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이야기] 강화길 140리

BoardLang.text_date 2007.12.26 작성자 홍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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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순민의 강화기행'은 한국역사연구회 중세2분과 홍순민 회원이 《황해문화》11∼13호(96년 여름∼겨울)에 연재한 〈강화가는 길〉〈江都의 宮〉 〈강화 한 바퀴〉를 나누어서 전재하는 것입니다. 전재를 허락해 주신 홍순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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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 140리


홍순민(중세사 2분과)


서울서 양천(陽川)이 30리, 양천서 김포(金浦)가 40리, 김포서 통진(通津)이 40리, 통진서 강화가 30리, 합하면 서울서 강화는 140리 길이다. 요즘 차로는 길만 막히지 않는다면 한 반 시간 정도면 족한 거리다. 자동차가 없던 옛날에도 말 타고 급히 달린다면 한 시간 안에 당도할 수 있었을 것이요, 천천히 가도 한 나절이면 되었다. 걷는다 해도 빠른 걸음이면 하루 해 안에 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마로 갈 때, 특히 존엄한 인물이 타고 가거나 존귀한 물건을 나를 때는 사정이 달랐다.

1782년(정조 6) 정조는 창덕궁에 설치되어 있던 규장각의 분관―외규장각 (外奎章閣)을 강화에 설치하였다. 규장각을 비롯해 몇 곳에 흩어져 있던 왕실의 중요 문서들을 모아 보관할 목적이었다. 그러고서는 그 첫 사업으로서 자신의 할머니인 당시 왕대비―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와 어머니 혜경궁 (惠敬宮) 홍씨, 그리고 정조 자신의 책보(冊寶) [왕비나 왕세자, 왕세자빈으로 책봉될 때 그 경위를 옥이나 대나무 등에 적은 옥책(玉冊), 죽책(竹冊) 등과 그때 받은 칭호를 새긴 커다란 도장 금보(金寶)]와 선원보략(璿源譜略)[왕실의 족보], 열성지장(列聖誌狀)[역대 왕들의 행적을 적은 글], 어제(御製)[왕들이 지은 글] 등을 봉안하였다.

이 물건들을 화려하게 단장한 가마에 싣고 가는데 그 일행은 규장각의 고위 관료인 직제학 심염조(沈念祖), 검교직각 서정수(徐鼎修)를 최고 책임자로 하여 실무자, 하리배, 군졸 등 도합 수십 명이 되었다. 이 행차가 지나는 경기도와 각 군의 지방관들은 경계까지 나와 예를 갖추어 이를 맞아 들이고, 또 경계까지 나가 배웅을 하였으며 그 때 군인들은 기치창검과 의장을 갖추어 호위하고, 악대는 음악을 연주하였다. 길에는 황토를 깔아 포장을 하였고, 양화진이나 갑곶진에서 물을 건널 때는 배들을 넉넉하게 동원하여 날랐고 포를 쏘아 닻을 올리고 내리는 신호로 삼았다.

각 고을에서 낮에 쉴 때나 혹은 밤에 묵을 때는 가마를 객사(客舍)의 중앙 마루에 모셨다. 객사는 중앙에서 내 려오는 고위 관료들의 숙소로서 가마를 그 중앙 마루에 모셨다는 것은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다는 뜻이다. 행차는 정조 6년 4월 초하루에 출발하여 한 낮 (午時)에 양천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렀다가 저녁 무렵(酉時)에 김포에 도착하여 하루 밤을 지내고, 이튿날 새벽(寅時)에 김포를 출발하여 통진을 거쳐 점심 무렵 (午時)에 갑곶을 건너 오후(未時)에 외규장각에 봉안하였다. 서울서 강화까지 이틀이 걸린 것이다.

강화는 강도(江都), 심도(沁都) 등의 별칭을 갖고 있었다. '도(都)'자는 도읍이란 뜻이다. 고려 고종 21년(1232) 원나라의 침입을 피하여 고려의 조정이 이곳으로 천도함으로써 강화는 도읍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시대 한 때 피난한 도읍지였다면 그 도읍의 의미는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강화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국가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피난과 항전의 근거지― 보장지지(保障之地)로서 주목을 받았다. 그 상징적이 시설이 정족산(鼎足山)에 있던 사고(史庫)이다. 실록을 비롯한 국가의 중요한 전적(典籍)들과 선원보략, 열성지장, 어제, 어필 등 왕실의 주요 문서들을 보관하는 전국 험산의 네 군데 사고 가운데 정족산 사고는 그중 으뜸가는 사고였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국가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이곳의 전적을 열람하였다.

강화의 보장지지로서의 기능을 보강하기 위하여 조선 숙종대에는 김포 땅에서 강화를 건너다보고 있는 문수산성(文殊山城)을 비롯하여 성곽을 축조하는가 하면 해안을 따라가며 관측과 방어를 위한 작은 성―돈대(墩臺)들을 축조하였다. 한편 강화읍의 주산 송악산 기슭, 행궁(行宮)과 유수(留守)의 청사를 비롯한 관아 건물들이 있던 구역에 숙종의 어진(御眞)을 모시는 별전(別殿)―장령전(長寧殿)을 건립하였다.

영조 연간에는 다시 영조의 어진을 모시는 만령전(萬寧殿)도 건립되었다. 그런 가운데 정조 6년에 이르러 그 옆에 다시 외규장각을 지음으로써 강화읍의 행궁 일대는 왕실의 어진과 주요 문서를 보관하는 기능을 완비하게 되었다. 이로써 강화부는 유수부(留守府), 곧 서울을 호위하는 작은 서울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이제 국방상의 보장지지일 뿐 아니라, 왕실과 국가의 정신적 보장지지가 되었다.

요즈음에는 강화에 갈 때 거의 누구나 48번 국도를 타고 가서 냉큼 강화대교를 건넌다. 48번 국도는 조선시대의 양천, 김포, 통진을 거치는 그 길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그 길을 오늘날 우리들도 따라 가는 셈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에는 이 길이 강화로 통하는 외통길이 되어 있는 데 비해 옛날에는 다른 길도 있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