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지옥도(地獄圖)

BoardLang.text_date 2007.12.17 작성자 하원호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지옥도(地獄圖)


하원호(근대사 1분과)



김명국은 조선시대 인조때 도화서의 화원이었다. 화법이 전통적 기법을 따르지 않고 독창적이었고 수석(水石)과 인물화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두주를 불사해서 그림은 반드시 대취(大醉)한 후에 그렸다. 1636년(인조 14)에는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었는데 그에게 그림을 구하는 자가 많아서 일본에도 그의 그림이 여러 폭 남아 있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으로 치는 덕수궁에 소장되어 있는 『관폭도(觀瀑圖)』는 폭포가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묵상에 잠겨있는 고사(高士)를 그린 것인데 구상이 특이하고 구도도 파격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관폭도』류의 그림은 그 뒤의 조선조의 화가에게서도 심심치 않게 보는 주제가 된다.

이 『관폭도』류는 필자가 박물관을 출입하면서도 흥미있게 보는 그림인데 서양 조각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시킨다. 물론 백제나 신라의 『반가사유상』만 해도 로댕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나는 턱에 손을 괴고 있고 한 쪽은 볼에 손가락 하나를 가볍게 대고 있어 구도는 비슷하지만, 로댕의 찡그린 세속의 고뇌와 우리의 『반가사유상』의 해탈한 듯한 묘한 미소는 작품성에서나 철학의 수준에서 같을 수가 없다. 『관폭도』는 쏟아지는 폭포옆 넓직한 바위에 엎드린 탈속한 선비가 흘러가는 물살을 무심히 바라보는 광경을 선이 굵은 담백한 필치로 담은 것이다. 이 그림은 독일이 자랑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인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 『싯달타』가 뱃사공이 되어 강물소리에 문득 진리를 깨우치던 장면과 닮았다. 삼국불교의 철학을 담은 『반가사유상』의 조선시대 선비적 표현이 이 그림이다. 우리의 시대적 감각으로는 오히려 『반가사유상』의 고졸한 멋보다는 『관폭도』의 소란한 폭포 속의 선비의 굵은 선이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온다.

이 김명국에게 하루는 어떤 중이 큰 비단을 가지고 와서 비단에 저승의 그림을 그려주길 청했다. "두고 가서 그릴 생각이 날 때까지 기다리게" 하고는 예물로 가져온 세포(細布) 수십 필로 술을 사서 며칠이고 거나하게 취했다. 그러던 하루 한번 붓을 잡자 단번에 비단 폭 가득히 그림을 채워 넣었다. 그려넣은 저승의 염라대왕이 좌정한 전당이나 귀졸(鬼卒)의 형색은 삼삼하여 기세가 넘쳐 흘렀지만, 거기서 잡혀가는 자, 끌려가서 형벌을 받는 자, 토막이 나서 불타 죽는 자와 방아에 갈리는 자들은 모두 화상과 비구니였다.

그림을 받으러 온 중이 이를 보고 새파랗게 질려서, "당신은 어찌해서 우리의 대사를 그르치게 하시오"했다. 김명국이 빙긋 웃으며, "너희들이 일생에 나쁜 짓을 하고 혹세무민했으니 지옥에 들어갈 자가 너희들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하니, 중이 눈가를 찡그리며 "원컨대 이 그림을 불에 살라버리고 나의 예물을 돌려 주시오"했다.

명국이 다시 웃으며, "너희들이 이 그림을 완성시키려거던 술을 더 사가지고 오라"했다. 중이 지게 한 짐에 지고온 술을 다 비우고 거나해지자 다시 붓을 들어 머리깍은 자에게는 머리털을, 수염깎은 자에게는 수염을 붙이고 검은옷과 장삼을 입은 자에게는 채색으로 그 색을 바꾸어 잠깐 동안에 완성했으니 붓돌리는 솜씨가 더욱 새로와져 중의 형색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중이 고맙다 소리를 연발하며 그림을 받아 돌아갔다. 이 그림은 그 뒤 전해져 왔다고 하는데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그 소장처는 알 수가 없다.

김명국의 종교의 세속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러시아 작가 토스토에프스키에서도 볼 수 있다. 1849년에 쓴 도스토에프스키의 『악마의 징계』는 제정러시아의 수도 폐테스부르그의 감옥벽에 남긴 글이다. 이 감옥에는 커다란 사원이 있었고 사원의 감방은 모두 창살을 사이로 제단을 볼 수 있었다. 이 제단에서 신부가 설교를 하곤 했는데 도스토에프스키가 감방에서 강론을 듣던 중 생각이 나서 감옥벽에 연필로 쓴 글이다. 글자 그대로 현장문학인 셈이다. 이 글을 수십년이 지난 뒤 같은 감방에 들어간 나르드니(F. Narodny)란 정치범이 어렵게 필사를 해서 세상에 내어 놓았다. 이 글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일제때인 1933년이다. 도스에프스키를 전공하던 일본의 한 학자가 남긴 유품에 이것의 일역본이 있었고 그것을 『비판』이란 우리 잡지에서 한글로 번역해 놓았다. 『비판』에 실린 글을 대충 요점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화려한 제단 앞에 화려하게 차려입은 살점이 넉넉한 사제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대중은 주로 빈곤한 노동자, 농민, 노파, 거지들이었다. 설교내용은 많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신을 경모한다지만 교회에 소득의 일부를 기부하지 않는 자, '시이저의 것은 시이저에게'라는 성경의 말씀을 무시하고 권력에 반항하는자는 무서운 죄를 짓는 것이고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이다. 지옥에 대한 무시무시한 묘사에 질린 대중이 푼돈을 털어 기부를 하게 되고 권력으로의 복종을 맹세하게 되는데 마침 그 곁을 지나던 악마가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악마가 화가 나서 교회에서 나오는 신부의 멱살을 잡았다.

"야 이 뚱보 중놈아! 뭣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는 빈민들을 그렇게 속이느냐… 이 나라의 권력자 모두가 현세에서 나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너는 그 모르는 자들에게 지옥의 말로서 위협하고 있지만 그들을 지옥에서 살게 하는 놈은 바로 너다!"하고는 신부를 데리고 용광로의 불길이 뜨거운 어느 공장의 노동현장으로 갔다. 신부가 이 지옥에서 나가자고 하자 이번에는 농노의 참혹한 생활을 보여주고 이어 감옥의 참상을 직접 몸으로 겪도록 했다. 그리고는 신부에게 훈계를 했다. "너는 미래의 지옥이니 위협하지만 그들은 벌써 죽기 전에 이같은 지옥에 빠져있다."

서양종교에서 악마의 존재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너지기 시작하던 시기에 강조되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악마적' 존재는 중세말기에 형성되고 지옥의 참상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사이비 종교일수록 일반 종교에 비해 지옥의 참혹함을 역설하는 것은 종교학에서도 상식이다. 지옥의 공포감이 현실적으로 기댈데 없는 대중을 현혹시켜 사이비종교를 번창시키는 것이다. 세속적인 종교가 이 공포감의 조성으로 교세를 넓히고 현실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은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라는 점을 김명국의 저승그림과 도스토에프스키의 '훈계'가 잘 보여준다.

물론 이 문제는 종교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정치권력 역시 악마의 이용이 권력의 유지와 대중을 맹목적으로 이용하는데 필수적이다. 군사독재 시절 악마의 공포, 곧 북한의 남침 위협은 정권안보의 기본이었다. 평화와 무관한 '평화의 댐'은 물을 가두는 댐에서 물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 만큼이나 우리시대의 부끄러운 허구의 자화상이다. 5공 시절 정의가 물같이 흐르는 '정의사회구현'을 부르짖던 자들이 우리시대의 가장 정의롭지 못한 인물들이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진실과는 상관없는 구호나 상징물에 집착하는 종교나 정치권력은 바로 그들이 조성하는 지옥의 공포를 이미 현실에서 실현하고 있고 미래의 지옥 역시 그들의 몫이라는 것을 김명국과 도스토에프스키가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