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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일본 조선대학교 강성은 님②> 김일성종합대학 통신 박사원에서 학위를 받다_홍종욱

작성자 홍종욱 BoardLang.text_date 2024.02.22 BoardLang.text_hits 3,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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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7월(통권 7호)

[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

 

 

<일본 조선대학교 강성은 님②> 김일성종합대학 통신 박사원에서 학위를 받다


 

홍종욱(근대사분과)

 
한역연 웹진 <역사랑> 창간 기획으로 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를 연재한다. 면담자 홍종욱은 연구과제 ‘북한 역사학의 성립과 전개’의 일환으로 재일 조선인 및 중국 조선족 역사학자에 대한 구술 조사를 벌였다. 구술은 북한 역사학에 초점을 맞추지만, 동아시아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삶과 학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 2018S1A5A8026779)

 

구술자: 강성은(康成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센터 연구고문)

면담자: 홍종욱(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장문석(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면담일: 2020.1.6. / 면담장소: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녹취: 류기현(서울대 국사학과), 이상현(히토쓰바시대학 언어사회연구과) / 정리: 홍종욱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조선대학교 교원으로 부임하다>


면담자: 고등학교 때까지는 유도만 하시다가 공부가 하고 싶어서 조선대학교 역사지리학부에 들어가셨다고 하셨는데요. 조대를 졸업하면 제가 잘은 모르지만 총련 일꾼, 뭐 이런 거를 하시는 게 되는 거죠? 물론 조대 교원도 광의의 총련 일꾼이겠습니다만, 그래도 좀 특별한데요. 선생님은 어떻게 대학 교원이 되셨나요?

구술자: 조선대학교는 기본적으로 총련의 활동가들을 양성하는 대학입니다. 대학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간부양성 기관이라는 성격이 강하죠. 그 중에서도 역사지리학부는 주로 조선학교에서 역사지리, 사회 과목을 가르칠 교원을 양성하는 학부입니다.

면담자: 조선학교가 전국에 많이 있으니까, 교사 양성이 필요하겠네요.

구술자: 정치경제학부는 총련과 조청의 지부나 본부, 흔히 우리는 그걸 기본조직이라고 하는데, 기본 조직 일꾼을 양성하는 학과죠.

면담자: 학부마다 조금 특색이랄까 성격이 다르군요.

구술자: 예. 그래 나도 교원 될 줄 대체로 알았고, 지역을 불문하고 지명만 받으면 어디라도 간다는 마음으로서 있었는데, 대학의 교원으로서 배치를 받았습니다. 그때 조선대학에 아직 연구원(대학원에 상당-면담자)이 없었습니다. 내가 졸업한 1년 후인 1974년부터 조선대학교에 연구원이 생겼어요. 내가 1년 늦었으면 연구원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었는데, 졸업하자마자 그대로 교단에 섰습니다. 4학년 동안 공부를 너무 안 했는데, 교단에 섰기 때문에 정말 힘들었습니다(웃음). 거기다가 4학년 부담임이고 사감이라, 사감 제도가 있었습니다. 기숙사 학생하고 같이 자고. 그런데 굉장히 즐거웠어요. 정말 즐거웠어요.

면담자: 유도도 하셨고 무서운 사감이셨겠군요, 좀 때리고.

구술자: 그렇게는 안 하고. 형님 된 입장에서 동생들 위해서...

면담자: 때리셨군요(웃음).

구술자: 아뇨. 학생들도 그런 마음이지요. 뭐 선생님보다도 선배 같은. 그때 사감실에 학생들 늘 드나들어요. 커피 그때 네스카페 큰 통 있죠? 3일이면 없어져요.

면담자: 학생들이 얻어먹으니까 그렇겠네요.

구술자: 밤에 늦게까지 있으니까 내가 공부할 시간이 없죠. 그래도 상당히 즐거웠습니다.

면담자: 69년 입학이시니, 졸업하고 바로면 73년도부터 조선대학교 교원이셨군요.

구술자: 그렇죠. 조선대학 연구원도 없었고 일본 대학원에도 다니지 못했고. 그러니까 뭐 완전히 독학입니다.

면담자: 선생님 처음으로 논문 쓰신 게, 제가 도서관 검색해 보니까 1979년에 《역사평론》에 조선의 농촌 노동력에 대해 쓰신 게 있던데요.

구술자: 그게 첫 논문이지요. 스물아홉 살.

면담자: 첫 논문을 아주 좋은 학술지에 실으셨네요. 독학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조선대학에 부임하신 게 70년대 초반인데, 일본 학계 그러니까 일본 조선연구소라든가 조선사연구회라든가 조선학회라든가 이런 데랑 관계가 좀 있으셨습니까?

구술자: 저는 조선사연구회 월례회에 빠짐없이 참가했어요.

면담자: 그러셨군요. 언제부터 참가하셨습니까?

구술자: 졸업해서 73년 4월에 대학 교원 배치 받았으니까, 대체로 그때부터. 박경식 선생하고 만난 것도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만났죠. 아주 인상적인데, 연구회에서 만나서 제가 인사를 했지요. “조선대학의 강성은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했는데, 갑자기 욕하시는 게요, “나를 감시하러 왔는가!”라고. 무슨 말인지 잘 몰랐죠. 연구회 마치면 대체로 식사 가지요. 식사 자리에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니까 상당히 너그럽게 대해주시고, 그 후로도 상당히 저를 좋게 봐 주셨습니다. 조대에서 아마 연구하는 게 힘들 건데 지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명심하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렸죠. 상당히 좋아해주셨습니다. 아까 이야기가 나온 그 처녀 논문도 박경식 선생의 강제연행의 문제지요. 식량 수탈의 문제를 더해서.

면담자: 네, 노동력 수탈 문제였죠.

구술자: 농촌에서 노동력 수탈정책에 모순이 있죠. 일본이나 도시로 노동력을 수탈하지만, 농촌 노동력도 일부 보장해야지요. 여성들이나 다른 보충 노동력을 쓴다든지. 그런 식으로 해서 식량 증산에 필요한 노동력하고 강제연행하는 노동력의 관계를 대상으로 한 연구입니다. 박경식 선생도 그 논문에 대해서 상당히 평가해주셨습니다. 잘 생각했다고. 그게 상당히 기뻤습니다.

면담자: 그 논문이 한국에도 소개가 됐죠?

구술자: 그것도 우스운 이야기인데, 한 몇 년 지나고 한국에서 일제시기 농촌 수탈 뭐뭐라는 논문집이 나왔어요. 거기에 내 논문하고 비슷한 논문 제목이 있어서 읽어보니까 내 논문입니다. 번역이 돼 있어요. 그런데 이름을 강성은이 아니고 강 아무개라고 바꾸어 적었어요.

면담자: 그게 무슨 표절이라기보다 그 논문을 소개하고 싶은데 선생님이 조선대학교에 계시고 하니 이름을 슬쩍 바꾼 게 아닐까요?

※ 康成銀, 「戦時下日本帝国主義の朝鮮農村労働力収奪政策」, 『歴史評論』 355, 1979.11. 구술에서 언급된 한국어 역은 강경구, 「전시하 일제의 농촌 노동력 수탈정책」, 최원규 엮음, 『日帝末期 파시즘과 韓國社會』, 청아출판사, 1988. (면담자).

구술자: 그래요, 어쨌든 논문을 번역해서 내준 거 자체는 뭐 반갑고 기쁜 일이고 고맙다는 생각하죠. 나중에 언제였던가, 연세대 방기중 선생하고 가나자와(金沢) 대학에서 하는 심포지움에서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그 때가 2007년이었습니다. 쓰루조노 유타카가 중심이 되어서 나도 발표를 하고 방기중 선생도 발표하셨는데, 마치고 방에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담배 좋아하시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저한테 미안하다, 사죄를 할 일이 있다고 해서, 무슨 이야기입니까라고 물으니, 실은 그 논문은 내가 번역해서 한 거인데, 이름을 강성은이라고 안 해 좀 미안하게 되었다고, 그때 어려운 시기라 조선대학교 교원 글을 낼 수 없었다고 하십니다. 처음으로 그 때 알았지요. 오히려 내가 뭐 고맙다고 했지요. 그 몇 년 있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그때 이틀, 삼일 정도 같이 이야기하고, 그 후도 일본 오시면 자주 만났는데, 참 성격이 좋고요. 유감하게 돌아가셨죠.

[사진 1] 강성은 님 첫 논문의 한국어 역이 실린 논문집. 해당 논문은 제1부 제3장에 ‘강경구’ 이름으로 실렸다. 제1부 제2장은 박경식 님 논문이다.

<조선사연구회에서 일본인 연구자와 어울리다>


면담자: 다시 조선사연구회 이야기로 돌아와서요. 대학 교원이 되셨지만 아직 20대시니까 한참 공부를 해야 되실 나이인데요. 조선사연구회가 많이 도움이 되셨겠네요.

구술자: 뭐 조선사연구회가 기본이었지요. 처음 참가했을 때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어요. 자기 수준이 정말 낮았습니다. 그러면서 교원 한다고 부끄러워서(웃음).

면담자: 조선사연구회는 간토부카이(關東部會)였을 텐데, 주로 어디서 열렸죠?

구술자: 그때는 신주쿠에 있는 조선장학회 회의실에서 했어요.

면담자: 그렇군요. 자주 오는 분들은 누구셨죠?

구술자: 다 젊은 세대지요. 그러니까 회장이 하타다 다카시(旗田巍) 선생이고, 중심은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 그리고 미야타 세쓰코(宮田節子) 등등 그 세대. 그 밑에가 대체로 박사과정으로서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가쓰야 겐이치(糟谷憲一), 요시다 미쓰오(吉田光男)...

면담자: 요시다 선생님이 제 지도교수입니다.

구술자: 아 그래요? 그리고 그 말석에 대체로 대학원생 석사, 박사 과정이 가지무라 히데키 밑에서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면담자: 간지카이(幹事會)죠. 선생님 간사는 하지 않으셨죠?

구술자: 간사는 못했습니다. 조선사연구회는 실은 재일동포하고 일본 연구자가 같이 만들었죠. 간사도 절반씩 했어요. 그런데 한 때 하다가 총련에서 그거 참가하지 말라 이렇게 됐어요.

면담자: 네, 그런 얘기 들은 적 있습니다.

구술자: 그건 뭐, 박경식 선생이나 이진희 선생이나 회고록에서 다 이야기하고 있고, 다 아는 사실이지요.

면담자: 일본 조선연구소 쪽은 관심이 없으셨습니까?

구술자: 그때는 아직 존재하고 있었는가?

면담자: 아직 있긴 있을 때거든요. 70년대 초반까지 그래도 활동이 있었는데...

구술자: 그렇죠. 기관지는 《조선연구》는 꼭꼭 읽었는데. 연구회 뭐 그런 것은 기억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때 조선사연구회도 그렇고, 조선학회나 이런 데가 있으면 반드시 갔습니다. 어쨌든 조선사연구회는 자주 갔어요. 다른 사업을 조정해서라도, 그거 놓치면 공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첫 북한 방문은 1979년 주체사상 국제 토론회 참가>


면담자: 물론 북한에 가신 적이 있으실 텐데요. 처음에 가신 게 언제쯤이신가요?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이런 걸로 가셨나요?

구술자: 우리 때는 수학여행으로서 가지는 못했고. 재일조선인이 공화국에 비교적 자유롭게 갈 수 있게 된 것은 72년부터입니다. 맨 처음에 가게 된 것이 도쿄 조고 축구부, 요코하마 초급부 음악 무용 소조, 처음으로 그때 갔죠. 그러다가 조대 학생도 졸업반(4학년생)이 되면 한 달 간 ‘조국 강습회’라고 수학여행 식으로 가게 되고, 조고 3학년도 수학여행으로서 조국에 가고, 이렇게 제도가 되었습니다. 아마 80년대 들어가서지요.

면담자: 조선학교 학생이 수학여행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것도 그렇게 정착이 된 거군요.

구술자: 제가 처음으로 공화국을 방문한 것은 1979년입니다. 그때, 〈주체사상 국제토론회〉라고 해서 세계적으로 주체사상 연구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일본에서는 누구였더라, 야스이 가오루(安井郁)입니다. 이 사람은 일본에서 원폭 반대운동의 리더였죠. 그 사람이 단장으로 되어서 일본 사람들 한 열 명 갔죠. 총련에서도 대표단이 가는데 저도 그 말석에 앉았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공화국 방문해서 굉장히 감동해서 많이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면담자: 평양까지는 어떻게 가셨나요?

구술자: 그때는 비행기죠. 아직 만경봉호가 안 나온 시기니까.

면담자: 70년대면 그래도 북한 사정이 그렇게 나쁠 때는 아니었다고 생각 되는데요. 일본이 워낙 잘 살 때니까 격차는 많이 있었겠습니다만.

구술자: 상상한 것보다도 경제적인 수준이랄까 그런 게 뒤떨어져서 좀 가벼운 쇼크가 좀 있었죠. 그때는 잘 몰랐지만, 90년대 중반에 식량난 되지요. 조국의 설명 같으면 냉전 붕괴 후 사회주의 진영하고의 무역, 바터(barter) 무역이 안 되게 되고 자연재해 때문이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역시 70년대 초부터 경제적인 답보 상태에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국제 공산주의운동 자체가 어려울 때 공화국도 예외가 아니었죠.

면담자: 미국의 경제 제재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기는 하죠.

구술자: 물론 그렇습니다만, 경제 제재는 60년대도 있었는데, 그걸 이겨낼 만한 내적인 힘이 왜 없어졌는가. 역시 정치가 좀 너무 좌경했기 때문입니다. 정치라는 게 역시 경제에다가 막강한 영향을 주는 게지요. 그때 7개년 계획을 3년간 연기시키고. 물론 국방력을 강화한다는 병진 노선은 있었지만, 국가 경제계획 자체가 상당히 어렵게 된 게지요. 지금은 경제계획은 안 하지요. 경제계획이라는 게 어려운 것 같아요.

 

<김일성종합대학 통신박사원에서 학사 학위를 받아>


면담자: 북한 역사학계와의 관계는 어떠셨습니까? 직접 평양을 가시거나 아니면 북쪽의 학자가 조선대학교를 방문한다거나, 그런 교류가 좀 있었습니까?

구술자: 김일성종합대학의 통신교육이라는 게 총련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언제부터냐 하면 80년 전후한 시기죠. 한 3년 정도 기회 있을 때 다니고 준박사, 그 위에가 박사. 지금은 학사, 박사라고 합니다. 조대 교원들이 거기서 학위를 받았고, 저도 관계해서 학사논문을...

면담자: 학사논문이라는 건 학부 졸업논문 아닙니까?

구술자: 준박사라고 할까요. 공화국은 학위, 학직을 국가가 줍니다, 대학이 주지 않아요. 공화국 학위, 학직입니다.

면담자: 그러니까 조선대학교를 졸업을 하셨지만 공화국의 학사 학위를 받으신 거군요. 준박사라 그럴까 통신 교육으로.

구술자: 내 학사 논문이 ‘19세기말 20세기 초 천도교 상층부의 활동과 그 성격’입니다.

면담자: 조선사연구회 논문집에 실으신 적이 있으시죠.

※康成銀, 「20世紀初頭における天道教上層部の活動とその性格」, 『朝鮮史研究会論文集』 24, 1987.3. (면담자)

구술자: 하나로 해서 학위, 학사 논문 받고 그걸 일본어로는 두 개로 갈려서 발표했지요. 천도교의 상층부는 《조선사연구회 논문집》에 3·1운동과 민족대표는 《조선학보》에.

면담자: 아까 이야기가 나온 1989년 《조선학보》에 실린 3·1운동과 민족대표 논문이 북한에 내신 준박사, 학사 논문의 일부이군요.

구술자: 공화국에서 학사 논문, 학위 받은 것은 86년입니다.

면담자: 통신교육이니까 가지는 않으셨겠네요.

구술자: 갔죠. 해마다 갔습니다. 그때는 여름 방학 동안에 주로 갔습니다. 85년이지요, 학사논문의 등교를 했습니다.

면담자: 등교. 일본에서 통신교육 과정에서 말하는 스쿨링(schooling)이네요

구술자: 네, 등교해서 지도를 받지요.

면담자: 지도교원이 누구셨습니까?

구술자: 김일성종합대학에 역사강좌장 하시던 최영식 선생. 조선왕조사를 하시고 역사학부장도 하신 분인데 돌아가셨죠.

면담자: 어떤 지도를 받으셨나요?

구술자: 공화국에서는 이런 연구는 거의 안 했고 못하기 때문에 공화국에서 할 수 없는 것을 조대 교원들이 해야 한다고, 조국에서 할 수 있는 걸 해봤자 뭘 하나 그러셨습니다. 그러니까 테마를 잘 선택했다고. 그래서 상당히 힘이 났습니다. 제가 갈 적에 일본의 조대 교원 속에서, 천도교 문제 같은 거 하면 공화국에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비판받는다는 충고를 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때 발상이 3·1운동 연구를 한다면, 예컨대 강덕상-박경식 논쟁이 3·1운동 때 민족대표가 어떻게 행동했는가 하는 걸 가지고 논쟁이죠, 헌데, 그때 민족 대표의 행동이라는 것은 사상의 하나의 발현이고 지난 시기 운동의 발현일 텐데, 그런데도 민족대표의 필두에 있는 천도교 열다섯 명, 그러니까 갑오농민전쟁 후 천도교, 동학 지도부가 어떻게 되었느냐는 논문이 거의 없었죠. 있다면 천도교 쪽에서 나온 거뿐이었죠. 3·1운동 민족대표를 연구한다면서 그 경위에 대해서 검토하지 않으면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발상은 그런 거였습니다. 그래서 천도교 공부를 했습니다. 종교, 그러니까 천도교 공부해서 뭘 하나 충고를 많이 받았어요, 독립운동사를 해야지 뭐 그런 식으로. 하지만 뭐 그래도 필요하니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이런 거 하는 게 좋다 저런 거 하는 게 좋다, 이런 식으로는 연구자로서는 실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테마를 가지고 공화국 등교할 기회가 있었는데 공화국에서 그걸 보고 그렇게 말씀해주니, 힘이 났습니다. 상당히 높이 평가해주셨어요.

면담자: 통신교육에 대해 조금 더 여쭙고 싶은데요, 정식 이름이 통신교육입니까?

구술자: 김일성종합대학 통신 박사원입니다. 통신 박사원이란 것은 해외에 있는 동포, 외국인 연구자들을 망라합니다. 그러니까 가령 예를 들면 연변대학 교원들 가운데 통신 박사원에 다녀서 학위를 받은 사람들 많이 있죠. 연변에 종합대학 학위 가지고 있는 사람 많아요. 또 미국인들도 있고 외국인들도 있죠. 그게 조선대학에 적용된 것이 80년 전후이지요. 그래서 제1호가 오규상이라고 재일조선인 관계 연구하는 분이죠. 지금 총련 중앙 산하에 있는 ‘재일조선인관계연구소’라는 데 부소장으로 아직 있죠. 조대 정경학부 학부장도 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 제2호가 주체사상 연구한 배진구.

면담자: 배진구는 어떤 분인가요?

구술자: 그 분도 조대 교원, 정경학부 학부장을 하고 총련 중앙에서 일하다가 지금 부의장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후 좀 늦게 내가 거기에 다녔죠.

면담자: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통신으로 수업을 하나요?

구술자: 수업보다도 주로 논문, 책들과 관련되어서 논의를 많이 하지요. 그러니까 처음에 가서 거기에서 의논해서 테마를 결정해서, 그래서 한 3년, 5년 정도 연구를 해서 논문을 하는 사람도 있고요. 저 경우는 거의 다 일본에서 논문을 대체로 만들어 가서, 일부 수정할 것은 좀 수정하고, 특히 우리말 수준이 좀 낮지요, 우리말 좀 고친다든지 그렇게 해서 저는 85년에 한 번 가서 내 논문을 써서 가져가서 의논을 해서 조금 지도를 받고 그 다음에 가서 학위 심사를 했습니다.

면담자: 처음 가신 게 85년이죠? 또 비행기로 가셨나요?

구술자: 85년 여름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때는 만경봉호가 자주 나오기 때문에, 만경봉호로서 다녔습니다.

면담자: 지도를 받을 때 형식은 어땠습니까, 지도 교수랑 만나서 얘기를 하는 건가요?

구술자: 그렇죠.

면담자: 통신 박사원 과정이면 숙소는 어떻게 되죠?

구술자: 호텔이지요. 주로 평양여관.

면담자: 오래 계시면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비용은 조대에서 대는 건가요?

구술자: 한 달 정도지요. 체류비는 5만 엔 내면 돼요. 3일이라도 5만 엔, 한 달이라도 5만 엔입니다(웃음).

면담자: 호텔도 국가 시설이니까 가능 하겠네요.

구술자: 여관도 좋고 식사도 맛있고. 지도 교원들이 여관까지 와 주던가, 아니면 우리가 종합대학에 가서 회의실에서 협의를 합니다. 그 동안에 구경도 좀 하고요.

 

<북한 사회과학원 소속 역사학자들과 교류>


면담자: 김일성대학 학생이라든가 대학원생에 해당하는 연구생이라든가 이런 사람들하고 좀 만나시거나 그럴 기회는 있었나요?

구술자: 그러니까 신청하면 여러 학자들을 만날 수 있죠. 종합대학은 교육적인 면이 강하지요. 그래 역사학이라는 것은 역시 사회과학원에 역사연구소니까. 근대사 실장이 리종현 선생, 그리고 원종규 선생. 리종현 선생은 《근대조선역사》 집필하신 분이지요. 그 분은 조선전쟁 때에 어느 고등학교 다니다가 의용군으로서 월북하셨어요.

면담자: 한국전쟁 때 남쪽에 있다가 북으로 가셨군요.

구술자: 인민군 서울 점령해서 후퇴할 때, 서울 어느 고등학교인데 리종현 선생 학급 전체가 의용군에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게 《로동신문》에 크게 보도가 되었다 해서 자랑하고 그러셨어요. 종합대학에서 공부하시고, 제가 갔을 때는 근대사 연구실에 실장을 하셨지요. 그 분도 50년대, 60년대에는 주로 1920년대 노동운동사를 전문으로 하신 분인데, 그 후 조금 연구가 어려운 상황이 됐죠. 그래도 그 분은 어떤 면에서 살아남았어요. 근대사 쪽으로 방향 전환을 한 게지요. 실력 역시 있지요.

면담자: 사회과학원 선생님들과 교류가 있으셨군요.

구술자: 그 후에도 80년대 말인가 90년대 초에 총련의 역사교과서를 쓴다고 해가지고 제가 담당자가 되었기 때문에, 대체로 한 10년 동안 매해 갔어요, 역사교과서 집필 때문에. 그때 사회과학원 동지들하고 흔히 자주 만났죠. 상당히 나도 사회과학원 연구소 한 성원 같은 분위기였죠. 이야기하는 속에 서로 친숙해지니까. 인생 경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요. 나도 느끼고 있는 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얘기하고, 대체로 의견이 일치됩니다.

[사진 2]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리종현 선생(왼쪽에서 2번째)과 원종규 선생(3번째)과 함께. 1994년 조국에서. (구술자 주)
 
면담자: 주로 어떤 선생님이신가요?

구술자: 허종호 선생님, 원종규 선생님. 그리고 조희승 압니까?

면담자: 저는 성함만 들었죠, 고대사 하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귀국하신 분이죠.

구술자: 조희승이가 조선대학교 내 1년 후배입니다.

면담자: 아, 그렇군요.

구술자: 그가 2학년 때고 내가 3학년 때에, 김일성 원수님 탄생 예순 돌 조선대학교 축하단으로 200명 집단 귀국했습니다. 그때 조선대학교 학생 수가 한 1,100명 정도였는데 200명이 지명되어서 귀국했습니다. 나는 지명 안 되었습니다. 지명 받았으면 귀국했겠죠. 조희승은 원래 공부를 좋아했는데, 공부한다면 역시 조국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이 있어서, 지명 받고 귀국해서 김일성종합대학 거쳐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 배치 받고, 김석형 선생의 후계자 같은 그런 분위기지요.

면담자: 김석형 선생님과 공저로 《초기조일관계사》를 집필하셨죠.

구술자: 그것도 내고, 원래 고구려사가 전문이죠. 그러니까 사회과학원 동지들하고는 자주 다니면서 식사도 늘 하고 상당히 가깝게 지냈습니다.

 

<박사논문 「을사오조약 연구」와 북일 평양선언 비판>


면담자: 86년에 학사 학위를 받으셨고, 그 다음에 박사도 하셨나요?

구술자: 박사는 2001년이었던가? 공화국의 박사논문 테마는 ‘을사오조약 연구’였습니다. 그걸 일본 말로 소시샤(創史社)라는 곳에서 냈죠. 그게 언제였던가, 2005년인가? 을사오조약 강제 조인 100주년을 목표로 했으니까. 1905년 한국보호조약과 식민지 지배 책임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역사학과 국제법학과의 대화라는 소제목으로. 그걸 한국에서 번역을 해줬습니다.

면담자: 동국대 한철호 선생님이 번역을 하셨죠.

구술자: 네, 한철호 선생이 번역했습니다. 그게 박사논문입니다.

※康成銀, 『1905年韓国保護条約と植民地支配責任―歴史学と国際法学との対話』, 創史社, 2005. 한국어 역은 강성은(한철호 역), 『1905년 한국보호조약과 식민지 지배책임 -역사학과 국제법학의 대화-』, 선인, 2008. (면담자)

면담자: 박사논문도 김일성종합대학에 제출하신 거죠?

구술자: 네. 일본글에는 평양선언 비판하는 내용을 넣었는데 통신박사원에서는 그거 쓰지 못했습니다. 일본에서 낸 책에는 을사오조약과 관련해서 조일 평양선언 이야기를 넣었죠.

면담자: 고이즈미 수상이 북한 갔을 때 나온 북일간의 평양선언 말씀이시죠?

구술자: 네, 2002년. 평양선언에 대해서 내 자체 생각을 일본 글로 썼습니다. 과거청산 제대로 안 되어 있다고 평양선언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종합대학의 박사논문으로는 그거 못 쓰니까 그건 뺐어요.

면담자: 당시 평양선언 내용을 놓고 이른바 ‘닛칸호시키(日韓方式)’이라는 비판이 있었죠. 명확한 배상 없이 이른바 경제협력으로 처리한 한국과 일본 방식의 재판이라고.

구술자: 그때 논의가 되었어요. 공화국에서는 이걸 과거청산, 실질적으로는 배상이라고 하고, 총련의 학자들 속에서도 실제로 배상이라고. 나는 이거 민족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총련 내에서도 절대 그렇지 않은 의견이 있다는 걸 보여야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평양선언은 김정일 동지의 서명이니까 비판할 수 없는 문건이지요. 근데 나는 굳이 비판하는 글을 썼어요. 모가지 뗄 줄 알고 각오해서. 지금 발언 안 하면, 남쪽도 못 했는데 북에서도 그거 못하면 민족적인 이익의 견지에서 볼 때 막심한 후과를 미친다고 썼죠. 정치적인 견해는 달리 하더라도 그 자체에 대해서 학술적인 비판은 있어야겠다고. 종합대학의 통신박사 논문에 그걸 반영하지는 못했지만, 내 나름대로 각오를 했는데, 그래도 이해를 해주고 모가지는 떼지 않았어요(웃음).

면담자: 선생님, 지금도 열심히 활동하시지만, 그 때 책 내신 직후에 한국에 오시기도 했고 학계에서 많이 주목을 받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계속)

[사진 3] 2001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한국병합≫의 역사학적・국제법학적재검토 국제학술회의. 오른쪽으로부터 이태진 선생, 운노 후쿠쥬 선생, 김봉진 선생, 하라다 다마키 선생, 본인. (구술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