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광저우 답사기]
한국의 근대와 중국 광저우 ① : 앙계초, 손문, 그리고 임칙서와 아편전쟁 남기현(근대사)
2019년 한국역사연구회 답사지로 중국 광저우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던 2018년이었다. 학위를 받은 후 함께 답사준비를 하고 다녀오면 되겠다는 한성민 선생님의 제안(^^)과 광저우라는 지역에 대한 호기심이 겹쳐져서 답사에 참석하기로 결정하였다. 일정 : 2019년 7월 4일 ~ 7월 8일 답사지역 : 중국 광동성 광저우, 중산, 강문, 불산, 동관 일대 참여자 : 구선희, 김윤지, 남기현, 도면회, 박영실, 박은숙, 박진숙, 박진희, 심철기, 방광석, 여호규, 원재영, 이상호, 이영호, 이진한, 임경석, 장영숙, 정지은, 한성민, 홍종욱 <사진 1> 광둥성 위치
<사진 2> 광저우와 주변 도시
광저우는 남중국해 연안에 위치한 광둥성의 행정·경제·문화의 중심지이다. 한(漢) 때부터 외국무역을 시작하였고, 명말 청초에는 유럽 각국으로 교역이 확대되어 중국 최대의 무역항이 되었다. 광저우는 중국에서 서양문물 및 사상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서양과 큰 마찰을 빚었던 아편전쟁이 벌어졌던 장소이기도 했다. 광저우가 주목되는 또 다른 이유는 광저우 주변 도시에서 근대 중국의 개혁가, 혁명가들이 태어났다는 점이다. 태평천국운동을 주도했던 홍수전, 변법자강운동을 전개했던 강유위, 양계초, 신해혁명을 이끈 손문이 그들이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중국의 진로를 고민했던 이들이 약간의 시간적 격차를 두고 비슷한 곳에서 태어났다는 점이 흥미롭다. 광저우는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혁명적 사건이 발생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황화강기의, 광동코뮌 등이 일어났다. 손문은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고 3회에 걸쳐 정권을 수립하였다. 모택동은 농민운동강습소를 세우고 혁명역량을 키워나갔다. 광저우 내에서 한국인들의 활동도 전개되었다. 광동코뮌에는 한국의 혁명가들이 참여했으며, 황포군관학교는 김원봉 등 한국독립운동가들이 입학하여 교육을 받던 곳이었다. <사진 3> 답사지역 지도 및 동선(@한성민)
이번 답사는 4박 5일 동안 중국 광둥성 광저우, 중산, 강문, 불산, 동관 일대를 돌아보는 여정으로 계획되었다. 광저우에 도착하는 7월 4일, 귀국일은 7월 8일을 제외하고 매일 5곳 이상을 살펴보는 것으로 하였다. 전체적인 이동경로를 시계방향으로 설명해보면 12시 방향 광저우 공항에서 출발하여 6시 방향 중산시, 8시 방향 강문시, 3시 방향 동관시, 9시 방향 불산시를 거쳐 12시 광저우 화이구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귀국 전날인 7월 7일에는 광저우 시내를 중심으로 답사하기로 하였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는 답사에 참여한 선생님들께서 답사지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으로 하였다. 2. 답사 1일차 : 광저우공항에서 중산시, 강문시로 인천공항에서 오전 8시 30분경 비행기를 탄지 3시간여 만에 광저우공항에 도착했다. 중국에는 거의 10여 년 전에 와보고 다시 오는 것이었다. 광저우공항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제1공항 제2공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 처음 느꼈던 것은 정말 덥다는 것이었다. 도착한 날짜가 한여름인 7월 4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중국 남쪽에 위치한 광저우는 유난히 덥고 습했다. 차를 타고 30분 정도 이동하여 점심식사를 했다. <사진 4> 4박 5일간 함께한 버스
점심 식사 후 서둘러 손중산고거기념관(孫中山故居紀念館)을 보기 위해 중산시로 이동했다. 하지만 도착시간이 기념관 입장을 마감하는 시간을 약간 늦어진 관계로 다음날 보는 것으로 하고 강문시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⑴ 양계초고거기념관(梁啓超故居紀念館) 7월 5일 본격적인 답사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일정은 오전에 강문시에 있는 양계초고거기념관과 손중산고거기념관을 보고, 오후에는 동관으로 이동하여 호문임칙서기념관, 아편전쟁박물관 해전박물관 호문포대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오전 8시경 모든 준비를 마치고 양계초고거기념관으로 향했다. <사진 5> 양계초고거기념관 전경(@이상호)
양계초고거기념관은 양계초가 태어난 집을 볼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주변을 기념관 형식으로 꾸민 형태였다. 가운데 동상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기념관 왼쪽에 양계초의 생가가 위치해 있다. 양계초(1873 ~ 1929)는 스승이었던 강유위와 함께 북경에서 강학회는 설립하는 등 혁신운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1895년부터는 변법자강운동에 전력했다. 양계초 생가는 이당서실, 회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당서실은 양계초의 증조부가 세운 곳으로 양계초가 소년 시절 독서를 하던 공간이라고 한다. <사진 6> 양계초고거(@심철기)
<사진 7> 이당서실(@도면회)
<사진 8> 양계초기념관전경(@도면회)
⑵ 손중산고거기념관(孫中山故居紀念館) 양계초고거기념관에서 1시간 30분정도 머문 뒤 중산시로 이동했다. 어제 못 본 손중산고거기념관을 보기 위해서였다. 중산은 청을 무너뜨린 신해혁명을 주도한 손문의 호이다. 현 중산시는 원래 향산(香山)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1925년 손문이 이곳에서 태어난 것을 이유로 중산으로 개칭되었다. 손중산고거기념관(孫中山故居紀念館)도 양계초고거기념관과 기본 구조는 유사했다. 손문의 생가를 주변으로 기념관을 조성한 것이다. 하지만 양계초고거기념관에 비하여 훨씬 규모가 컸고 손문 생각 주면에 당시 광저우의 농촌을 재현해 놓았다. 손문이 ‘중국 건국의 아버지’로 생각되는 만큼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답사 후 한국에 돌아와서 광동성 출신 학생에게 물어보니 손중산고거기념관, 황포군관학교 등은 수학여행으로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사진 9> 손중산고거(@남기현)
손중산고거는 손문이 1892년에 생가를 허물고 새로 지은 주택이라고 한다. 손문의 친형인 손미(孫眉)가 하와이에 돌아와서 집을 지을 때 손문이 직접 설계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 10> 손중산기념관(@남기현)
<사진 11> 천하위공(@남기현)
손문과 관련된 곳에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말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것의 뜻은 ‘천하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천하 만민 모두의 것’이라는 것이다. 손문은 ‘천하위공’을 신념으로 삼고 신해혁명을 달성했다고 한다. <사진 12> 손중산고거기념관 입구에서(@한성민) ⑶ 아편전쟁박물관(鴉片戰爭博物館) 세 번째 답사 예정지는 호문임칙서기념관 및 아편전쟁박물관이다. 이곳은 동관시(東莞市)에 위치해 있다. 중산시에서 동관시로 사이에는 주강이 흐르고 있다. 처음에는 주강의 규모가 매우 커서 바다의 일부로 착각을 했다. 현재 중산시와 동관시 사이에는 호문대교가 연결되어 있다. <사진 13> 호문대교에서 바라본 주강(@여호규)
동관시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목표장소인 아편전쟁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1957년 건립 당시에는 1839년 아편을 물에 녹여 없앴던 임칙서(林則徐)를 기리는 ‘임칙서기념관’으로 건립되었다가 1972년 ‘아편전쟁 호문 인민항영기념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사진 14> 아편전쟁박물관 전경(@방광석)
영국은 18세기 때부터 청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했다. 청은 아편 금지령을 선포했지만 19세기 들어 아편 소비량은 급속도로 증가했다. 청 도광제는 광저우에서 진행되는 아편거래를 막기 위해 아편을 방치할 경우 “백성이 전멸하고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파견했다. <사진 15> 소훼아편연지(銷毀鴉片煙池)(@남기현)
광저우에 부임한 임칙서는 1839년 영국 상인들이 보유한 아편 1425톤을 몰수했다. 그리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호수에서 소석회와 섞어 녹여버렸다. 이 인공호수는 아편전쟁박물관 정문을 들어간 후 왼편에 위치해 있다. <사진 16> 아편모습들(@임경석)
박물관은 아편전쟁 직전 광저우에 있었던 공행의 모습, 아편에 중독된 사람들의 모습, 아편과 그것이 제작되는 과정 등을 묘사한 전시물로 구성 되어 있었다. 아편전쟁은 영국 의회 내에서도 그 정당성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제국주의 국가의 이익에 침범당하는 중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전시물, 그리고 그림들이 많아서 느껴지는 것이 많았다. 아편전쟁은 제국주의 국가의 속성은 침범한 국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시 영국에게 중국인들의 생활, 국가재정의 파괴 등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⑷ 해전박물관(海戰博物館)과 호문포대(虎門砲臺) 마지막 답사 장소는 해전박물관과 호문포대였다. 해전박물관은 아편전쟁박물관과 함께 1957년에 개관하였다. 총 4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편전쟁과 호문해전과 관련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아편전쟁박물관에서 본 내용과 겹치는 것도 많았고, 개인적으로는 아편전쟁박물관에서 느낀 점이 많아서인지 해전박물관의 전시구성, 전시물 등에 대해서는 큰 느낌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해전의 전체상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가볼 만한 박물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 17> 해전박물관 전경(@여호규)
호문포대는 해전박물관에서 걸어서 약 10분정도 거리에 있다. 현재에도 포대 근처에 군부대가 있어서 군인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호문포대는 명나라 때 외적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사진 18> 호문포대(@임경석)
<사진 19> 호문포대(@한성민)
아편을 몰수하고 없앤 임칙서는 당시 광동수사제독이었던 관천배(關天培)와 함께 호문포대의 방어시설을 보강했다. 호문 양 쪽 연안에 11개의 포대와 300여 개의 대포가 설치되어 3개의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이와 함께 주강 입구 섬들과 강안 사이에 쇠사슬 372장을 설치해 적함의 접근을 차단하려고 하였다. 이후 영국군과 청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사진 20> 호문포대 안에서 본 주강(@남기현)
호문포대를 둘러보고 나니 해가 벌써 저물고 있었다. 차를 타고 약 1시간 30분 정도를 가서 저녁을 먹고 호텔에 들어갔다. 답사 일정 중 벌써 2일이 지나갔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