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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와 중국 광저우 ③ : 혁명의 도시 광저우, 그리고 한국독립운동_남기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2 BoardLang.text_hits 4,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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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 답사기]

 

한국의 근대와 중국 광저우 ③ :

 

혁명의 도시 광저우, 그리고 한국독립운동


 

남기현(근대사분과)


 

1. 답사 4일차


⑴ 광저우기의열사능원

광저우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것이 어제 같은데 어느덧 3일이 지나고 4일째 답사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광저우 시내 답사가 기획되어 있다. 첫 번째 답사할 곳은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이다. 이곳은 광동코뮌, 광저우봉기라고도 불리는 광저우기의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진 1> 광저우기의열사능원전경(출처: 남기현)

광저우기의열사능원 입구를 지나 걸어가면 웅장한 광저우기의기념탑이 나타난다. 기념탑은 상단에 총을 손으로 잡은 모습, 하단에는 광저우기의의 과정을 조각해 놓은 부조 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념탑에 묘사된 광저우기의의 모습은 매우 긴박하고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군인, 농민, 노동자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행정기관을 습격한 후 기관을 장악한 모습, 그 후 반격을 받아 희생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사진 2> 광저우기의기념탑1(출처: 임경석)

광저우기의는 1927년 12월 11일에 새벽에 시작되었다. 그날 어떤 일이 있었을까? 1927년에 일어난 광저우기의는 제1차 국공합작과 그것의 결렬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1924년 손문은 코민테른과 손을 잡았다. 코민테른으로부터 재정적 지원과 군사를 양성하는 데 도움을 받아 군벌들을 추출하려고 했다.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합작 논의가 광저우에서 이루어졌고, 군사양성을 위한 황포군관학교가 광저우 외곽에 세워졌다. 광저우는 중국혁명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많은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된 것이다. 제1차 국공합작은 1925년 손문 사후에도 지속되었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장이었던 장개석은 군벌들을 제거하기 위한 북벌군 총사령관이 되어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1927년 4월 장개석의 군대는 상해를 점령했다. 이때 장개석은 북벌을 잠시 중지하고 국민당 내에 공산당원 및 노동운동가 등 진보인사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제거했다. “국민당을 깨끗이 한다”는 것이 명목이었다.

<사진 3> 광저우기의기념탑2(출처: 임경석)

공산당은 장개석에 맞서기 위해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1927년 8월에 일어난 남창기의, 같은 해 9월에 일어난 추수폭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1927년 12월 중국 공산당은 장태뢰, 섭검영 등을 중심으로 코민테른과 연합해 투쟁에 나섰다. 이것을 광저우기의라고 한다. 12월 11일 공안국을 점령한 후 혁명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광저우 소비에트 정부가 성립되었음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군벌 장발규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광저우기의는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광저우기의에 참여한 노동자, 농민, 군인 등은 군벌 세력에 의해 대규모로 사살되었다. 광저우기의기념탑에서 약 100미터를 들어가면 거대한 봉분이 나타난다. 이곳은 광저우기의 때 목숨을 잃은 약 5000여명이 합장된 광저우기의열사합장능이다.

<사진 4> 광저우기의열사합장능(출처: 임경석)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을 보면서 특이했던 점은 광저우기의를 기리는 엄숙한 공간이면서도 광저우 시민들이 일상을 즐기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광저우기의열사능원 입구에서 기념탑, 합장능에 이르는 길이 엄숙하고 주변을 압도하는 느낌이었다면, 합장능에서 약 200미터 정도를 걸어 중조인민혈의정으로 넘어가는 길에는 많은 광저우 시민들이 산책, 체조 등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중조인민혈의정은 광저우기의에 참여했다 희생된 조선인 청년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2층 누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1층에는 중조인민혈의정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사진 5> 광저우기의열사능원 중조인민혈의정에서(출처: 도면회)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한국인들을 비롯하여 약 150여명이 광저우기의에 참여하였고, 이들 중 많은 인원이 희생되었다. 왜 한국이 아닌 중국의 혁명에 많은 한국 청년들이 참여했을까? 당시 많은 한국인들은 중국의 혁명이 한국의 해방과 혁명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국공합작 결렬되고, 부르주아 세력과 결별하라는 코민테른의 지령은 한국 청년들의 기대와 어긋나는 것이었다. 당시 광저우기의에 참여했던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인 『아리랑』에 따르면 당시 광저우기의에 참여한 한국청년들은 “이 전쟁은(광저우기의) 동시에 우리의 조국을 방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중조인민혈의정 기념비 앞면에는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맺어진 우의가 영원할 것이라는 내용이 황금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광저우기의는 당시 한국의 독립과 혁명을 기원했던 한국 청년들의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독립과 혁명을 이끌어갈 젊은 인재들이 다수 사살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진 6> 중조인민혈의정 기념비(출처: 홍종욱)

 

광저우농민강습소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을 나와 광저우농민강습소로 향했다. 큰길가와 접해있어 쉽게 눈에 띄었다. 지하철 농민운동강습소역과 인접해 있어 나중에 혹시 오게 되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민강습소는 1924년 제1차 국공합작 이후 총 6차례 운영되었다. 이 중 1926년 5월부터 9월까지 광저우에서 진행되었던 제6차 농민강습소가 가장 성황을 이루었다. 이 때 소장 직을 담당한 인물이 모택동이다. 농민강습소에 참여한 인원들은 혁명이론을 공부하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졸업 후에는 각지로 흩어져 농민운동에 종사했다.

광저우농민강습소에는 당시 농민강습소를 운영했던 인물들과 그들에 대한 이야기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서무부, 교무부 등 당시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공간도 있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5살에서 6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단체로 관람을 왔고, 전시되어 있는 내용을 함께 크게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본 것이다. 중국어를 잘 하지 못해 어떤 내용인지를 몰랐다는 것이 아쉬웠다. 농민강습소에서 나올 때는 중국행정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단체 관람을 왔다. 농민강습소가 중국 근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진 7> 광저우농민강습소(출처: 이상호)

 

노신기념관 중국국민당제1차 전국대표대회 장소

다음 답사장소는 노신기념관이다. 노신은 중국을 대표하는 문학가이자 사상가이다. 노신기념관은 옛 중산대학교 터에 위치하고 있다. 노신기념관 2층에는 노신이 중산대학교에서 강의했던 시절의 연구실, 침실 및 중국 근대 교육과 관련된 전시를 볼 수 있었다.

<사진 8> 노신기념관(출처: 이상호)

문학가, 사상가로써 노신이 차지하는 위치가 매우 크지만, 개인적으로 더 관심이 갔던 곳은 노신기념관 1층에 있는 강당이었다. 이곳은 1924년 중국국민당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던 장소였다. 이곳에서 손문은 중국공산당원이 국민당에 개인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제1차 국공합작이 실질적으로 성립되게 된 것이다.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한 인원들의 명단과 좌석배치도가 함께 소개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사진 9> 중국국민당제1차 전국대표대회(출처: 한성민)

 

광동혁명역사박물관

오전 답사일정의 마지막 일정은 광동혁명역사박물관 방문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광저우기의열사능원 내에 위치해 있었다. 광저우기의열사능원 방향으로 다시 향했다. 이미 방문했던 곳을 다시 방문하는 것이었지만 거리가 멀지 않았고,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었다.

광동혁명역사박물관 건물은 1909년 서양 국회를 모델로 지어졌다. 건물 자체가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광동혁명역사박물관에는 아편전쟁부터 2차 세계대전 종료 때까지 주요사건, 인물사진, 유물 등이 전시되었다. 아편전쟁(임칙서), 태평천국운동(홍수전), 변법자강운동(강유위), 신해혁명(손문)에 대한 전시는 이번 답사기간 동안 봐왔던 것이기 때문에 쉽게 다가왔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또한 광저우기의 때 사용되었던 노동자조직의 깃발, 유인물, 농민들 단체의 팻말 등을 통해 광저우기의 당시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사진 10> 광동혁명역사박물관 입구(출처: 구선희)

광동혁명역사박물관에서 나오니 12시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 이어지는 답사장소는 많은 한국인들이 군사훈련을 받았던 황포군관학교이다.

 

황포군관학교

황포군관학교의 정식명칭은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이다. 주강 황포 장주도(長洲島)에 위치했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황포군관학교라고 불린다. 현재 황포군관학교는 해군기지 안에 있다. 1938년 일본군에 의해 폭파되었다가, 2004년 현재와 같이 복원되었다. 황포군관학교에 가까워올수록 교통이 정체되었다. 황포군관학교를 방문하는 차량이 많은 까닭이었다. 평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황포군관학교에 방문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여담이지만 답사를 마친 후 한국에 방문한 광동성 출신 대학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광저우기의열사능원, 농민강습소, 황포군관학교는 수학여행 장소로 방문했던 적이 있다고 하였다.

<사진 11> 황포군관학교에서(출처: 이상호)

황포군관학교는 중국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제1차 국공합작이 맺어진 1924년 손문은 혁명군 지도자를 양성하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 소련의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아 설립되었으며 국민당과 공산당 대표가 함께 운영했다. 6기에 걸쳐 졸업생이 약 7,000여명 배출되었고, 이들은 후에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의 지도자들로 활동했다.

<사진 12> 황포군관학교모형도(출처: 남기현)

황포군관학교에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의 청년들도 입학해 있었다. 황포군관학교와 관련된 한국인 독립운동가중 가장 알려져 있는 인물은 김원봉이다. 김원봉은 1925년 의열단의 근거지를 베이징에서 광저우로 옮겼다. 그리고 의열단원들이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도록 손문과 협상했다. 1926년 1월에는 자신도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황포군관학교에 청년들을 파견했다.

<사진 13> 김원봉(출처: 위키디피아 커먼즈 https://commons.wikimedia.org/)

현재 황포군관학교는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이 생활하던 공간, 교관들의 생활공간 등 옛 학교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황포군관학교를 보면서 아쉬웠던 점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황포군관학교가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 때문에 관람객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역사관에 전시된 내용을 자세히 보기에 어려웠다. 황포군관학교에 방문할 계획을 세울 때는 아침 일찍 다녀올 것을 추천한다.

<사진 14> 황포군관학교2층(출처: 남기현)

 

동정진망열사능원

황포군관학교 정문에서 약 700미터 떨어진 강가에는 동정진망열사능원이 있다. 이 곳에는 1925년에 일어난 군벌의 반란을 막기 위해 출정했다가 희생된 황포군관학교 학생 516명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사진 15> 동정진망열사능원(출처: 남기현)

동정진망열사능원 가장 안쪽에는 학생군묘가 있다. 이곳에는 총 66개의 묘비가 있으며, 한국인 김근제와 안태의 비석이 있다. 김근제의 후손은 찾았지만 안태의 후손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사진 16> 동정진망열사능원 김근제의 묘(출처: 방광석)

<사진 17> 동정진망열사능원 안태의 묘(출처: 방광석)

 

서한남월박물관

황포군관학교와 동정진망열사능원을 보고나니 어느덧 시간이 오후 4시 가까이 흘러가고 있었다. 다음 답사예정지인 서한남월박물관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박물관 입장 마감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빠르게 이동해야만 했다. 다행히 입장 마감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사진 18> 서한남월박물관1(출처: 여호규)

서한남월 박물관은 남월의 2대왕 문제 조호의 묘와 묘에서 발굴한 출토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남월은 중국 진나라 말에서 한나라 초에 광동, 광서, 베트남 북부지역에 세워진 나라였다. 광저우는 남월의 수도였다. 1983년 택지개발 공사를 하던 중 남월 2대 왕의 묘가 발견되었다. 고분에서는 옥기와 토기, 청동기가 발견되었다. 이 물건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서한남월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옥과 명주실로 엮어 만든 수의라는 뜻을 가진 ‘사루옥의’이다.

<사진 19> 서한남월박물관 – 사루옥의(출처: 여호규)

서한남월박물관에서 특이했던 점은 발굴된 묘를 박물관의 한 요소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박물관 건물 안에 묘가 위치되어 있고, 직접 들어갈 볼 수 있었다. 아쉬웠던 점은 뛰어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음에도 이와 관련된 도록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진 20> 서한남월박물관2(출처: 남기현)

 

황화강72열사묘

황화강72열사묘에 방문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곳은 ‘황화강 사건’의 희생자 72명이 묻혀 있는 곳이다. ‘황화강 사건’은 ‘3ㆍ29 무장봉기’, ‘72열사 사건’, ‘신해광저우 봉기’라고도 불린다. 1911년 4월 27일 중국혁명동맹회는 광저우 양광 총독부 아문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미 방어를 하고 있던 청나라 군대에게 패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사살되었다. 사살된 중국혁명동맹회 회원들의 시신은 광동성 자의국 마당에 방치되었다. 다행히 혁명동맹회 회원이면서 <평민보> 기자였던 반달미(潘达微)는 이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리고 72구의 시신을 황화강에 매장했다. 신해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이 지역이 열사능원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사진 21> 황하강72열사능원(출처: 심철기)

황화강72열사묘도 광저우기의능원과 유사하게 규모가 매우 컸다. 현충시설이면서 지역주민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는 것도 비슷했다. 황화강72열사능원을 들어가면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커다란 입구에 적혀있는 ‘호기장존(浩氣長存)’이라는 문구이다. 손문이 쓴 것으로 “호연한 기운이 오래 남아 있으리라”는 뜻이다.

<사진 22> 황하강72열사능원(출처: 여호규)

황화강 공원 내에는 ‘황화강 사건’에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1918년 화교들이 기금을 모아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샹샤주루

이번 답사의 마지막 답사 장소는 광저우 최대 번화가인 상하구로(上下九路)이다. 상하구로는 북경로와 함께 광저우에서 가장 유명한 전통적 상업거리이다.

<사진 23> 상샤주루(출처: 한성민)

상하구로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저녁시간이었다. 상하구로를 걸어가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넓은 거리를 꽉 채운 사람들, 다양한 음식점, 쇼핑몰이 위치한 화려한 거리였다. 서울의 명동을 몇 개 합쳐놓은 규모였다.

<사진 24> 상샤주루2(출처: 한성민)

상하구로를 둘러본 뒤 야외 커피 집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면서 상하구로를 둘러보았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사고,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약 15년 전에 방문했던 중국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3. 답사 5일차 : 귀국, 그리고 답사 후기의 후기


 

4박 5일간 답사 일정이 종료되었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광저우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광저우는 근현대 중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였다. 중국의 근현대를 이끌어갔던 중요한 인물들이 태어난 곳, 중국의 혁명을 이끈 사건들이 일어난 곳이었다. 또한 한국의 독립, 혁명을 꿈꾸었던 사람들이 활동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다시 광저우를 방문한다면 어떤 느낌을 받을지 궁금했다.

<사진 25> 귀국 비행기(출처: 한성민)

* 답사 후기의 후기 :

이번 광저우 답사는 저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주었습니다. 중국의 혁명, 그리고 그것에 참여한 한국인들, 그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은 무엇인지를 고민해보는 계기를 주었습니다. 개항장이었던 광저우, 그리고 서양 국가들의 침범과 그에 대한 대응은 한국근대사의 상황과 겹쳐졌습니다.

이러한 답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함께 답사에 참여해주신 한국역사연구회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가이드가 깜짝 놀라며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자신이 광저우에 살고 있지만 이번답사와 같은 코스를 가본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중국 역사에 대해 새롭게 배웠던 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빡빡한 답사일정에도 불구하고 모임시간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은 선생님들의 모습에 감탄을 했습니다.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으로써 부담스러운 해외답사에 대한 총책임을 맡으셨던 이진한 선생님, 답사 기획을 총괄하셨던 임경석 선생님, 답사의 실무를 전적으로 맡아주셨던 한성민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말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