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웹진기사 자유기고

방역과 사회_박윤재

작성자 박윤재 BoardLang.text_date 2024.02.22 BoardLang.text_hits 4,492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자유기고]

 

방역과 사회


 

박윤재(근대사분과)

 

 

 

1. 무서운 방역


어느 해이던가 한창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여 많은 희생자가 난 해였다. 이 무렵 해서 동리마다 왜순사(倭巡査)를 앞세운 일인(日人) 의사가 설사병 환자를 색출해내려고 집집을 뒤지면서 다닌 적이 있었다. 하필이면 나는 이때 배탈이 나서 시름시름 배앓이를 해서 기진해져 있었을 때였다. 이때 내 어머니는 얼굴이 핼쓱해지셔서 집안으로 뛰어들어 오셨다. “용성(필자의 아명)아. 큰일 났다. 지금 왜순사가 설사하는 사람은 모조리 잡아간단다. 너 순사와 의사가 물어도 눈 똑바로 뜨고 설사한다 말 말아야 해. 너 오늘 붙잡혀가면 영영 다신 어머니 아버지 못 봐. 이 녀석아.” 나는 이 날 누이와 어울려 억지 공기놀음으로 팔딱팔딱 뛰는 가슴을 억눌러 내려 쓸어야만 했다.

이 글의 저자가 1903년생이니 아마 1910년대 초반 일이 아니었나 싶다. 콜레라가 유행하자 총독부는 순사와 의사를 활용하여 환자 수색에 나섰다. 콜레라의 전형적 증상이 설사인지라 배앓이를 하던 이 저자도 잡혀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만약 잡혀가면 다시는 자신을 못 볼 거라며 자식에게 배앓이를 숨기라고 했다. 아이는 억지로 누나와 공기놀이를 하며 순사와 의사를 따돌려야 했다.

<그림 1> 검병적 호구조사

식민지시기 경찰은 무서운 존재였다. 그들은 간섭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독립운동가 색출이라는 목적 이외에 범죄에 대한 즉결 처분권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어 보급, 농사개량, 징세, 산림 감독도 경찰의 업무였다. 방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식민지시기 방역은 경찰의 몫이었다. 위생경찰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검역, 음식물 단속, 의료인 관리 등 방역의 모든 분야에 참여했다.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돌면 경찰은 마을을 다니며 환자를 찾았다. 강압적인 조사와 수색이 이루어졌다.

식민지시기 경찰이 보인 강압성에는 이유가 있었다. 콜레라의 위력은 강했다. 1919년의 경우 16,991명의 환자, 11,084명의 사망자, 1920년에는 24,229명의 환자, 13,570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지금보다 신고체계가 느슨했을테니 아마 실제는 더 많은 환자와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19세기 초 처음 콜레라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수십만의 희생자가 나왔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과 비교하면 적다고 할 수 있지만, 1만 명이 넘는 사망자는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콜레라는 치사율도 높았지만 증상이 참혹했다. 전형적인 증상은 구토와 설사였다. 설사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해방 후 콜레라 환자를 진료했던 의사의 회고에 따르면, “그 배설물의 양이 상상 못할 정도로 많아서 병실이나 복도 바닥이 온통 질벅질벅”했다. 이 의사는 “진료를 다닐 때는 항상 장화를 신어야 했”다.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다 보니, 심한 탈수증으로 인하여 눈은 움푹 들어가고, 피부는 탄력성을 잃었으며, 모세혈관이 파괴되어 피부색이 검푸르게 변했다. 마침내 혈압이 떨어져 환자는 쇼크 상태에 빠졌고 사망에 이르렀다.

식민권력은 콜레라를 막기 위해 경찰을 동원한 전방위적 방역에 나섰다. 환자를 찾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검병적(檢病的) 호구조사였다. 집집마다 방문하여 혹시 환자가 있지 않은지 일종의 전수조사를 하였다. 앞의 아이가 직접 겪은 상황이 그 예였다. 검병적 호구조사는 효과가 있었다. 1920년 콜레라가 유행할 당시 총 환자 수의 66%에 가까운 환자가 검병적 호구조사를 통해 찾아졌다. 호구조사가 광범위하게 진행되다 보니 의도치 않게 해당 지역의 범죄가 사라졌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경찰이 진행하는 검병적 호구조사는 가장 효과적이었다.”

 

2. 저항과 포용


검병적 호구조사와 같은 강제적 방역은 필요했다. 자발적인 신고율은 높지 않았다. 전염병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고, 신고를 위한 계몽도 부족했다. 문제는 강제만으로 효율적인 방역이 이루어지기 힘들다는데 있었다. 글의 서두에서 소개한 아이의 예가 그것이다. 다행히 아이는 콜레라에 걸린 것이 아니었지만, 만약 걸렸다면 이른바 지역감염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이 아이의 예처럼 강제적 방역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사람들은 빈틈을 찾아 빠져 나갔다. 결국 아이가 자연스럽게 증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했다. 자율적인 신고를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했다.

문제는 그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1910년대 식민권력이 진행한 방역이 그랬다. 경찰이 진행하던 방역은 가혹했다. 환자나 보균자로 의심될 경우 전염병원에 강제 입원을 시켰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서울에 전염병원으로 순화원(順化院)이 있었다. 순화원은 수용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환자가 폭증할 경우 문제가 발생할 것은 분명했다. 좁은 병실에 6-7명의 환자가 수용되고 있었고, 환자가 사망 후 2-3시간이 지나도록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가 생겼다.

<그림 2> 순화원의 후신인 순화병원(1960년대)

더 큰 문제는 한국인들이 순화원의 치료법을 낯설어 했다는 것이다. 순화원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한국식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서양의학 위주의 치료법에 친숙해지지 못했다. 특히 한국인들은 찬 것을 싫어했는데, 당시 순화원에서는 치료방법으로 얼음찜질을 활용하고 있었다. 열을 내리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얼음찜질은 몸 안에 열을 내보내기보다 오히려 몸 속 깊숙이 집어넣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당시 한국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생각은 한의학에서 왔다.

한국인들은 대안을 찾았다. 사립 피병원(避病院)이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순화원을 믿을 수 없으니 한국인의 병원을 설립하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사립 피병원이 설립될 경우 의사와 환자 사이의 소통이 원활해질 수 있었다.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가 고용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순화원에는 일본인 의사가 근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순화원에서는 한국식 치료법을 활용할 수 있었다. 환자의 병세나 요구에 따라 양약과 함께 한약을 병용할 수 있었다. 한약 사용에 대한 한국인의 요구는 컸다. 한의학 역시 전염병에 대해 특별한 치료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정서적으로 한국인에게 익숙해 있었다.

한의학에 대한 신뢰가 강한 상황에서 서양의학 위주의 방역은 효과를 충분히 거두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한의학을 포용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식민권력에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일본은 한국 지배의 배경으로 자신의 선진적 문명 수용을 내세우고 있었고, 서양의학은 그 문명의 중심에 있었다. 지배의 정당화를 위해 서양의학을 활용한 일본의 입장에서 그동안 미개하고 후진적이라 평가했던 한의학을 인정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수용을 안 할 이유도 없었다. 서양의학이라고 해서 콜레라에 대해 효율적인 방어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930년대를 거치면서 순화원에 한국인 의사가 고용되었다. 한의사였다.

 

3. 사회에 대한 이해


방역을 진행하는데 강제와 자율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강제가 이루어질 경우 방역의 빈틈을 탄 탈출이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자율만을 강조하는 것도 편향이다. 귀찮음과 불편함을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른 정확한 대처법이 필요하다. 전염병의 종류, 동원 가능한 의료자원, 주민의 방역 이해도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문제는 모든 상황을 감안한 완벽한 대처법을 찾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흔히 천연두라 불리는 두창은 예방접종의 효과가 분명했다. 주사만 맞으면 두창에 걸릴 염려는 없었다. 하지만 두창 방역조차 쉽지 않았다. 백신에 대한 불신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두기술은 완전하지 못했고, 접종 방법이 미숙해서 피접종자가 고통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접종을 받았음에도 두창에 감염되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두창 감염의 원인이 면역력의 약화나 환자와 빈번한 접촉 등에 있다고 설명되기도 하였지만, 백신의 효과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효과가 검증된 두창 백신에 대해 불신이 싹트고 있었다면, 콜레라 백신에 대한 불신은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식민권력은 콜레라가 유행할 때면 백신의 효과를 강조하며 광범위한 접종을 진행하였다. 피접종자 10명 중 8-9명이 효과를 얻었고, 특정 지역이 콜레라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백신에 있다고 선전하였다. 하지만 1902년 일본에서 처음 콜레라 백신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효과에 대해서는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콜레라 백신은 효과가 없었다. 예방효과가 제한적이어서 WHO는 더 이상 콜레라 백신을 권장하지 않는다. 식민권력은 백신의 효과를 과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림 3> 콜레라 백신 접종 장면

예방효과가 적은데다 치료할 방법이 없고, 나아가 잡혀가 치료받을 공간이 열악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면, 아이가 숨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숨는 일은 막아야 했다. 감염력의 정도에 따라 그 아이는 슈퍼전파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불신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그 불신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왜 숨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완벽한 방법은 없을지라도 근접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사회에 대한 이해이다.

방역의 힘은 의료에서 온다. 지금 유행하는 코로나19가 종식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백신과 치료제가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가 지금 백세인생을 노래할 수 있는 이유도 의료에 있다. 다만 그 의료가 펼쳐지는 공간은 사회이고, 그 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경우 방역의 효과는 충분히 발휘되기 어렵다. 식민지시기 서양의사의 입장에서 한의학을 활용하자는 주장을 수용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의학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대비책을 세우고 활용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이 왜 순화원을 두려워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왜 얼음찜질을 싫어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의료인의 역할을 넘어 주민들의 협조가 중요시되는 시점에 그 이해는 더 중요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