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이야기] 고려궁지(?)

BoardLang.text_date 2007.12.26 작성자 홍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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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


홍순민(중세사 2분과)


김상용 순의비를 지나 북쪽으로 비탈길을 한 오분 걸어 올라가면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른바 "고려궁지"이다. 버스를 대여섯 대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있고, 그 한 옆에 매표소가 있다. 표를 끊고 고려궁지로 들어가려면 가파른 계단을 30여 단 이상 올라가 승평문(昇平門)이라고 하는 문을 들어서야 한다. 문을 들어서면 중간에 사람 한 길 정도 높이의 축대가 있고, 그 아래 위는 모두 잔디밭으로 가꾸어져 있다. 축대 위 잔디밭에는 그 동편 끝에 꽤 큰 기와집이 한 채 있는데 조선시대 강화 유수부(留守府) 청사였다고 하며,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다.

그 앞을 지나 다시 축대를 내려오면 내려오면서 오른편으로 종각이 하나 있고, 다시 그 남쪽으로 좀 지대가 낮은 곳에 "이방청(吏房廳)"으로 이름이 붙은 건물이 있다. 이것이 고려궁지에서 볼 수 있는 전부다. 어디 한 군데 고려시대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근거로 이 곳을 고려시대의 궁궐이 있던 곳―고려궁지라고 하는가. 설령 이곳이 고려궁지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고려시대의 궁궐을 짐작이나마 해 볼 수 있는 꼬투리도 하나 없지 않은가. 고려시대의 궁궐 터가 이 정도 넓이밖에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궁궐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으며, 궁궐의 기본 요건이 갖추어지겠는가. 이런저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꽃송이같은 신성한 산악(神岳)과 꽃받침같은 영묘한 구릉(靈丘). 그 꽃송이와 꽃받침을 걸쳐 날아가는 듯 솟아 있는 것은 황실(皇室)과 궁궐, 공경(公卿) 사서(士庶)들의 저택. 고려 조정이 강화로 피난해 있던 시절 활약했던 문인 최자(崔滋)가 지은 삼도부(三都賦)라는 글에 나오는 강도(江都)―강화 도읍의 모습이다. 꽃송이같고 꽃받침 같은 산과 구릉에 터를 잡고 있는 궁궐과 저택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강도와 그곳에 있던 궁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보아도 정확한 모습은 그려내기 어렵다. 기존의 연구에서도 강도 건설의 모습을 대강 재구성한 것은 있지만, 세세한 부분은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몽골의 침입이 닥치자 고려 조정에서는 1232(고종 19)년 6월 16일 강화로 천도할 것을 결정하였고, 불과 20일 정도 지난 7월 7일 왕이 강화로 이어(移御)하였다. 너무 급한 일정이었기에 왕은 강화의 객관(客館)에 임시로 머물렀고, 궁궐 공사를 서둘러 진행하였다. 군인들과 여러 도의 백성들을 동원한 강도의 건설은 고종 21년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공사는 적어도 몽골의 제3차 침입이 시작되는 고종 22년 이전까지는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강도에 새 도읍을 건설하면서 제반 모습을 자신들이 떠나온 서울 ―송도(松都)와 같이 꾸몄다.

강도의 주산 이름을 송악산(松岳山)이라고 하고, 그 자락에 본 궁궐을 앉혔다. 그 밖에 다른 지역에 연경궁(延慶宮), 수창궁(壽昌宮), 용암궁(龍암宮), 여정궁(麗正宮), 서궁(西宮), 금단동궁(今旦洞宮) 등의 별궁들이 있었다. 송악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자락을 견자산(見子山)이라고 하고 그 일대에 연경궁을 비롯해서 법왕사(法王寺), 어장고(御醬庫), 대상부(太常府), 수양도감(輸養都監) 등의 사찰과 관부를 짓고, 얼마 뒤에는 다시 경령전(景靈殿), 국자감(國子監), 구요당(九曜堂), 태묘(太廟) 등을 지었다.

이 무렵 집정자인 최우(崔禹, 崔怡)도 자신의 저택을 견자산 자락에 지으면서 인원을 6∼7,000명을 동원하여 개경의 목재를 실어오고, 며칠 거리 되는 안양산에서 나무들을 실어다 정원을 꾸몄는데 그 범위가 수십 리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최우가 아무리 왕을 능가하는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저택을 궁궐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었을까, 혹 그렇다 하더라도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큰 차이가 나게 짓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로 보건대 당시 강도의 궁궐도 궁궐로서 빠지지 않는 규모와 짜임새를 갖고 있었지 지금 고려궁지처럼 한 눈에 들어오는 그런 작은 규모는 결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몽골의 침입에 대처하는 고려의 기본 정책은 산성(山城)이나 해도(海島)로 입보(入保)하는 것이었다. 전면전으로는 막강한 몽골을 대적할 수 없었기에 방비가 유리한 지역에 근거를 마련하여 버티어 보자는 뜻이었다. 강화에도 내성, 중성, 외성 등 성벽을 몇 겹으로 쌓아 방어의 근거로 삼았다. 이러한 작전은 일단은 합당한 방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전으로 갈 때는 어쩔 수 없이 큰 희생이 따를 수 밖에 없다. 희생은 지배층이 먼저 담당할 때라야만 일반 백성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강화에 들어 온 고려의 지배층의 생활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송도에서와 별 다름없이 사치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발달한 귀족 문화, 이를테면 청자의 발달이라든가 대장경의 조판 등도 이런 각도에서 보면 다시 해석할 소지가 남는다. 지배층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일반 백성들은 배신감을 느끼고 이반하였다. 백성들의 폭넓은 지지가 없는 지배층이 막강한 적과 끝까지 버티어 이겨 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고려 조정은 장기간 몽골과 화의 협상을 벌이다가 1270년(원종 11) 8월 강화로 들어간 지 약 40년만에 송도로 환도하고 말았다. 그 화의 협상 과정에서 몽골 사신의 감독하에 내,외성이 헐려 없어졌고, 강도의 궁궐과 민가는 송도로 환도한 직후 모두 불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