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감격시대'에서 서태지까지

BoardLang.text_date 2007.12.17 작성자 하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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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시대]에서 서태지까지


하원호(근대사 1분과)



광화문 네거리를 가로 막고 거창하게 치른 몇년전 광복절 50주년 행사는 TV의 좁은 창으로만 들여다본 필자에게도 경건한 제례의식을 보는듯한 장엄함이 넘쳤다. 이 행사의 백미는 역시 조선총독부건물의 모자같은 윗덮개를 들어내는 의식이었고, 식민지배의 청산을 상징하는 역사적 광경이었다. 이 장엄한 역사의 현장을 더욱 감격스럽게 하기 위해 울려퍼진 노래 [감격시대]는 우리 모두를 가슴 떨리는 '감격시대'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배경음악인 [감격시대]가 만들어진 때는 일제때다. 따라서 노래가 담고 있는 감격의 원래 의미도 해방이 아니라 일제의 대동아전쟁에서의 승전보에 대한 감격이었다. 그래서 언론이나 일부 뜻있는 사람들이 광복절에 울려퍼진 노래로서의 [감격시대]의 친일성을 들어 시비 걸고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제하의 친일성향의 가요가 해방가요로 변신해 불려진 예는 이미 해방직후에도 있었다. [꽃마차는 달려간다]가 대표적 예다. 지금도 노래방에서 가끔 불리는 이 노래의 가사는 "노래하라 꽃서울...하늘은 오렌지색 꾸냥의 귀걸이는 딸랑딸랑..."이다. 평소에 주의깊은 분들은 "'꽃서울'에 '꾸냥'이 나오는 것이 좀 이상하다, 화교가 그렇게 많았나" 정도로 느꼈겠지만, 원래 일제때의 가사에는 '꽃서울'이 '하얼빈'으로 되어있었다. 일제말기 중일전쟁으로 일본이 만주지역을 먹어들어가면서 침략전쟁을 찬양하면서 만들어진 이 노래의 배경을 알게 되면 꾸냥의 의혹도, 그리고 서울하늘의 색깔이 왜 오렌지색일까 하는 의문도 풀린다.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는 [해방가]였다. 지금도 대학생들 사이에서 불려지는 이 노래의 원제목은 [독립행진곡]이었고, 대하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쓴 월북한 박태원이 노래말을 만들고 친일작곡가로 알려진 김성태가 작곡을 했다. 원가사에는 '동포'가 '동무'로 되어 있었으나 분단이후 남한에서 '동무'란 말이 쓰기 힘들어져 바뀌어진 것이다. 이 노래만큼 널리 불린 것으로 월북한 김순남 작곡의 [해방의 노래]가 있다. 장조 행진곡풍의 이 노래는 2절에 농지와 공장을 민중의 소유로 해야 한다는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어 분단이후에는 부를 수 없게 되었다.

1950년의 6.25전쟁의 비극은 가요에서도 마찬가지의 비극성을 담게 되어 트로트의 절절한 애수가 이 시기의 노래에 배여들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에서의 참담한 현실이 [타향살이]의 [나그네설움]을 자아냈고, [굳세어라 금순아]로 단장의 아픔을 다잡기도 했다. 군대생활에 관한 것이면서도 죽음의 전장에 대한 체험에서 만들어진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야곡], "철조망은 녹슬고 총알은 빛나"는 [삼팔선의 봄] 등은 리얼리티를 지닌 비장함과 서정성이 담겨 지금도 노래방에서 흔히 부르는 애창곡이 되고 있다.

50년대는 관제노래가 시작된 시대이기도 했다.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된 노래들이 학교교육 등을 통해 많이 보급되었다. 필자는 유년기를 50년대에 보냈는데 누나들이 고무줄뛰기하면서 가장 즐겨부르던 노래가 "무찌르자 공산당 몇백만이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기야 "쫓기는 저 개무리 쫓고도 또 쫓아"쯤에 이르면 북쪽은 이미 같은 민족이 아니라 싸워서 없애야 할 원수의 무리가 되고 만다.

전쟁의 폐허 위로 쏟아진 미국의 원조 밀가루와 설탕, 그리고 우유가루와 빠다에 맛들인 사람들에게는 미국은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럭키모닝]에 잠이 깨어 [아메리카 차이나타운]과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아리조나 카우보이]의 "역마차는 달려간다." 미국을 우유와 빠다가 흐르는 이상향으로 그리는 이 노래들과 함께 리듬도 미국풍이 되었다. '대전' 부루스, '닐리리' 맘보, '비의' 탱고, '노래가락' 차차차, 그리고 [기타부기]의 부기우기같은 온갖 미국쪽 리듬들이 50년대 후반에 춤바람과 함께 몰려 들어 왔다.

1960년는 말할것도 없이 '근대화'의 시대이다. 박정희의 정신없는 '중단없는 전진'체제에서 팝송 "Keep on Runnig"은 이 시대의 주제가가 되었다. 60년대에 가장 많이 부르지는 않아도 가장 많이 들은 노래는 누가 뭐라 해도 [잘 살아 보세]였다. 아침 7시만 되면 관공서와 학교의 확성기를 통해 볼륨을 최고로 올리고 애국가를 생략하고서라도 어김없이 이 노래를 틀어 빨리 일어나서 뛰라고 재촉했다. 구호의 시대였던 이 시기에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절규는 아무도 거역 못할 최고의 구호로 군림했다.

대중음악쪽에서는 60년대에 들어온 미국 백인들의 이지리스닝 음악이 최희준에게 [하숙생]을, 김상국에게 [불나비]를 부르게 했다. 이 계열의 노래로 근대화이후의 도시적 풍경을 사랑과 희망의 현장으로 만든 것으로는 [대머리총각], [노란 샤쓰의 사나이], [안개 낀 장충단공원], [서울야곡] 등이 있다. 트로트 역시 대중음악으로 안정적인 자리를 잡게 되는데 그 지리적 위치는 도시가 아닌 시골이었다. 트로트의 여왕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아가씨], [기러기아빠], [춘천댁 사공], 김태희의 [소양강처녀] 등은 도시의 발랄함과는 거리가 먼 시골의 아픈 이미지를 담았고, "당신과 나 사이에 저바다가 없었다면"은 희망의 도시 서울을 바다 저편에 둔 시골사람의 뼈저린 패배감을 [가슴아프게] 표현했다.

1970년대에 가장 많이 들은 노래는 뭐니뭐니해도 청소차나 똥차에 달린 확성기에서도 끊임없이 들려오던 박정희부녀가 작사 작곡했다는 [새마을노래]이다. 아무리 관제음악이라지만 음악성의 '음'자도 찾기 어려운 이 노래에 대한, "한국인의 음악성을 30년은 후퇴시켰다"는 필자의 농담은 지금도 거두어들이고 싶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뽕작 뽕작"의 리듬으로 끝나는 단조롭기 짝이 없는 이 노래는 지금도 관제가요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대중음악에서 70년대의 주류는 포크송이었다. 미국의 모던 포크의 영향을 받은 포크송이 청년문화의 선두주자가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포크송은 미국문화의 이식과 오직 사랑노래에만 머물렀지만, 기성의 규범화된 질서로부터의 자유로와지고 싶어하고 진실에 대한 고민을 노래한 "자 떠나자"는 [고래사랑], "나 이제 가노라"는 [아침이슬] 등에 이르면 포크송과 통기타로 대표되는 이 시기 청년문화의 건강성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이 문화의 한가운데는 김민기가 자리잡고 있다. 록도 이 시기에 대중가요의 일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윤항기나 신중현이 그 주인공이었고, 펄시스터즈의 [님아]나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록을 거짓말처럼 대중문화의 한부분으로 만들어갔다. 그리고 70년대 후반 [돌아와요 부산항에]라고 노래한 조용필의 등장은 트로트가 포그문화의 와중에서도 제 자리로 돌아올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유신시대의 암울함 속에서 대학가 앞의 술집문화는 데모가로 자리를 끝내곤 했다.

1980년대의 대중가요는 역시 조용필시대였다. [단발머리]의 록에서, [정]의 정통 이지리스닝, [일편단심 민들레야]와 같은 정통 트로트를 구사했고 포크식의 [친구여]나 민요 [한오백년]까지 한국대중가요 60년을 모두 소화해 냈고, 그를 오빠라 부르는 층도 10대에서 50대에 걸치게 만들었다. 1980년대이후 먹고 살만해진 대중의 문화적 욕구가 팽창하면서 문화의 시장도 넓어져 갔는데 창법의 폭발성 만큼이나 그 상업성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킨 인물이 바로 조용필이었다.

관제가요는 이 시기에는 그리 많이 생산되지 않지만 올림픽 등과 관련해서 건전가요로 권장되는 노래도 많았다. 방송을 가장 많이 탄 것으로 알려진 정수라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가 있고"라는 [아 대한민국]이 그것이다. 필자가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는 "이건 엄청난 풍자구나"라고 생각했다. 총만 가지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던 5공시절의 노래가 아닌가. 물론 이 생각은 필자의 삐뚤어진 심리상태의 표현으로 끝났을 뿐, 이 노래는 "영원하리라"는 대한민국의 찬가로 계속 불려졌다. 대학생들이 주도한 민중가요운동도 80년대 후반에 활성화되면서 [광야에서], [솔아 푸른른 솔아] 등은 대중가요로서의 시민권을 획득해 갔다.

1990년대의 사회적 변화는 종전의 대중가요 자체도 바꾸어 놓았는데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가수의 가창력이 문제가 아니라 댄스실력이 평가기준이 되는, 시각적 요소가 우선이라는 점이다. 무심히 들으면 이게 도대체 한국말인가 싶은 랩의 매력은 사실은 노래 그 자체 보다는 춤솜씨에 있지 않은가. 초등학교도 못들어간 꼬마들이 댄스그룹과 비슷한 속도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면 이제 대중가요의 연령은 10대가 아니라 그 아래로 내려만 가는 것같고, 여기를 비집고 들어 '신세대' 말고 '쉰세대'들 모이라고 하는 것이 [열린 음악회]가 아닌가 싶다. 물론 랩이라고 다같은 랩은 아니다. 랩은 원래 미국 흑인들의 하층문화의 일부였다. 이것을 백인 음악가들이 흥겨운 댄스앤 뮤직으로 상품화시켜 놓았다. 흑인들의 사회비판적인 저항적 랩을 하드 코아 랩이라고 하는데 서태지의 노래는 그래도 이 쪽과 가깝다. [교실이데아]가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닌 것이다. 하루살이처럼 반짝 빛을 보다가 사라져간 대부분의 댄스그룹들이 서태지를 흉내조차 내기 어려웠던 것은 계보부터 틀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IMF한파를 핑계로 댄스그룹의 노래를 TV 화면에서 지우겠다고 한다. 한때 댄스그룹만이 노래를 부를 줄 아는냥 그들로 도배질하던 TV가 세상이 바뀌었다고 그들을 몰아내는 작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문화는 다양성이 생명이다. 70-80년대 관제가요같은 소위 '건전가요'만 틀어대는 TV에서 무슨 놈의 문화를 찾겠는가. 하기야 그 따위 짓을 주도하는 방송국의 고위 관계자들이 예전 군사독재의 나팔수들이었다는 것쯤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새마을노래]가 다시 울려 퍼질 날도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