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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明宗 후반기 무신집권자의 부재와 권력분점_백인환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0.03.19 BoardLang.text_hits 24,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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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高麗 明宗 후반기 무신집권자의 부재와 권력분점


(2019. 08.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백인환(중세1분과)


 

본 논문은 경대승이 병사한 고려 명종 13년(1183)부터 이의민이 최충헌에게 제거되는 명종 26년까지 무신집권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재추관료들이 어떻게 권력을 분점 하였으며, 이에 따라 정국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필자는 대학원에 진학하기 이전부터 무신집권기 정치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신집권기 정치사에 대한 관심은 대학원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어 무신집권기 정치사를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명종대 정치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명종 13년 경대승이 사망한 이후 이의민이 개경으로 상경하지만 상경한 이후부터 명종 20년까지 이의민의 정치활동이 크게 나타나고 있지 않는 점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공부를 진행하였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경대승이 사망한 이후 이의민이 무신집권자가 되었고 이의민 세력으로는 무신정변에 참여하였던 신분이 낮은 무신들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권력구조에 대해서는 관료제와 함께 문객이나 족당 결합에 의한 사적(私的) 운영이 공존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의민이 이의민 세력과 함께 정치활동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는 점에서 과연 명종 13년 이후 정국에서 정치세력들이 어떻게 활동하였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또한 이 시기 권력구조의 특징으로 관료제와 사적운영이 공존한다고 했지만 그 양상이 구체적으로 어땠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면서 필자는 명종 후반기 정치세력과 권력구조의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무신정변이 발생한 이후 정국에 등장한 무신집권자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집권자가 되었다. 이들은 정변을 통해 다른 무신집권자를 제거한 이후 군사기반을 이용하여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집권 이후 무신집권자와 그의 족당(族黨)은 승선, 이부와 병부의 판사∙상서∙지사, 상장군과 대장군, 재추에 임명되어 관료제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경대승이 명종 13년 병사하면서 정변을 통한 무신집권자의 탄생이라는 집권 양상이 성립하지 못하였다. 또한 무신집권자가 나타나지 못하면서 무신집권자와 족당이 승선, 이부와 병부의 판사∙상서∙지사, 상장군과 대장군, 재추에 임명되어 권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편 명종 후반기 정치상황을 살펴보면 여전히 무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하였는데 이는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은 중방을 통해서 권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왕과 문신들은 무신들의 견제를 받았다. 그러나 비록 국왕 명종이 무신들의 견제를 받았지만 국왕의 권위는 유지될 수 있었다. 대내적으로 국왕은 왕조를 상징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권위를 부정하기 어려웠으며, 게다가 명종은 무신들의 추대를 받았기 때문에 무신들이 명종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고려에서는 새 국왕이 즉위하면 중국에서 책봉을 받고 이를 통해 즉위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는데, 명종의 경우도 책봉을 받아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점은 명종 13년 이후 명종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명종은 자신이 원하는 일부 인물을 승선∙간관∙내시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국가 중대사를 의논한 재추들은 이 시기 독자적으로 국정을 회의하고 건의하였으며, 이때 무신출신 재추가 중심이 되어 국정을 이끌어갔다. 하지만 무신출신 재추들이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지는 못하였으며, 문신출신 재추들도 함께 국정을 이끌어간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무신집권자가 부재한 정치상황 속에서 명종 17년 조원정의 난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당시 정국의 변화를 꾀하고자 한 사건이었다. 조원정은 무신정변 이후 승진하면서 재추에 임명되었다. 그는 여러 불법행동을 저질렀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장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종 17년 조원정이 중서문하성의 공해전 조세를 탈점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조원정의 행동을 더 이상 묵인할 수 없었던 중서문하성의 관료들은 그를 탄핵하였다. 이에 조원정은 위기의식을 느꼈고 자신을 탄핵한 인물을 제거하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조원정의 난 이후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명종은 제서를 반포하였고 열병을 실시하였다.

조원정의 난 이후에도 변동이 없었던 정국에 변동이 나타난 것은 명종 19년 이후로 명종 13년 이후부터 재추를 역임하였던 관료들이 사망하면서 다른 관료들이 재추에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재추에 임명된 관료 가운데 정국에서 두각을 드러낸 관료는 두경승과 이의민이었다. 두 사람이 정국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는 두 사람이 각각 수상과 아상으로써 인사권을 관장하는 직책에 있었으며, 중방의 구성원이었고 군공이 상당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신집권자처럼 정변을 통해 다른 무신집권자를 제거하고 집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정국을 독점적으로 주도하지 못하였고, 두 사람을 중심으로 권력이 분점되었다. 한편 명종은 소군과 자신이 총애하는 승려를 통해 자신의 정치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소군과 명종이 총애하는 승려는 인사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하였지만 관료제 상에서 활동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은 한계가 있었다. 또한 명종은 제서와 조서의 반포를 통해 결정권을 행사하였는데 이는 명종의 결정권이 어느 정도 행사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이것이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데 있어서는 한계가 있었다.

명종 20년 이후부터 두경승과 이의민을 중심으로 권력이 분점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의민은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중심이 되어 정국을 운영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의민의 정치활동에 대해서 관료들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계기가 되는 것은 명종 23년에 발생한 김사미∙효심의 난이었다. 이후 명종 24년이 되면 이의민과 그의 당여들은 적극적으로 권력을 남용하였는데, 이를 통해 그는 무신집권자가 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많은 관료들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최충헌 형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명종 26년 최충헌은 자신의 족당과 함께 이의민을 제거하였고, 최충헌의 이의민 제거는 최충헌이 정국에서 두각을 드러냄과 동시에 최충헌이 중심이 되어 정국이 운영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상으로 필자는 경대승이 사망한 명종 13년 이후부터 이의민이 사망하는 명종 26년까지 무신집권자가 부재하였고 무신집권자가 부재함에 따라 권력이 분점되어 있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명종 후반기 정치사의 흐름 속에서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하고 집권할 수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과 더 나아가 무신들이 전면에 등장하여 정치를 하였다는 것이 한국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는 추후의 연구를 통해서 밝히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