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자유기고
2·8독립선언의 정신과 인간 중심 패러다임의 평화 만들기_이지원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01.31 BoardLang.text_hits 11,541 |
|
[자유기고] 2·8독립선언의 정신과 인간 중심 패러다임의 평화 만들기이지원(근대사분과) ※ 이 글은 2019년 10월 2.8독립선언100주년기념사업회 후원, 식민과냉전연구회 국제학술대회 <한일역사갈등의 원점, 식민지배 책임에 대한 고찰>의 기조발제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1. 100여 년을 연동하는 역사문제‘촛불혁명’으로 이룬 정권교체 이후 한국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과 시민의식은 역사인식으로 연계되었다. 그런 가운데 2019년 2·8독립선언,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의 100주년을 기리면서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2019년 7월 1일, 일본정부가 한국정부가 일제시기 강제징용 한국인들의 일본 기업에 대한 청구권을 인정한 것에 항의하여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불화수소 등 3개 품목의 수출규제를 발표한 이래 한일관계는 역대급 난관에 봉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본정부의 처사는 한국인들의 반일의식을 자극했다. ‘No Japan’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일본상품불매운동, 일본여행 안가기 등 일상 속의 반일운동이 벌어졌다. 역사문제가 경제문제와 민족감정 악화로 그 파장이 확산되었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에서도 역사학 전공 학생이 아니 방송영상과 학생이 ‘No Japan’의 사회현상과 한일 역사 한일 갈등 영상을 제작하겠다고 나에게 취재를 오기도 했다. 일본 아베 정부는 역사문제를 국제법상의 나라와 나라 간의 약속 이행 문제로 몰아가는 방식으로 역사문제 해결을 회피해왔다.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는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 국가의 책임을 묻는 것을 국제법상 약속이행의 문제로 몰아 경제로 봉쇄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100년을 되돌아 볼 때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이 되었으나,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연합국의 분할점령을 당했고, 이어 전개된 냉전의 중심에서 분단국가 수립의 불행을 겪었다. 분단과 냉전의 질곡 속에서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적 책임과 피해자에 대한 조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국제법상 조약으로 해결하려는 양상들이 이어져왔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조약,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2015년 한일 ‘위안부’합의 등이 그것이다. 일본은 냉전시기 국제법의 조약을 근거로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면해 왔다. 국가와 국가 간의 조약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국제법의 관례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것은 19세기 만국공법체제가 동아시아에 적용된 이후이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은 국제법상의 조약을 통해 식민지를 얻었다. 거기에는 항상 힘의 논리가 작동했고, 모두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평화’라는 단어는 종종 ‘폭력’의 또 다른 이름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 한일 역사갈등을 국제법 문제가 아닌 역사문제로 해결하려는 것은 19세기 이래 동아시아에 적용된 국제법의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인간 중심 패러다임의 평화 만들기와 관련이 있다. 100년 전, 국제법의 ‘폭력’을 극복하고 인간 중심의 평화 만들기를 시도한 사건이 있었다.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국제법적인 조약에 의한 ‘한일합방’의 무효를 선언하고, 식민지민이 세계평화의 주체가 되겠다고 선언한 2·8독립선언이다. 강자의 협상에 의한 평화가 아닌 인간 중심의 평화 만들기를 선언한 것이다. 2·8독립선언의 인간 중심의 평화 정신은 100년에 걸쳐 연동되고 있는 한일 간 역사갈등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해결 방안과 미래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향한 지혜를 얻는 데에 여전히 유용한 현재적 의의가 있다. 2. 2·8 독립선언의 인간 중심 패러다임과 평화 정신100년 전 1919년 2월 8일과 3월 1일, 도쿄와 서울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기를 열망하는 ‘독립’의 선언이 있었다. 두 곳의 운동을 준비한 주체들은 상호 연락을 했고, 2월 8일의 선언은 3월 1일 선언의 ‘도화선’역할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주1). 그러나 2·8 독립선언은 3·1운동의 도화선을 넘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법상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에 식민지 약소민족이 국제관계의 주체, 평화의 주체가 되는 것을 실천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1919년은 세계사에 ‘평화’에 대한 논의가 가장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주2).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래가 없었던 전쟁의 피해를 겪고 난 인류는 새로운 문명전환을 모색하며, 인류의 전쟁을 야기한 제국주의의 문명 경쟁에 비판적인 시대사조가 등장하였다. 오리엔탈리즘적인 문명개화를 금과옥조로 여겼던 ‘문명(Civilization)’보다 ‘문화(Culture)’라는 담론이 본격화한 것도 이때이다(주3). 당시 대두한 단어가 ‘평화’였다. 1919년 전후 처리를 위한 강화회의는 ‘파리평화회의(Peace Conference at Paris)’로 명명되었고, 윌슨은 새로운 평화질서를 제시하여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공으로 191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민족자결’은 당시 ‘평화’ 담론의 중요한 주제어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인 문명 전환은 강자들의 전리품 독식이 아닌 식민지의 민족자결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당시 강대국들의 ‘평화’는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전쟁이 없는 상태(the absence of war)’로서 평화였고(주4), 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인 제국주의 국가끼리 ‘전리품’ 분배를 협상을 통해 얻고자 한 평화였다. 조선은 국제법상 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에 해당하는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1차 세계대전 패국들의 식민지라는 ‘전리품’에 해당되지 않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종전이라는 세계정세의 변화 속에서 한국의 지성들은 국제법상 한일병합의 부당함을 제기하는 한편, 제국주의 국가 간의 협상 중심의 평화가 아닌 식민지 약자가 평화의 주체가 되는 패러다임을 제기했다(주5).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은 제국주의 국가 간의 협상에 의한 평화, 강자들의 평화를 반대하며 식민지 약소민족이 평화의 주체가 되겠다는 것을 선포한 사건이었다. 거기에는 ‘전쟁이 없는 상태(the absence of war)’라는 전승국 중심의 평화가 아니라 국제관계와 사회관계에서 차별과 억압의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을 없애는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의 의지가 있었다. 제국주의 식민지배의 폭력, 사회적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식민지 발 평화였다. 오늘날 평화는 강대국의 국제법적인 조약이나 안보논리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세계시민주의에 의한 식민지·약소민족의 자결권과 해방의 문제, 평화를 만들기 위한 문화와 사상, 인권으로서 ‘평화권’에 대한 것까지 확장되었다. 인권으로서 평화의 관점은 UN헌장 55조와 <세계인권선언>에 나와 있지만, 1978년 유엔총회에서 「평화적 생존(Life in Peace)을 위한 사회적 준비에 관한 선언」(UN Doc. A/RES/33/73)이후 1984년 11월 UN 총회에서 「평화에 대한 인류의 권리 선언 Declaration on the Right of Peoples to Peace」(UN Doc. A/RES/39/11)이 제정되면서 ‘평화권’이 공식화되었다(주6). 2·8독립선언은 국제법의 ‘폭력’을 비판하고, 인권으로서의 평화, ‘평화권’을 주장했다. 2·8독립선언은 1894년 이래 일본이 국제법상의 “사기와 폭력”을 저지르며 한국을 강제 병합한 역사를 비판하고,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시기에 “匡正을 세계에 요구할 權利”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또한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인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정복자가 피정복자에 대한 古代의 비인도적 정책을 襲用하여 吾族에게 참정권, 집회 결사의 자유, 연론 출판의 자유 등을 不許”하고 있는 비민주적인 폭력적 지배를 비판하였다. 제국주의 국가 간의 ‘협상’이 배제시킨 식민지민의 인권과 주권을 환기시키고 있다. 한국인의 인권과 주권은 “고상한 文化를 有하였고 반만년 국가생활의 경험”의 역사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토대위에서 민주주의 근대국가, 세계평화, 인류문화 공헌의 미래를 만들 것을 추구하였다. 즉 “正義와 自由를 기초로 한 民主主義 선진국의 範을 隨하여 新國家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吾族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함이 有할 줄 信하노라”하 하여, 인권이 인정되는 평화, 민주주의가 발휘되는 평화를 표방하였다. 그러한 평화의 주체가 되려는 의지는 <2·8독립선언 결의문>으로 정리되었다.
2·8독립선언을 준비한 일본유학생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롭게 국제질서가 변화하는 것을 주목하면서, 국제법상의 조약을 넘어서는 식민지민의 자유와 인권을 토대로 한 평화의 주체가 되는 권리를 선언하였다. 오늘날 ‘평화권’의 관점에서 볼 때 선구적인 평화선언이었다. 3. 100여 년을 연동하는 한일역사갈등 해결방안(1) 평화권에 입각한 식민주의 역사 청산 역사문제를 국제법상의 문제로 제한하며 한일 갈등을 부추키는 근저에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가 있다. 2000년대 초 본격화 한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는 과거 식민지배의 역사적 책임을 불문에 부치고, 일본의 사과를 자자손손 계승시켜서는 안 된다는 아베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는 이 담화에서 식민지배를 열강들의 경쟁에 의한 불가피한 상황으로 규정하면서 "식민지 지배라는 것을 근거로 해서 많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웠다"는 망언을 내놓았다. 또한 “적으로서 격렬히 싸웠던, 미국, 호주, 유럽 여러 나라를 비롯해 정말로 많은 나라들로부터 (과거의) 은원을 뛰어넘어, 선의와 지원의 손길을 받은 데다 관용의 마음 덕택에 일본은 전후 국제사회에 복귀하는 것이 가능했다”라고 했다. 정작 일본의 전쟁피해를 입은 아시아인들에 대한 사죄나 반성은 없었다. 전시 하 많은 여성들의 존엄과 명예가 깊이 훼손된 과거를 언급하고 있지만, 피해 여성이 누구인지도 애매한 일반론에 그치고 있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와 2005년 고이즈미 담화에 입각한 듯한 각색을 하고 있지만, 미국 등 서양 나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담화였다. 결국 ‘전쟁 없는 상태인 평화’를 표방하며 일본의 침략이나 식민지배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근린 국가들이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 책임론을 막겠다는 정치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 퇴진 이후 탄생한 문재인 정권은 이 문제가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할 수 없다 하였고, 급기야 2019년 7월 3일 ‘화해치유재단’을 해산시켰다. 인권과 평화권의 관점에서 식민주의의 역사를 청산하는 것은 ‘과거를 돌아보는 정의backward-looking justice’를 구현하는 문제이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동아시아의 나라들에게 과거 청산이라는 전환기의 과제를 던져주었다(주7).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마무리된 것은 냉전체제 하에서 일본의 위치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려 한 미국의 의도로 동아시아 시민들의 평화와 인권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었다. 진실과 역사 화해를 위한 과거사 청산은 진상규명, 피해자조사와 가해자 처벌, 피해자 명예회복, 기념사업 등이 포함된다. 2차 세계대전의 전쟁범죄와 그에 대한 청산을 얘기할 때 독일의 사례나, 전쟁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많이 거론된다. 1960년, 제2차 세계의 전범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일상화된 악, ‘악의 평범성’이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전제로 식민주의 역사를 청산하는 문제해결이야 말로 보다 근원적이고 지속적인 화해와 평화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100년 전 2·8독립선언은 식민주의 폭력에 저항한 인권 중심의 ‘평화’의 가치를 제안하고 실천한 것이었다. 이웃 나라 사람들이 함께하는 진실과 화해의 평화번영을 위해서 ‘평화권’에 입각하여 식민주의 역사를 청산하고, ‘악의 평범성’이 일상화되는 것을 막아야할 것이다. (2) 비국가행위자(Non-State Actor)의 연대와 역사적 평화교육 한일 간의 역사갈등은 국가 간의 갈등으로 드러나면서 국가주의 경향을 보인다. 오늘날 세계가 국민국가(Nation-State) 체제로 되어있는 상황에서 국제법상의 주권을 갖고 있는 모든 나라들은 국민의 정체성을 집단기억의 내러티브로 만들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식민지배나 전쟁기억의 문제도 개인의 문제보다는 국가 주도의 내셔널리즘 관점이 강조됨으로써 국민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주8). 아베 정부는 ‘교육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강한 일본의 애국심’과 ‘도덕교육’을 내세우며 일본국민의 역사왜곡을 심화시켰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나 침략에 대한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을 강조하고 반일의식과 정서가 고조되고 있다. 국가주의 과잉이 양 국민간의 감정악화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비국가행위자(Non-State Actor)의 역할을 증대할 필요가 있다. 비국가행위자의 중요성은 주권국가 중심의 웨스트팔리아적 국제법 질서의 간극을 메꾸며 전 지구적 평화와 인권을 위해 더욱 커지고 있다(주9). 100년 전 동아시아에는 비국가행위자들의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연대의 역사 경험을 갖고 있다. 2·8독립선언의 주체들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제국일본에 대응한 동아시아인들의 연대를 경험하고 그것을 토대로 하였다. 메이지유신이후 동아시아는 일본을 축으로 하는 제국주의의 확산 속에서 전쟁과 식민의 위기가 고조되었고, 동아시아는 연동하는 단위로서 변혁과 저항의 길을 공유하게 되었다(주10). 1907년 반제국주의와 아시아 민족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亞洲和親會가 결성되었고, 1915년 식민지 반식민지로부터 조선, 타이완, 중국을 해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新亞同盟黨이 결성되었다(주11). 新亞同盟黨은 유학생들이 조직했지만, 중국의 신해혁명에 가담했던 황지애민(黃介民) 등과 같은 혁명가 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타이완 민족운동의 기수가 된 평화잉(彭華英)등도 참여하였고, 조선인으로는 장덕수, 신익희, 김도연, 최팔용 등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선유학생학우회 간부들이 참여하였다. 신아동맹당은 1917년 해산되었지만 여기에서 구축된 네트워크는 중국과 조선의 연대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주12).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를 중심으로 한 여명회(黎明會)는 2·8독립선언 이후 일본 지식인이 조선의 식민지배 문제를 마주보게 되었다. 2·8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유학생들이 구속되자 후세 다쓰지(布施辰治)는 변호를 자청하였고, 이후 그는 조선독립운동이나 재일 조선인 문제와 관련하여 수 많은 변호를 담당하였다. 100년 전 동아시아 평화연대의 경험은 오늘날 한일 간 비국가행위자들의 평화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역사인식과 동아시아평화포럼,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Asia Wide Campaign(AWC), 후쿠시마원전사고 한일시민조사단, 우에무라 재판을 지원하는 시민의 모임 등 역사문제에서 생명 환경 문제까지 비국가행위자들의 한일 연대 평화활동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연대활동은 더욱 확장될 필요가 있다.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폭력 없는 공존을 위한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평화권’이 향유되는 것으로 확장되는 될 때, 역사갈등 해결의 보편적 가치로서 그 외연을 넓힐 수 있다. 더 나아가 세계시민 모두에게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고 공존하는 삶의 자세가 뿌리내려야 비로소 평화는 실현될 것이다. 평화의 출발은 생명이다. 따라서 평화를 위해 침략과 전쟁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교육하며 국제 평화를 위해 분투해온 평화운동의 역사를 가르치는 한편, 정치와 시민사회 영역에서 기본권을 위한 각종의 노력이 어떻게 한 사회를 평화의 가치에 부합하는 공동체로 전환시켜가는 데에 기여하는지 역사적 맥락에서 교육할 필요가 있다. 현재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태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지만, 새로운 한일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한일 간의 역사문제가 갈등과 증오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 역사를 청산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삶의 태도를 갖게 하는 것으로 전환될 때 진정한 평화의 한일관계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때, 100여년 전 2·8독립선언의 인간 중심의 평화 정신은 한일 역사갈등의 고통을 딛고 평화의 한일관계 정립을 위한 초석으로서 다시금 그 의의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주1) 朝鮮憲兵隊司令部編, 『朝鮮騷擾事件狀況(大正八年)』, 嚴南堂書店, 1969, 1쪽 ; 金仁德,「일본지역 유학생의 2•8운동과 3・1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 1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9; 長久保宏人,「二•八宣言から三•一獨立運動へ-ソウルを舞臺とした朝鮮人日本留學生の動きを中心に-」,『福大史學』 31, 福島大學史學會, 1981 ; 오노 야스테루, 「2•8독립선언의 전략성과 영향」,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100주년기획위원회 편, 『3・1운동 100년-2권 사건과 목격자들』, 휴머니스트, 2019. 주2) Peter N. Stearns, Peace in World History, Routledge, NewYork&London, 2014 ; 이리에 아키라, 『20세기의 전쟁과 평화』, 연암서가, 2016. 주3) 이지원, 『한국근대문화사상사 연구』 혜안, 2007, 2장 2절. 주4) 유럽에서는 16세기 이래 문명사회의 가치로서 ‘평화의 발명’이 규범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유럽에서 ‘평화’라는 개념은 ‘전쟁이 없는 상태(the absence of war)’로 규정되었고, ‘국가 간의 영속적 평화’로서의 ‘영구평화(Pax perpétuell)’를 이상으로 삼게 되었다(마이클 하워드 지음, 안두환 옮김, 『평화의 발명 – 전쟁과 국제질서에 대한 성찰』, 전통과 현대, 2000. 주5) 이지원, 「3·1운동기의 ‘평화’사상」 한국역사연구회3·1운동100주년기획위원회 엮음, 『3·1운동 100년 5.사상과 문화』, 휴머니스트, 2019. 주6) 임재성, 「평화권, 아래로부터의 만들어지는 인권」, 『경제와 사회』 91, 2011 ; 이경주, 『평화권의 이해』 사회평론, 2014. 주7) 이지원, 「해방 70년의 자화상과 과거사 청산, 그리고 역사학」 『역사와 현실』 97, 2015. 주8) 이지원,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20세기 전쟁기억과 평화교육」, 『제16회 역사인식과 동아시아평화포럼 난징대회논집』, 2017. 주9) Margaret P. Karns,Karen A. Mingst 공저, 김계동 등 역, 『국제기구의 이해 ; 글로벌 거버넌스의 정치와 과정』, 명인문화사, 2017: 정서영, 「국제환경거버넌스, 비국가행위자 그리고 국제법」 『서울국제법연구』17-2, 2010. 주10) 백영서,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창비, 2013. 주11) 小野容照, 『朝鮮獨立運動と東アジア 1910~1925』, 思想閣出版, 2013. 주12) 최선웅, 「1910년대 재일유학생단체 신아동맹당의 반일운동과 근대적 구상」 『역사와 현실』 60, 2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