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고려전기 武散階와 鄕職의 수여 배경과 운용_배재호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01.05 BoardLang.text_hits 12,920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나의 논문을 말한다]

 

고려전기 武散階鄕職의 수여 배경과 운용


(2019. 08.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배재호(중세1분과)


 

본 논문은 고려 성종 12년(993)에서 현종 10년(1019)에 걸친 거란과의 수차례 전쟁을 겪는 가운데 고려전기의 무산계(武散階)와 향직(鄕職)이 각각 어떠한 이유로 정비되었으며, 그에 따라 이후 어떻게 다르게 운용되었는지 밝히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

필자는 예전부터 정치제도, 그 중에서도 특히 관계(官階)와 관원의 사로(仕路)에 꾸준한 관심을 가져 왔다. 하지만 사실 학부 시절에는 대외관계사 혹은 전쟁사 쪽으로 논문을 쓰고자 했고, 정치제도 쪽으로는 공부하기는 재미있어도 새로운 이야기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석사과정에 입학한 뒤 이왕이면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관계를 비롯한 고려의 정치제도로 방향을 틀어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선학들의 연구에 힘입어, 고려는 국초에 신라와 태봉의 것을 계승한 초기관계를 사용하였다가 성종 14년 이후 당(唐)의 제도인 문무산계(文武散階)를 도입했음이 알려졌다. 특히 고려의 문무산계는 당의 그것과 달리 각각 문신과 무신의 관계로서 운용된 것이 아니라, 문산계만이 문무의 관계로서 기능했고 무산계는 향리, 탐라왕족, 여진추장, 노병(老兵), 공장(工匠), 악인(樂人)의 위계였다는 점이 밝혀진 바 있었다. 이후 고려 관계에 관한 연구는 주로 초기관계와 문산계를 대상으로 이루어졌으며, 필자 또한 처음에는 문산계에 더 비중을 두려 했다.

하지만 문무산계가 당에서는 한 제도 안의 두 가지 동격인 체계였음에도, 고려에서는 성종 14년(995) 이전에는 단지 문산계만 사용했던 이유에 의문을 품게 되었고, 이 의문은 어째서 성종 14년에 이르러 무산계를 도입할 필요가 생겼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번졌다. 그리고 성종 14년 이후 관계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초기관계가 향직(鄕職)이라는 이름으로서 관원뿐 아니라 향리, 여진추장, 심지어 노인과 일반 병사에게까지 수여되었던 점에도 흥미가 옮겨 갔다.

고려전기 무산계와 향직은 그 정비된 시기가 유사하고 수여되는 대상도 일부 겹쳤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제도였다. 두 제도의 차이점을 분석하고자 했던 적지만 귀한 기존 연구들이 있었으나, 그 분석 대상이 한정되어 두 제도 간 명확한 차이를 알기 어려웠다. 필자는 그 해답이 두 제도를 정비해야 했던 시대적 필요성을 각각 밝히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당시의 중요한 시대적 화두 중 하나였던 거란과의 전쟁을 겪으며 어떠한 목적으로 무산계와 향직이 정비되어 갔는지 고찰하고자 하였다.


[사진 1] 고려사 백관지 무산계조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사)


국초에는 고려 중앙의 관원들뿐 아니라 귀순해 온 각지의 성주(城主), 장군(將軍)에게도 초기관계가 수여되었으나, 문산계가 도입되어 중앙 관원들에게만 수여되자 중앙의 관원과 재지세력은 관계로써 구분되게 되었다. 이는 문산계만 사용되었던 광종 9년(958) ~ 성종 13년(994) 기간 중에 호장(戶長)으로 대표되는 재지세력들을 억제하는 정책이 주로 시행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런데 거란의 1차 침입을 계기로 서희(徐熙)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들이 주도한 성종 14년(995)의 제도 개편은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고 국가 체제를 정비할 목적으로, 고려의 현실에 맞춰 당의 제도를 도입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동안 억제되어 왔어도 여전히 각지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호장들은 주된 포섭 대상이었고, 그 회유책의 일환으로서 국초에 귀순했던 성주들에게처럼 중앙정부와 진봉(進奉) 행위로 연결되는 호장들에게 무산계가 수여되었다. 진봉하는 호장들의 무산계는 중앙 관원들의 문산계와 동격이었으므로 그들의 관계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던 한편, 서로 엄연히 구분되는 관계였기에 재지세력을 억제하는 기존의 정책 방향도 어느 정도 반영할 수 있었다. 진봉하는 호장 외에 일부 우수한 공장(工匠)과 악인(樂人)에게도 무산계를 수여해 대우하였으며, 성종 14년 직후에 한해서는 국초의 장수나 노병에게 특별히 무산계를 수여하기도 하였다.

한편 향직이 정비된 과정은 조금 달랐다.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하여 정통성이 약했던 현종은 거란의 2차 침입과 강조의 패배로 인해 피난하는 과정에서, 호위하는 신하와 군사들이 도망하고 각지에서 공격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현종은 관계도 관직도 없던 호위 군졸들에게 초기관계 곧 향직을 수여함으로써 그 충성을 얻었다. 거란과의 전쟁이 본격화되자 공로자들에게 자주 대규모 포상을 내리게 되었는데, 문무산계나 관직보다는 향직이 주로 포상으로 내려졌다. 특히 관직이 없는 자들에게는 관직을 주지 않고 향직만 수여하였다.

거란과의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탐라왕족, 여진추장 등 외국인에 대한 관계 수여 양상에 국초와 변화가 없었다. 탐라왕족에게는 관계를 수여하지 않고 성주(星主), 왕자(王子) 칭호만 주면서 그 자치를 인정해주었고, 여진추장에게는 이미 관계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향직을 주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거란과의 전쟁을 이겨내면서 고려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고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이 재정립되면서, 고려에 내조하는 탐라왕족과 여진추장에게 무산계가 수여되게 되었다. 계속 우호적이었던 탐라의 왕족들에게는 성주, 왕자에게 5품 이상 무산계를, 그 외 왕족에게는 6품 이하 무산계를 수여하였으며, 우호관계가 불안정했던 여진의 추장들에게는 송(宋)의 제도를 참고해서 번신(蕃臣)을 대상으로 하는 무산계를 따로 정비해 수여하는 등 구분하였다.


[사진 2] 덕종 3년(1034) 11월 팔관회를 열었을 때 동서번(東西蕃)과 탐라국(耽羅國)에서도 방물을 바쳤음을 기록한 고려사 예지 기사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상의 분석을 통해 필자는 무산계는 관원이 아닌 자를 문산계를 지닌 관원에 준하도록 특별 대우하기 위해 수여되었던 반면, 향직은 관원과 관원이 아닌 자를 막론하고 공로자들을 포상하기 위해서 수여되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 목적상 무산계가 향직보다 더 귀했으므로, 무산계 소지자에게는 모두 전시과가 지급되었던 반면 향직 소지자에게는 원윤(元尹) 이상에게만 전시과가 지급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문무산계, 향직 제도를 통해 고려전기 사회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한국사의 전체적인 관계제도 속에서 고려전기의 관계제도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과제로 남겨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