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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영상으로 본 북한] 그 많던 상인들은 어디로 갔나?- 북한 ‘사회주의 상업’과 민간상인_이준희

작성자 이준희 BoardLang.text_date 2024.02.22 BoardLang.text_hits 3,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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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7월(통권 7호)

[기록과 영상으로 본 북한]

 

 

그 많던 상인들은 어디로 갔나?

 

- 북한 ‘사회주의 상업’과 민간상인


 

이준희(현대사분과)


 

지난 2월 종영한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배경은 휴전선 인근 사택마을이었다. 비무장지대에 불시착한 윤세리를 위해 리정혁은 장마당에서 그녀를 위한 물건을 구매했다. 과거 인민군과 장마당이 어색한 관계였음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 누구도 이 장면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이제 없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공식적으로 10일에 한 번 열리던 농민시장이 장마당으로 전환된 이후 북한 사회를 설명하는데 있어 시장(장마당)은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이는 북한 정부가 견지했던 국가 주도 상업체계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1950년대로의 회귀이기도 했다. 인민민주주의시기 국가와 민간이 공존했던 상업체계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북한 정부가 생각했던 ‘새로운 상업체계 만들기’ 과정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사진 1] 최근 방영된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중에서 ‘장마당’과 ‘백화점’ 등장 장면 (출처: tvN 「사랑의 불시착」 홈페이지(http://program.tving.com/tvn/cloy))

사회주의 상업


1946년 3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을 기점으로 ‘민주개혁’을 38선 이북지역에 실시하여 이전의 사회·경제적 구조를 비롯한 사회전반을 인민민주주의적 국가건설 방향성에 부합되도록 바꾸기 시작했다. ‘민주개혁’은 생산관계의 개혁과 함께 소비관계의 개혁도 실시하였다. 다만, 토지개혁과 같이 급진적 개혁조치를 단행하기 보다는 점진적 개조를 추진하면서 일제 강점기 구축된 유통망과 상업부분 운영을 견지하면서도 사회주의적(소련식) 상업체계의 수용을 추구하였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사회주의 상업’은 해방 직후 북한에서 ‘민주상업’, ‘민족상업’ 등의 표현으로 순화되어 각종 매체에 나타났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장악했던 상업유통망을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작동 시키는 상업유통체계 구축을 의미했다. 북한의 ‘민주상업’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소련의 NEP시기 상업정책을 의미했다. ‘사회주의 상업’이란 쏘베트상업이란 적던크던 자본가가없는 적던크던 투기업자가없는 상업이다 이 특수한종류의 상업은 력사에서 일찍이보지못하던것으로서 우리들 볼쉐위끼가 처음으로 쏘베트적발전의 조건하에서 실천하고있는 상업이다.”(주1)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업체계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상인을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새로운 상업의 체계를 구축하는 데 그 본질이 있었다. 북한 정부는 이러한 정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일제 강점기 상인들의 유통망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다른 한 편으로는 1946년 5월 북조선소비조합을 발족시켜 민간유통망과 국가유통망을 형성하여 상품유통의 이원화 더 나아가 국가유통망을 ‘민주상업’을 완성시키기 위한 기재로 성장 시키고자 했다.

 

인민시장과 농민시장의 개설


해방 초기 북한 정부의 상업정책이 이원화(국가, 민간) 되어 운영되면서 공식적으로 시장이 등장했다. 시장 개설의 목적은 국가상업망이 전체상업망을 충족시킬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민간상인을 이용하여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함이었다. 최소한의 인민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형성되어 있던 정기시장의 기능을 연속시키는 가운데 정부가 통제하는 ‘인민시장’(1947.1.)이 등장했고, 농민들이 잉여생산물을 물물교환 할 수 있게 ‘농민시장’(1950.3.)이 개설되었다. ‘인민시장’에는 일제 강점기 상인들이 연속되었고 다수의 노점상도 존재했다. ‘농민시장’은 농민 개인이 농산물, 고공품 등을 들고 나와 다른 농민들과 물물교환을 하는 장소로 존재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시장은 정기적으로 열렸으며, 정부의 통제 안에 있었다. 이 시장 옆에는 국가 유통망의 일부인 국영상점과 소비조합이 위치하면서 인민의 각종 소비처를 공식적인 시장 안에 가두고자 했다.

[사진 2] (출처: 「3월 5일부터 평양제1농민시장 개설」, <<로동신문>>, 1950년 3월 5일.)
 
상인들은 정부 정책의 빈틈을 이용하여 매점매석, 투기 등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고, 정부는 이러한 상인들을 ‘모리간상배’라며 적대시했다. 북한 정부는 자본주의의 잔해라고 평가하면서 상인들을 사회의 암적인 존재로 인식했던 것이다. 소규모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들도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평가받았는데, 이들은 개조의 대상이 되었으며 점차적으로 북한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계층이었다.

 

소비조합의 창설과 ‘민주상업’


북한 정부는 시장의 역할을 국가가 수행하고자 했다. 즉, ‘민주상업’의 실시였다. 1946년 5월 소비조합을 발족시키면서 이러한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다. 국가의 계획경제 속에서 합리적인 생산가격을 책정하고 객관적인 소비자가격이 확정되면 중간 유통망을 거쳐 가격이 왜곡되는 현상을 막을 수 있으며 공급-수요법칙에 의해 생성되는 시장 가격은 국가의 완전한 통제 속에 들어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영기업소에서 생산되는 소비재는 국영상점과 소비조합에 우선 분배하여 판매시켰다. 그러나 개인 상인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작은 기업과 중간 유통망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했으며, 도시를 벗어나 농촌에서 적극적으로 상업 활동을 전개하면서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국가상업망의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은 도시-농촌간 견고한 경제적 연계를 구축하는 데 있었다. 농촌의 생산물이 합리적인 가격으로 도시에 공급되고, 도시의 공산품은 농촌에 적절한 가격으로 공급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상인들이 개입되고, 국가의 낮은 생산성과 저급한 품질은 결과적으로 시장의 역할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는 데 그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9년 국가 유통망은 전체 상업 유통망의 50%를 선회하고 있었는데 이는 강력한 정책 추진에 따른 결과였다.

 

한국전쟁시기 민간상인의 반등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로 그간 구축했던 국가상업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도시의 국영백화점, 국영상점과 농촌의 소비조합은 유명무실한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다. 국가상업유통망의 붕괴는 민간상인에게는 호재였다. 전쟁으로 인한 인구이동은 상인의 출현과 상품확보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고, 소개된 주민들의 주거형태는 상인들의 성장을 촉진했다. 소비자를 기다리는 국가상업은 소비자를 찾아가는 민간상인과 경쟁이 되지 않았고, 남북을 오갈 수 있는 상인들의 상품유통 용이성도 국가상업에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북한 정부는 이러한 민간상인의 성장을 견제하면서도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었다. 정부의 역할을 그들이 대신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고, 주민들의 최소한의 생활권 보장을 위해서도 민간상인들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고 판단했다. 여전히 민간상인들은 최소한의 인민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였고, 이들은 이 점을 충분히 이용하면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국가상업과 민간상업의 경쟁과 개인상공업협동화의 완료


한국전쟁기 반등한 민간상인들의 유통망과 복구되고 있는 국가상업유통망은 상호 경쟁을 계속했다. 인민의 소비는 공식과 비공식을 오가며 이루어졌고, 상업 노동자와 상인들의 태도 차이는 이윤의 격차를 불러왔다. 여전히 민간상인은 소위 ‘찾아가는 서비스’와 양곡으로 대금을 받는 등 소비자에게 편의성을 제공하여 왕성한 상업활동을 계속했고, ‘기다리는’ 국가상업유통망 노동자들의 태도는 상반된 결과를 초래했다.

북한 정부는 민영사업 허가제, 판매품목 제한 등의 규제를 통한 민간상업의 성장을 억제시키면서 한편으로는 국가상업유통망 노동자들에게는 민간상인과 같이 변화하라는 요구를 주문했다. 제도적으로 민간상인들의 절대 수를 조절하고 그들의 상품유통망을 끊어 버렸다. 특히, 민간상인들은 양곡을 취급할 수 없게 되면서 급격히 위축되었다.

사실, 1955년 이후 농업협동화의 성과가 나타나면서 농촌에서는 농민들의 소비능력이 향상되었고 인민시장과 농민시장이 자연스럽게 활성화 되면서 ‘자본주의적’ 분위기를 억제할 필요성도 강조되었다. 농민들의 소비 욕구를 민간상인이 충족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상업이 직접 해소 시키면서 정부는 잉여자본의 선순환구조를 공고히 하고자했다.

민간상인들이 위축되자 정부는 빠르게 그 자리를 메워갔고, 전국에 소비조합과 국영상점은 날로 늘어갔다. 상업성은 양적성장과 함께 낮은 봉사성(서비스)을 제고하고자 모범사례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김옥심의 사례는 주체적인 상업노동자로서 선진화된 상업기술을 익혀 인민에게 봉사하는 데 있었다. 상업기술의 핵심은 깨끗한 상점, 친절한 봉사, 철저한 상품관리였는데 이는 민간상인들의 기본적인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말하자면 민간상인 따라잡기였다. 김옥심은 친절한 응대와 철저한 상품관리, ‘찾아가는 서비스’ 등을 몸소 실천하면서 농촌 소비조합 점원에서 평양 제1백화점 지배인까지 올라가면서 전국적인 상업노동자의 모범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해방 초기 북한 정부의 상업정책이 이원화(국가, 민간) 되어 운영되면서 공식적으로 시장이 등장했다. 시장 개설의 목적은 국가상업망이 전체상업망을 충족시킬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민간상인을 이용하여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함이었다. 최소한의 인민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형성되어 있던 정기시장의 기능을 연속시키는 가운데 정부가 통제하는 ‘인민시장’(1947.1.)이 등장했고, 농민들이 잉여생산물을 물물교환 할 수 있게 ‘농민시장’(1950.3.)이 개설되었다. ‘인민시장’에는 일제 강점기 상인들이 연속되었고 다수의 노점상도 존재했다. ‘농민시장’은 농민 개인이 농산물, 고공품 등을 들고 나와 다른 농민들과 물물교환을 하는 장소로 존재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시장은 정기적으로 열렸으며, 정부의 통제 안에 있었다. 이 시장 옆에는 국가 유통망의 일부인 국영상점과 소비조합이 위치하면서 인민의 각종 소비처를 공식적인 시장 안에 가두고자 했다.

[사진 3] 김옥심의 상품판매 모습(1958) (출처: 김태경, 「상업부문 문화 봉사성 제고에서 얻은 김 옥심 동무의 몇 가지 경험」, <<집단적 혁신을 위하여>>, 직업 동맹 출판사, 1958. 김옥심 사진.)
 
국가상업유통망의 확장은 민간상업이 북한 사회에서 존립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55년 이후 본격적으로 농업협동화가 가속화 되면서 기존의 민간상인들과 거래했던 중농과 부농들이 협동농장에 편입되어 버렸기 때문에 원자재 확보마저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민간상인들을 상품을 확보할 수 없음에 따라 점차 폐업 또는 상업을 그만두고 노동자로 전환되었다. 1958년 8월 개인상공업에 대한 사회주의적 개조가 공식적으로 완료되자 공식적으로 인민시장도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공식적인 민간상인이 없어진 도시의 시장을 국가상업유통망이 대체했다. 이제 공식적인 시장과 민간상인은 사라졌고 극소수의 민간상인들은 비공식의 세계에 남게 되었다.

1945년~1958년의 북한 상업의 역사는 국가상업이 민간상업을 압도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민간상업은 국가상업의 보조제로 때로는 대체제로 역할하면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 정부의 개조정책 심화되자 시장은 사라졌고 민간상인은 농촌에서 비공식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로써 북한 정부는 1958년 8월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상업’체계를 구축했지만 상인들은 여전히 사회 속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1990년대 이후 가속화 된 북한의 ‘시장화’를 체제 붕괴로 읽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주1)  민주상업사, <<쏘베트 상업과 쏘련에서의 시장>>, 민주상업사, 1949, 13~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