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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영상으로 본 북한]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북한영화의 기억_이하나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2 BoardLang.text_hits 3,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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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6월(통권 6호)
[기록과 영상으로 본 북한]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북한영화의 기억이하나(현대사분과) 인류학자 프랑코 라 세클라는 <이별의 기술>에서 이별한 사람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다양한 각본으로 서술할 수 있는 해석의 장을 열어 놓는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떠난 사람이 임의적으로 만든 각본은 절대로 그들 ‘공통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뜻하지 않게(!) 헤어진 사람들은 자신을 이 가련한 관계의 피해자이자 진정한 서술자로서 스스로를 위치지운 후 이별의 원인을 자신의 입장에서 곱씹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합리화하는 서사를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상대가 일방적으로 만들어놓은 서사의 프레임에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다른 상대는 크게 상처입고, 그 상처만큼 더 완벽한 자신의 서사를 만듦으로써 이에 대응한다. 같은 사실에 대해 각기 다르게 반추된 과거와 기억 속에서 진실은 표류하기 마련이기에 사랑이 깊을수록 갈등과 미움, 원망과 비난도 크다. 그들은 그렇게 이별 후에도 끊임없이 상대를 의식하며 경쟁하고 질투하면서 급기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로를 닮아간다. 이별의 서사 –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한국전쟁을 둘러싼 남한과 북한의 서사는 꼭 이를 닮았다. 한반도의 분단이 한국전쟁으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한다면 한국전쟁에 대한 남북의 서사는 결별의 결정적 원인에 관한 서로 다른 해석을 보여준다. 냉전시기 남한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영화는 대개 북한의 남침 사실을 강조하고 공산주의의 반인륜성을 고발하며 나아가 전쟁의 비극과 이념의 덧없음을 그린다. 그렇다면 북한영화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재현하고 있을까? 그리고 한국전쟁을 다룬 북한영화를 통해 우리는 북한사회의, 혹은 한반도 현실의 무엇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일까? 한국전쟁을 다룬 북한영화 중에서도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인 올해 특별한 관심을 끄는 영화가 있다면 바로 전쟁 발발의 원인에 관한 북한식 해석과 주장을 보여주는 다부작예술영화 <붉은 단풍잎>(7부작, 1990~1993)일 것이다. 결별의 서사 측면에서 본다면 누가 먼저 원인 제공을 했느냐 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기는 1950년 1~5월 무렵으로서, 북한 스파이 정항명을 중심으로 하는 간첩단 단풍조가 남한의 전쟁 음모를 폭로하는 이야기이다. ‘정항명’이라는 이름은 해방후에서 전쟁 발발까지 남한에서 활동하던 간첩 성시백(1905~1950)의 가명, ‘정향명’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남한에 알려진 성시백의 활동과 영화 속에 묘사된 정항명의 행적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엄밀히 말해 북한의 지령을 받는 남파간첩도 아니고 투철한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해방후 남한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존재할 수 있는 애국주의자, 북한 지지자를 상징하는 존재이다. 그가 김일성을 따르는 것은 명령을 받는 상하관계여서가 아니라 김일성이 미제와 매국세력으로부터 민족을 구원할 지도자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중심 플롯은 단풍조 조장 정항명과 남한의 공안검사 오제도의 첩보 대결이다. 실제로 오제도는 성시백을 체포한 장본인이지만, 영화 속에서 대결의 승자는 오제도가 아닌 정항명이다. 그는 남한과 미국의 은밀한 전쟁 모의를 북한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남한 대중과 외신 앞에서 이를 폭로함으로써 전쟁 도발을 획책하는 남한과 대비되는 평화를 지향하는 북한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남한에 알려진 성시백의 모습
영화 속의 정항명
그런데 이 영화의 제7부가 완성된 이듬해인 1994년 6월, 러시아는 한국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을 기념하여 한국전쟁에 관한 구소련의 비밀문서 복사본 200여건, 총 550여쪽을 한국측에 전달했다. 이를 통해 그간 남침설, 북침설, 남침유도설 등으로 갈라졌던 한국전쟁의 발발에 대한 갑론을박이 명백한 자료를 통해 정리되었다. 곧 한국전쟁의 발발은 북한, 중국, 소련의 개전 합의와 전면 공격의 결정으로 비롯되었다는 것, 나아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침략에 대한 정의의 응징’이라는 전쟁 개시 시나리오를 제시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문제는 이 영화가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기 전에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불과 1년후 벌어질 일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 한국전쟁이 미국과 남한의 모의에 의해 일어났다는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한 셈이 되었다. 냉전 해체에 대한 북한의 반응은?그러나 이 영화가 냉전해체가 이미 시작된 무렵 기획, 제작되었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구소련의 비밀문서 해제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이러한 위험요소를 무릅쓰고 왜 하필 냉전해체기에 냉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한국전쟁을 가장 냉전적 시각에서 그린 영화를 제작했던 것일까? 이 영화가 기획되었으리라 생각되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어 독일이 통일되고 폴란드·헝가리·알바니아 등 동유럽과 그 인근 지역에서 연쇄적인 항쟁이 일어났으며, 급기야 미국의 부시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지중해의 몰타 해역 선상에서 냉전체제 종식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 해에 <로동신문>에는 냉전 해체에 관한 어떠한 소식도 보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국전쟁 발발 40주년을 맞은 1990년에는 1989년 대비 한국전쟁에 대한 기사가 3배나 증가하였고 미제가 조선침략전쟁을 도발한 원수라는 종래의 논조를 유지하는 기사들이 전면을 도배했다. 이는 1950년대 후반부터 걸어온 북한의 독자노선이 이러한 세계사적인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견고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님 냉전해체 분위기에 오히려 위기감을 느낀 북한체제의 반작용이었을까? 1987년 6월 항쟁 이후의 민주화 분위기와 노태우정부의 북방외교로 인해 해빙 무드에 젖어있던 남한에서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북한바로알기운동’까지 일어났다는 사실과 비교해 본다면, 하필 이 시기에 전쟁 발발을 곱씹어 굳이 “우리는 이렇게 헤어졌고 그것은 다 너 때문이야”라고 외치는 듯한 영화를 만들 필요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지만 이 영화가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정도에 그쳤다고 보는 것은 북한영화의 섬세하고 미묘한 변화를 간파하지 못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전의 한국전쟁 관련 북한영화에서 한국전쟁이란 북한과 미국의 대결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남한의 존재는 거의 사상되어 왔다. 곧 북한의 원수는 어디까지나 미제이지 남한이 아니므로, 영화 속에서 남한은 괴뢰 매국세력에 의해 핍박받는 가련한 동포이거나 무기력하고 수동적으로 미제에 예속된 존재, 퇴폐적인 미제 문화에 빠진 각성하지 못한 인민들 정도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이전 시기 북한의 다른 전쟁첩보영화에서 첩보대결의 중심축이 북한 스파이와 미국의 방첩부대 대장이었음을 상기한다면, 남한을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적극적 행위자로서 정확하게 묘사하면서 나아가 전쟁 전야의 첩보대결을 명백히 북한 대 남한이라는 틀로서 바라보고 있는 이 영화의 변화는 심상치 않다. 뿐만 아니라 제작면에서도 1990년에 1,2,3부, 1991년에 4,5부, 1992년에는 아예 제작이 중단되었다가 1993년에 6,7부가 마저 제작되었다는 것은 속도전이 중요한 창작 원리로 꼽히는 북한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다. <이름 없는 영웅들>이나 <민족과 운명>과 같은 다부작예술영화들이 한 해에 평균 5편씩 제작되었던 것과 비교했을 때, 총 4년에 걸쳐 겨우 7부작을 완성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냉전해체기에 북한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정의의 전쟁’ vs. ‘정의의 전쟁’북한의 이러한 태도 변화의 기원은 사실 데탕트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엔 미국에 대해 그리 비판적이지 않던 북한은 트루만독트린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에 대한 태도와 입장을 적성국으로 확실히 정리하였다. 그러다 데탕트가 시작되어 미중수교 및 남북대화가 이루어지면서 평화협정에 대한 요구가 일었고, 1973년 베트남과 미국이 평화협정을 맺은데 고무되어 1974년에는 미국에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서한을 발송하였다. 이후 북한은 지속적으로 북미관계 및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회담을 제안했지만, 1976년 판문점 미군피살사건(이른바 ‘도끼만행사건’)과 1983년 아웅산폭탄테러사건 등으로 북미 및 남북관계는 결정적으로 악화되었다. 대화의 전기는 민주화와 냉전해체에 따른 남한과 미국의 상황 변화로부터 찾아왔다. 남한의 노태우정부는 북방외교를 펼쳤고 미국의 부시대통령은 냉전 해체에 발맞춰 한국에 배치된 미국의 전술핵을 철수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 등을 가능하게 하였다. 급기야 남북은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에 합의했으며,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수용하는 등 한반도에 평화의 기류가 흘렀다. 그런데 1992년 IAEA는 핵사찰 과정에서 북한을 의심했고 북한도 미신고 시설에 대한 사찰을 거부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1993년 3월 미국은 그동안 중단되었던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재개하였고 이에 항의하여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였으니, 이것이 ‘제1차 북핵위기’이다. 북한은 한미합동군사훈련 재개가 일종의 전쟁 선언이라고 받아들였고, 1994년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전쟁다큐멘터리 <정의의 진격>(1951) 광고
이러한 과정에서 남한사회의 한국전쟁에 대한 학술적 재해석 움직임과 그에 대한 역공 등은 북한을 자극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북한의 변치 않는 해석은 물론 한국전쟁이 ‘미제의 침략전쟁’이라는 것이다. 전쟁 발발 당일부터 <로동신문>은 이 전쟁이 남한의 공격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고 보도하였고, 1970~80년대초까지 발간된 <조선전사>, <조국해방전쟁사> 등의 역사서에서 북한은 한국전쟁이 미국과 남한의 북침에 맞선 ‘정의의 전쟁’임을 공식화하였다. 전쟁기 남한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정의의 진격>임을 상기해 보면, 한국전쟁은 각자의 입장에서 침략에 맞선 ‘정의의 전쟁’으로 기억된 셈이다. 그러다 1988년 민주화 분위기와 미국의 수정주의 학파에 영향받은 남한의 진보적 소장학자들이 학술운동의 맥락에서 한국전쟁의 발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고, 종래의 남침설과 함께 북침설, 남침유도설 등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러자 보수진영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수정주의 학설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과 더불어 북침설이나 남침유도설 등이 다분히 ‘용공적’이라는 공격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받은 북한은 이듬해인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남한의 강화된 ‘남침설’ 주장에 대응하는 책자들을 맹렬히 내놓기 시작하였다. 세계제패를 꿈꾸며 남조선을 강점하고 북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킨 미국이 얼마나 야만적으로 반인륜적인 폭격, 파괴, 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저질렀는지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운동 및 통일운동의 흐름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이러한 변화가 북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남침설의 ‘신화적 허구성’이 드러났다고 주장함으로써 남한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드러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이나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 합의는 북한이 <붉은 단풍잎>과 같이 남한과 미국을 규탄하는 영화를 더 이상 만들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1992년의 제작 중단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는 ‘제1차 북핵위기’가 발생한 1993년이 되면 다시 경색된다. 이 해에 북한은 <누가 조선전쟁을 일으켰는가>라는 책을 발간하여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북침을 주장한 것은 과거와 같지만 경색국면에 들어간 북미관계 및 남북관계를 상당 부분 투영하여, 미국의 전쟁 도발 뿐만 아니라 남한이 주도적으로 미국과 전쟁을 모의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남한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을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요컨대, <붉은 단풍잎>은 변화하는 북미관계 및 남북관계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면서, 역사에 대한 기억과 해석을 특유의 재현 방식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역사교양’이자, 냉전해체기 남한의 관객 대중을 의식한 북한식 메시지 표출 방식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남한 관객을 의식하는 북한영화우리는 흔히 북한영화를 북한 인민을 대상으로 한 프로파간다 매체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북한영화는 북한인민들에게 무엇보다 즐거운 오락거리로 기능하며, ‘인민성’ 높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북한영화인의 주요 사명의 하나이다. 냉전시기 가장 강력한 매체의 하나였던 영화가 국민 통합의 기능을 수행한 것은 남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북한영화는 잠재적 관객을 하나 더 상정한다. 바로 남한 관객 대중이다. 북한영화 특유의 선전 방식이나 표현 방식이 우리에게 낯설게 보일 때도 있지만, 전쟁영화, 첩보영화 등은 일반적 장르영화의 문법을 대체로 따르고 있으며, 매력적인 스파이 캐릭터 창출과 남한 사회에 대한 묘사 면에서는 007류의 서구 첩보영화나 <자유부인> 같은 1950년대의 남한영화를 참조, 혹은 모방한 흔적도 보인다. <붉은 단풍잎> 마지막부의 클라이맥스 장면, 정항명이 오제도가 쳐놓은 덫에서 빠져나와 전세계 언론 앞에서 전쟁 음모를 폭로하는 장면은 북한 인민보다는 남한 대중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가깝다. 이는 세계사적인 냉전 해체의 시대에 한반도에서는 오히려 냉전이 재정비, 재구조화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거의 무관하게 영화는 그 자체로 시대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역사적 사료의 성격을 띤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제4부에서 플롯을 연주하는 정항명
제7부에서 기자회견 중인 정항명
그런데 사실은 이 영화가 미국과 남한의 전쟁 공모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남침설을 정면 반박하고는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함정설을 포함한 남침유도설에 대한 명확한 부인은 아니라는 점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영화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남한과 미국이 전쟁을 모의하고 획책했다는 것이지, 그래서 실제로 남한과 미국이 북침을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전쟁 음모를 알게 된 북한이 선제공격을 했다는 것인지, 또는 북한이 선제공격을 하도록 남한과 미국이 유도했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민에 대한 프로파간다 내용과 실제로 북한정치가 움직이는 방향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인민들에게는 항상 “미제는 우리의 원수”라는 식의 냉전적 사고를 교육해온 북한이 실은 1970년대부터 북미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해 왔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실화임을 강조하면서도 나중에라도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사실과 미묘하게 다르게 처리하는 주도면밀함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북한영화를 이해하는 것은 북한사회가 그려내는 집단 감성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속에서 아주 뜻밖에도(!)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다. 같은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과 주장이 엇갈리는 서사의 전쟁 속에서,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에 대한 북한식 서사 구축의 한 편에는 원망과 비난 속에 아직도 사랑과 미련이 남아있는 이별한 이의 각별한 신경쓰임이 강하게 베어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