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이야기] 병인양요의 뒤끝

BoardLang.text_date 2007.12.26 작성자 홍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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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의 뒤끝


홍순민(중세사 2분과)


강화가 다시 외침에 대한 보장지지(保障之地)로서 주목을 받은 것은 조선 중기에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부터이다. 효종이 북벌(北伐)을 내세우면서 강화를 주목하였지만, 실제적인 조치는 숙종 연간에 들어와서 이루어졌다. 숙종대에는 강화읍을 둘러싼 송악산, 북산, 남산, 견자산을 빙 둘러 성을 쌓았고, 강화 해안을 따라 가며 봉긋한 봉우리마다 53곳에 돈대(墩臺)―작은 성들을 쌓았다. 강화읍 옛 고려의 궁궐이 있던 송악산 기슭에는 강화 유수부의 청사를 비롯해서 그 하위의 각종 관청들이 들어서고, 혹 왕이 이곳에 왔을 때 머물 행궁(行宮)도 지었다. 특히 숙종 연간에는 왕의 어진을 모셔놓기 위한 장령전(長寧殿)을 행궁 동편에 지었고, 영조 연간에는 그 동편에 다시 만령전(萬靈殿)을 지었으며, 정조 연간에는 왕실의 보물들과 주요 책자들을 보관할 규장외각(奎章外閣, 흔히 外奎章閣이라고 함)을 행궁과 장령전 사이에 지었다. 이로써 이 일대는 강화의 행정 중심지일 뿐아니라 왕실의 정신적 보장지지로서의 의미를 함께 갖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 일대는 정식 궁궐은 아니지만 외형적인 규모에서나 또는 국가적 위상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다. 그렇던 이곳이 일대 수난을 당한 첫번 째 계기는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였다.

1866년 7월 7일 주중국불국함대사령관 로즈(Roze)는 조선에서 온 리델(Ridel) 신부로부터 프랑스 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이 조선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에 대한 보복 원정을 곧 시행하려고 했으나, 9월 8일 프랑스 해군성장관으로부터 조선원정을 허락받고, 9월 18일 1차 원정길에 올랐다. 해군 함정 두 척을 이끌고 9월 26일 서울 서강에 이르러 만 24시간을 정박하였다가 10월 1일 우리나라를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에 서해안과 한강 일대를 측량하여 지도를 작성하였다. 수도까지 공격할 수는 없으나 강화도를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해군성장관에게 보고하였다.

10월 11일 로즈는 휘하 군함 7척을 이끌고 2차 원정에 나서 그 휘하 육전대가 10월 14일 강화 갑곶진을 점령하였다. 10월 16일 강화읍내로 진군, 강화부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점령한 아문에서 노획한 은괴 19상자와 서적등을 사영지로 운반하였다. 10월 19일 조선 순무영에서 조선국토를 불법으로 점령하고 서양 종교를 강요하는 행위에 대한 책망과 굴복을 독촉하는 문서를 받았다. 이에 대해 선교사를 살해한 죄를 문책하고 살해의 책임자 세 대신을 처벌할 것과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조약의 초안을 작성할 것을 요구, 만일 이에 불응하면 전쟁에서 오는 모든 책임을 조선정부가 져야 할 것이라는 회신을 하였다.

10월 26일 뚜아르(Thouars) 해군대위가 약 70명을 이끌고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는 문수산성으로 정찰을 나갔다가 조선군의 기습을 받아, 세 명이 죽고 두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 전투 뒤 로즈는 철수를 결심하였다. 11월 9일 조선군대가 정족산성에 집결해 있다는 소식을 접한 로즈는 육전대 지휘관 올리비에(Olivier) 해군대령을 그곳에 파견하여 정찰케 하였다. 150명의 정찰대는 아침 7시에 사영지를 떠나 11시에 전등사에 도착하자마자 정족산성에 잠복중이던 조선군의 기습을 받았다.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고, 불군은 약 30명의 부상자를 내고 간신히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사영지로 돌아왔다.

11월 11일을 철수일로 잡고 철수에 앞서 사영지로 사용하던 관사와 남은 병기고를 모두 불사르게 하였다. 물치도(작약도)로 철수한 로즈는 11월 17일 해군장관에게 철수 계획을 통고하는 동시에 노획한 은괴와 서적도 발송하였다. 11월 18일 물치도를 출발, 11월 21일 조선 해안을 떠났다.

이상은 프랑스측 자료를 토대로 그들의 입장에서 간략히 살펴본 병인양요의 경위다. 아무리 그들의 입장에서 정리해 보아도 선전포고도 없이 다른 나라에 가서 재물과 서적 등을 약탈한 것은 강도 행위요, 침략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침략 행위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어느 나라를 쳐들어가 점령하고 전리품을 뒤지는 기분, 그러다가 뜻하지 않은 수확을 올렸을 때의 그 기분만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강화의 정박지, De'roule'de 선상에서
1866. 10. 22.


장관 각하,

본인은 즉시 읍내를 두루 다니고 유수의 관아로 갔는데 아주 우아스러운 이 관아는 국가에 예속된 모든 무병 창고로 둘러싸여 이것만으로도 읍내에서 제2의 도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 강화도가 서울 정부로부터 조선의 군사적 성채로 선택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창고에서 역시 가득한 은괴 18개 상자를 발견하였습니다. 본인은 즉시 위원회를 조직하여 그것을 정확히 소유하기 위해 계산하고, 사영지로 운반케 하였습니다. 위원회는 그것이 195,217 프랑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가까운 기회에 이 상자를 모두 각하에게 보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또한 국가의 고문서고를 발견하였는데 조선의 역사, 전설, 문학에 관해 많은 신비를 설명할 수 있는 대단히 신기한 책들을 확인하였습니다. 본인은 규정에 따라 그 목록을 작성케 하였으며 이 신기한 수집물을 각하에게 보낼 생각인데 각하는 의심없이 국립도서관에 전달할, 유익한 것으로 판단하실 것입니다. …

敬具

사령관 해군소장 G. Roze

그렇게 프랑스로 간 은이나 다른 물건들은 지금은 종적을 알 수 없으나, 책들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책들은 왕실에 주요 행사가 있을 때 그 경위와 소요 물품 등 제반 사항을 상세히 기록한 의궤(儀軌)라는 책들이다. 크기도 매우 크고 장정이 호화롭다. 그렇게 프랑스로 간 의궤 340권 가운데 한 권이 1993년 9월 15일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외규장각 고문서'를 반환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상징적 조치로서 한 권을 우선 먼저 돌려 준 것이다. 고속전철―떼제베(T.G.V.)를 우리나라에 팔기 위한 성의 표시였다. 그러나 성의 표시는 그 한 권으로 끝났다. 떼제베 협상이 끝나자 나머지 책들은 영 돌려 줄 기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