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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집권기 趙位寵 반란에 관한 연구_서희종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2 BoardLang.text_hits 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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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7월(통권 7호)

 

고려 무신집권기 趙位寵 반란에 관한 연구

 

(2017. 08.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서희종(중세1분과)


 

필자의 석사학위논문은 명종 4년(1174) 9월 서경과 양계지역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반란에서 조위총이 내세운 반란의 명분, 양계 주진군의 참여이유, 일련의 전개과정, 실패요인 등을 통해, 이 사건이 단순한 민란이 아니라 양계 주진군이 동원된 반무신난이었음을 밝혔다.

필자는 석사과정에 입학했을 당시 고려 후기 대외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관련 공부를 하면서 어떤 주제로 공부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 과정에서 석사 입학 때부터 동학들과 함께 <<고려사절요>>를 탐독하면서 무신집권기 시대사를 공부하던 중 양계지역에서 일어난 반란들의 양상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양계지역에서 일어난 반란들이 남도지역의 민란과는 다르게 양계 전체 혹은 북계와 동계가 각각 반란을 일으키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금이나 몽골로 민호와 영토를 귀부하는 양상이었다. 그 과정에서 조위총의 반란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며 반란의 명분, 양계 주진군의 참여, 금으로의 영토귀부 등에 주목하여 반란의 성격은 물론 무신집권기 초기 정치사에서 지니는 의미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선행연구에서는 조위총의 반란을 민란 혹은 군사정변으로 접근하였다. 즉 민란으로 보는 연구는 무신집권기 민란의 시초이고 대규모 민이 가담했다는 측면에서였고, 군사정변으로 보는 연구는 조위총이 의종에 충절을 바친 인물로 집권무신의 제거와 명종을 폐위하고 새 국왕을 옹립하고자 정변을 일으켰다는 측면에서 보았다. 하지만 선행연구들은 반란의 주체를 각각 민과 조위총에만 맞추어 주목한 나머지 조위총의 반란에 대한 전체적인 형상과 그 성격에 대해서는 충분히 검토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이에 필자는 반란의 지휘관인 조위총과 그의 명분, 양계 도령과 주진군이 반란에 가담한 이유 및 그 목적에 주목하여 조위총의 반란에 대한 전체적인 형상과 그 성격 그리고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림 1] <<고려사>> 권100, 열전13, 조위총. 조위총의 반란 명분과 양계 주진에 보낸 격문내용(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고려사)
 
조위총은 항오(行伍)에서 시작한 한미한 출신의 무신으로 의종 말에 서경유수에 보임된 인물이었다. 그는 명종 4년 9월에 서경에서 전 국왕 의종을 폐위하고 시해한 이의방과 정중부를 주살하고 의종의 국상문제를 명분으로 삼아 반란을 일으킨 뒤, 동북 양계 여러 성의 군대에 격문을 보내 양계 주진군을 동원하였다. 이때 격문에는 중방에서 북계 여러 성이 사납다는 이유로 이를 토벌하기 위한 군대가 출병했으니, 동북 양계 주진의 군사와 군마를 동원하여 서경에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북계의 연주(延州)를 제외한 절령 이북의 북계 40여 성과 동계 20여 성이 조위총에게 호응하였다. 조위총이 양계 주진군을 동원한 이유는 앞서 동계 화주(和州)에서 거병했던 김보당의 실패요인이 화주 이외의 동계 주진군을 동원하지 못했다는 점을 알고, 군사기반을 강화하여 반란을 성공시키기 위해서였다.

양계 도령과 주진군은 중앙으로부터 받은 군사적 위협, 지방관으로 파견된 무신들로 인한 양계지역의 혼란이 가중되어 증폭된 위기의식을 느껴 조위총의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중방에서 사나운 양계지역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가 이미 출병했다는 조위총의 격문으로 인해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음을 체감하였다. 그 와중에 명종 3년 김보당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부터 무신들이 지방관으로 파견되고 있어 양계지역의 혼란은 가중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양계 도령들은 중앙의 위협과 양계지역의 혼란을 무마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지휘하는 주진군을 매개로하여 자위의 차원에서 조위총에게 호응하였다. 즉 조위총과 양계 도령과 주진군은 중방의 집권무신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목적이 일치했기에 양계 도령과 주진군이 조위총의 반란에 가담한 것이다.

[그림 2] <<고려사>> 권99, 열전12, 현덕수. 안북도호도령 강우문 등 34성의 도령들이 북계를 북번으로 언급한 내용(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고려사)
 
또한 이들이 조위총에게 호응한 다른 이유로는 양계지역이 번(蕃)으로 인식된 측면도 있었다. 이는 인종 중·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무신란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중앙은 물론 양계 도령들이 스스로 양계를 번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명종 2년에“경인(庚寅) 이후로 북인(北人)들이 횡자(橫恣)하다”고 한 것이나, 조위총이 양계지역에 보낸 격문에서 “북계 여러 성이 모두 사나우니”라는 언급을 통해서, 양계 도령과 주진군은 변경이자 번으로 인식된 양계에서 거주하며 중앙으로부터 사납고 차별받는 것에 불만을 갖고 집단적으로 행동하여 조위총에게 가담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조위총의 반란에 양계 주진이 대거 참여하면서, 반란은 점차 확대되었다. 반란 초기인 명종 4년 9월부터 12월까지는 조위총과 양계 주진군이 절령을 중심으로 관군을 격퇴하고 개경을 공격하여 선전하였다. 명종 5년 정월부터 같은 해 6월까지는 이의방의 살해 및 의종의 국상문제가 해결되면서 조위총의 일부 목적이 성취되었으나, 조위총이 정중부의 건재와 그에 따른 항복을 거부하면서 양군의 대치가 장기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종 5년 6월에 연주(漣州)가 함락되자, 전세는 관군 측으로 기울게 되었다. 명종 5년 6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는 연주(漣州)의 함락으로 북계 주진의 이탈과 거듭된 패전으로 조위총이 서경에서 결사항전을 벌이면서 금에 북계 40여 성을 복속하는 조건으로 원군을 요청했다가, 금의 거부와 일부 반란세력의 반대로 실패하였고 결국 명종 6년 6월에 서경의 함락과 조위총의 죽음으로 반란은 끝을 맺었다.

[그림 3] <<고려사>> 권100, 열전13, 조위총. 조위총. 조위총이 금에 북계 40여 성을 귀부하고 원병을 요청한 내용(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고려사)
 
특히 조위총의 3차례나 되는 금으로의 영토내속시도는 불리해진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나 오히려 반란이 실패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위총의 뜻에 금이 거부했고 반란세력 모두가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의 경우 당시 남송과의 국제관계가 회복되는 상황이었고 이미 명종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했기 때문에 고려의 내부문제에 개입하지 않음과 동시에 안정된 국제관계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또 조위총의 금으로의 영토내속시도에 대해 반란세력 내에서 의견이 분분하였다. 조위총의 뜻에 동조한 부류는 반란이 진압된 이후 중앙의 처벌을 피하고자 한 것이며, 그렇지 않은 부류는 집권무신의 제거를 주요 목적으로 반란에 가담한 것이지 고려 왕조를 배반하면서까지 목적을 이루려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조위총이 불리해진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지만, 반란에 가담한 세력들이 분열되어 관군에 대거 투항하게 되면서 조위총 스스로가 자멸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조위총의 반란은 명종을 고려국왕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이의방과 정중부의 제거를 기치로 내건 정치적 사건이었다. 특히 조위총이 무신출신이면서 권력탈취를 목적으로 집권한 무신들과는 달리 비정상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집권자를 제거하고 전 왕의 국상문제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무신이 일으킨 반무신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필자의 논문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를 마친다. 본 논문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해결해야할 부분들이 많다. 가령 양계가 번으로 인식된 이유라든지, 조위총의 반란 이후 양계에서 여러 지역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킨 뒤 결과적으로 금이나 몽골로 영토를 귀부하는 양상 등이다. 이러한 부분들이 명확해진다면 무신집권기 양계지역에서 일어난 반란들의 양상과 그 의미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향후 연구에서 고민하고 해결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