9개가 열과 행을 이루며 그려졌다.

잎맥과 꽃술까지 표현되고 꽃잎 끝이 뾰족하게 처리된 측면연꽃은 5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집안지역 고분벽화의 제재로 즐겨 선택되었다. 산연화총이나 장천2호분과 같은 연꽃장식 벽화고분의 중심제재였다. ‘王’자문 역시 같은 시기 집안지역 고분벽화의 제재로 선호되었다. 산성하332호분은 널방 벽면 전체를 ‘王’자문으로 채우고, 천장고임은 연꽃으로 장식한 사례이고, 장천2호분은 장군묘처럼 두 개의 곁방은 ‘王’자문으로 장식하고 널방은 연꽃으로 채운 경우에 해당한다. 미창구장군묘는 연꽃무늬와 ‘王’자문이 유행하던 5세기 중엽 전후 집안지역 벽화고분의 일반적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 벽화고분인 셈이다.

장군묘는 외형도 크지만 무덤칸의 규모도 만만치 않다. 널길의 길이가 5.4m, 안쪽 너비가 1.48m이며, 왼쪽 곁방의 길이X너비X높이가 1.6mX1.17mX1.34m, 오른쪽 곁방이 1.58mX1.16mX1.34m, 널방이 3.52mX3.50mX3.5m이다. 널방 크기로 볼 때 북한에서 왕실귀족의 무덤으로 거론되는 진파리4호분이나 왕릉급 무덤으로 평가되는 호남리사신총에 비해 결코 작지 않다. 더욱이 이 무덤을 축조하는 데에 사용된 석재 가운데에는 길이가 3m, 두께가 1m에 이르거나 이보다 큰 것도 여럿 확인된다.

427년, 고구려는 또 한 번 수도를 옮긴다. 새 서울이 될 도시는 압록강 일대와는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풍토를 달리 하는 대동강 유역의 평양에 조성되었다. 장수왕 즉위 15년에 일어난 일이다. 대동강 북쪽 기슭에 조성된 왕궁과 귀족들의 저택, 불교사원들은 동아시아 4강체제의 개막을 눈앞에 둔 동방 강자 고구려의 새로운 중심이었다. 전성기 고구려 사회․문화의 내용이 준비되고 펼쳐져 나갈 진원지에 해당했다. 동방을 제패한 패권국가 고구려의 자부심은 고구려 사람들로 하여금 새 서울과 옛 수도에 대형 기념물들을 만들게 하였고, 완성된 기념물들이 왕실의 신성성과 국가 권위의 상징이 되게 하였다. 널방 전체가 연꽃으로 장식된 (전)동명왕릉, 유사한 무덤구조의 장식무늬 벽화고분인 미창구장군묘 역시 평양 천도를 계기로 고구려가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하던 왕실 신성화 작업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5b929232e915747f277311b430b6de32_1698397

(그림2)(전)동명왕릉 내부

 

첫 수도 졸본에 조성되어 있던 동명왕묘를 개축, 혹은 신축하면서 ‘王’자문과 연꽃무늬로 무덤칸 내부를 장식하여 새 왕의 즉위의례 장소로 삼고, 새 서울 평양에는 국가 및 왕실 차원의 정기적인 시조묘 제사를 위해 새롭게 동명왕릉을 축조하게 한 것은 아닐까. 역시 여래의 가호를 받는 왕권임을 나타내기 위해 연꽃을 벽화의 주제로 삼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