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밟지 않는 길―답도(踏道)

BoardLang.text_date 2007.12.18 작성자 홍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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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지 않는 길―답도(踏道)


홍순민(중세사 2분과)



근정전은 높다. 박석이 깔린 조정 바닥으로부터 기단을 두 층 쌓고 그 위에 근정전을 지었다. 그러므로 근정전은 우러러보게 되어 있고, 올라가게 되어 있다. 이렇게 실제로 그 위치가 높은 것은 그 건물의 격이 높은 것과 맞아 떨어진다. 시각적으로 우러러보다 보면 자연히
심리적으로도 우러러보게 된다. 근정전은 이렇게 그 높이만이 아니라 그 주위에 그를 수호하는 여러 장식과 상징을 두르고 있어서 더욱 장엄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다.


근정전을 떠받치고 있는 두 층 기단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계단을 내었는데, 남쪽과 북쪽에는 하나 씩, 그리고 동쪽과 서쪽에는 둘 씩이다. 그 가운데 남쪽 계단은 근정문에서 근정전으로 향하는 삼도와 연결되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 중 가운데 부분은 좌우의 계단과는 달리 전면에 커다란 사각형의 돌이 비스듬히 박혀 있다. 이 돌을 답도(踏道)라고 한다. 밟는 길이라는 뜻이겠으나, 실제로는 이 돌은 밟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마를 탄 왕이 그 위로 지나가는 길이라는 뜻이 되겠다. 거기에는 구름 속에 새 두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마주보고 있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봉황이다.

봉황이란 기린, 거북, 용과 더불어 사령(四靈)이라 하여 신령스럽게 여기는 새이다. 실재하는 새가 아니라 중국 고대부터 사람들이 실재하는 짐승들에서 여러 부위를 조합하여 관념속에서 만들어 낸 새이다. 봉황은 오색을 띠고 있으며, 산 짐승을 먹지 않으며, 산 초목을 꺾지 않으며, 무리를 짓지 않으며, 여행도 하지 않으며, 그물에 걸리지 않으며, 오동이 아니면 깃들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고 하며, 동방의 군자의 나라에서 나며 이 새가 나면 천하가 크게 평안하다고 한다. 그런 새가 있을까마는 근정전 답도에 이 새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그러한 시대를 꿈꾸며, 왕이 그러한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그렇게만 생각하고 지나가면 속이 편하다. 그런데 이것을 중국과 비교하면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수만은 없게 된다. 중국은 모든 게 어마어마하게 크다. 궁궐 전체도 넓은데다가 개개 건물도 우리 것보다 훨씬 크다. 그 건물의 기단도 삼층으로 훨씬 높아지니 답도도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 것이 기껏해야 세로가 1미터를 넘지 않는 것이 두 개가 서로 떨어져 박혀 있는 데 비해 중국 것은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니 자연히 어마어마하게 커질 수밖에 없다. 큰 것은 16∼7미터에 이르는 것도 있다. 그 속에서 놀고 있는 짐승도 봉황이 아닌 용이다. 무지막지하게 큰 용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며 어쩔 줄을 모르는 듯이 꿈틀거리고 있다. 여백에는 구름을 비롯해 각종 문양이 빈 공간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이 빽빽히 채워져 있다.

용은 변화의 화신으로서 격에 있어서 봉황과 같게 여겨지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한 등급 위로 받아들여졌던 듯하다. 말하자면 중국의 왕을 황제라 하는 데 비해서 우리나라 조선의 왕은 그보다 한 등급 낮은 제후로 받아들였던 인식의 소산이라고 하겠다. 오늘날 우리로서는 별로 즐겁지 않은 이야기이기는 하나, 과거의 일을 순전히 오늘날의 기준에 맞추어 이해할 수만은 없다. 조선왕조, 경복궁에 왕이 사시던 시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틀이 잡혀 있었다. 중국은 천자국으로서 중국의 왕은 하늘을 대행하는 천자였다. 그만이 한 시대를 이름짓는 자기 연호(年號)를 썼다. 중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다른 나라에서는 이러한 질서를 무시할 수 없었다. 오늘날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엄연한 현실인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질서를 인정하였다는 것이 곧 우리 문화 전체가 중국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우리 나름의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답도에서 놀고 있는 중국의 용이 위압적이며 폭력적인데 비해 우리나라의 봉황은 친근감과 인간미가 있다. 중국 답도는 그저 경외심을 갖고 쳐다보며 지나갈 수밖에 없지만, 우리나라 답도는 한 번 만져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그런가 미끄럼을 타며 놀고 있는 아이들도 간간히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