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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삼일운동 ④] 3월 말 서울의 만세시위: ‘군중’_정병욱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2 BoardLang.text_hits 3,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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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8월(통권 8호) [낯선 삼일운동] 3월 말 서울의 만세시위: ‘군중’정병욱(근대사분과) 1919년 3월 26일 오후 3시쯤 종묘 앞에서 거지 한 명이 태극기를 들고 아이들 45명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그림 1> 거지와 아이들의 만세시위(1919.3.26)에 대한 『매일신보』의 보도(자료: 참고문헌 ①-1)
이 장면은 삼일운동의 저변이 얼마나 넓었는지 잘 보여준다. 독립은 사회의 가장 낮은 자도 바랬으며 식민지배의 부당함은 어른만 느끼는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사료가 말하는 바는 이것뿐일까? 왜 이 시위가 신문 기자의 눈에 띄었을까? 당시 자료에 나오는 거지들의 행진이나 아이들의 ‘만세놀이’로 볼 때(주1) 거지나 아이가 만세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이 시위에 어떤 ‘색다른’ 점이 있었던 것일까? 지난 호에 살펴본 3월 22일(토) 오전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봉래동 만세시위는 경찰과 군대가 폭력으로 진압했다. 그날 밤부터 27일(목)까지 서울에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를 보면 3월 22일부터 3월 27일까지 8건의 시위가 검색된다. 8건은 대체로 ‘시내 각지’의 소규모 시위를 묶어서 날짜 단위로 센 것이다. 따라서 개별 시위를 헤아리면 시위 수는 더 많아진다. 예를 들자면 3월 23일 시위로 ‘경성 시내 각지의 만세시위와 전차 투석’ 1건이 검색되나 그 세부 시위 장소를 보면 경성부만 20여 곳이 넘는다. 3월 26일도 ‘야간에 경성 시내 각지의 만세시위와 경찰서 및 전차에 대한 투석’ 1건이 검색되나 『매일신보』를 보면 이날 밤 경성부만 20곳 정도에서 시위가 일어났다(①-2). 또 이 시기 서울의 시위는 ‘시외’의 그것과 함께 봐야 한다.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기준으로 3월 22~27일 고양군에서 37건, 시흥군에서 8건의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은 ‘시외의 군중이 서로 호응하는 느낌’이라 했으며(② 제28회) 많아진 시위를 반영하여 ‘경성 시외’의 상황을 별도의 항목으로 다뤘다(③ 제25~29보). 대강이나마 전체상을 가늠하기 위해 <부표> 좌측에 「독립운동에 관한 건」의 해당 시기 시위를 정리하였다. 다시 서울 시내로 좁혀보자. 3월 22일부터 27일까지 시위의 첫 번째 특징은 시위 시간대가 밤이라는 점이다. 앞서 본 3월 22일 봉래동 시위를 제외하면 거의 밤에 일어났다. 물론 3월 24일 어의동보통학교·정동보통학교 졸업식, 3월 27일 만철경성관리국 직공 휴업과 같이 학교나 공장 등 일정한 장소를 점하며 자연히 조직을 갖춘 집단의 경우 낮에도 시위하였다. 그러나 이외의 조직 시위는 없었다. 27일 종로 십자로의 이봉하와 같이 1인 시위도 낮에 일어났다. 그러나 거리와 같은 열린 공간에서 다수가 참여하는 시위는 밤에 일어났다. 낮은 식민지 권력의 경계가 심했기 때문이다. 우선 서울 시내에 군대가 상시 주둔하였다.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타로의 일기를 보면 3월 1일 이후 경성에 변동은 있지만 대략 3개 중대가 주둔했고, 3월 22일 이후 시위가 격화되자 3월 28일에 3개 중대가 더 배치되었다.(주2) <그림 2>는 4월 1일 경성의 조선군 주둔 상황을 보여주는데, 총 여섯 명의 중대장이 배치된 것으로 볼 때 6개 중대가 주둔했음을 알 수 있다. 3월 서울 도심의 만세시위 추이를 살펴볼 때 <그림 2>만큼 촘촘하지 않아도 주요 지점에 군대가 상주하면서 경계 섰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림 2> 1919년 4월 1일 경성의 조선군 배치도_부분(자료: ④. 지도의 빨간색 네모와 동그라미가 소대와 분대의 주둔지이다. ‘Δ’가 중대장 소재지인데, 경성 시내에 4곳, 용산과 마포에 각 1곳이 표시되어 있다. 전체 지도는 ㉑, 31쪽 참조)
경찰의 경계와 감시도 강화되었다. 3월 1일 만세시위 직후부터 사찰반이 조직 운영되었으며(㉒, 320쪽), 3월 8~10일 전차 차장과 운전수의 파업이 있자 경찰은 11일 경관연습소생, 순사 등을 분승케 하여 ‘협박자’를 단속했다. 14일에 도로에 서 있는 조선인을 조사했으며, 경성 내 100명 이상 직공노동자가 있는 공장을 순찰했다. 15일부터는 검거반을 조직하여 동소문, 남산, 삼청동의 산지 및 조선인 마을을 뒤졌다(② 제15, 18, 19회). 대규모 시위나 공장 단위의 파업은 물론 거리에 서 있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이 틈을 비집고 3월 22일 봉래정에서 비공장 노동자의 시위가 터져 나왔고 군경은 총검을 휘둘렀다. 이에 군경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낮을 피해 어둠을 방패 삼아 밤 시위가 일어났던 것이다. 3월 26일 거지와 아이들의 만세시위가 색다른 점은 오후 3시 한낮이라는 시위 시간이었다. 3월 22~27일 만세시위의 두 번째 특징은 시위 참가자가 엘리트가 아니라 도시의 ‘기층 민중’이라는 점이다. 박찬승은 이 시기 시위를 참여자가 대부분 노동자나 상인층인 ‘민중시위’로 보았으며, 권보드래도 도시의 또 다른 시위 주체로서 ‘노동자’에 주목했다(⑲, 239쪽; ⑳, 355~383쪽) ‘민중’이나 ‘노동자’를 좀 더 들여다보자. 현재 열람할 수 있는 일제강점기 판결문 중 이 시기 만세시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확인되는 것은 11종이며 피고 121명의 정보가 담겨 있다. 여기에 다른 판결문에서 이 시기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되는 2명을 더하면 모두 123명이다(<부표>의 우측 참조). 123명은 시위 참가자 전체를 조망하기에 턱없이 모자라는 수지만(주3), 막연한 ‘다수’나 ‘군중’에 가려진 구체적인 시위자 모습에 다가갈 수 있는 귀중한 통로이다. <그림 3> 1919년 3월 22~27일 서울 시위 참가자(피고인)의 산업별 비중(자료: ⑤의 「제10 피고인의 직업」; ⑥, 72~83쪽; <부표>의 판결문)
<그림 3>은 3월 22~27일 서울 시위자(피고인) 123명의 직업을 산업별로 분류해서 1919년 말에 집계된 삼일운동 참가자(피고인) 및 조선인 전체의 그것과 비교해본 것이다. 이 집단이 얼마나 모집단과 다른지 한눈에 알 수 있다. 1919년 말 삼일운동 관련 피고인 전체와 비교해보면 3월 말 서울 시위 피고인 쪽이 공업, 상업·교통업, 기타 유업의 비중이 높으며 농업의 비중은 매우 낮았다. 당시 조선인 전체의 분포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더 커진다. 이는 시위 무대가 농촌이 아니라 도시로, 그 주된 산업인 상공업,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했음을 말해준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도시에 많이 분포하는 직업군인 공무·자유업(학생 포함)의 비중은 9%로, 전체 인구의 그것(2%)에 비해선 높지만 삼일운동 전체 피고인의 그것(18%)에 비해선 낮았다. 삼일운동 전체 피고인 중 공무·자유업의 비중이 높았던 것은 학생, 종교인, 교사와 같은 엘리트가 적극 참여하여 삼일운동 초반을 이끌었던 측면이 반영된 것이다. 이들이 공무·자유업 중에서 76%를 차지했다. 그러나 3월말 서울 시위에서 종교인은 전무했다. 신도도 거의 없었다. 판결문이나 신문조서에 종교 유무가 기록된 103명 중 94명, 90%가 ‘무종교’였다. 교사도 없었다. 그나마 학생이 5명 참여했지만 그 배경에 조직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3명(양주흡, 체신국 양성소 학생 2명)은 해당 시위의 단순 가담자로 보이며 2인(김공우, 고희준)만이 시위를 주동 또는 선동했다고 기록되었다. 3월 말 서울 시위에서 엘리트의 역할이 크지 않았다. 비중이 가장 컸던 공업(32%)을 보면 대부분 피고용자였다. 39명 중 직물, 연초, 신발 등의 직공이 36명이었다. 다음으로 비중이 컸던 상업·교통업(28%)의 경우도 유사했다. 직업명만으로 단정할 수 없지만 35명 중 마차부·인력거부·집배인·배달부(7명), 음식점·권번의 고용인(2명), 행상(3명), 소규모 자본으로 가능한 각종 상인(과자, 금붕어, 땔감, 연초 각 1명) 등 피고용자, 영세자영업자가 눈에 띈다. ‘기타 유업’의 비중도 모집단에 비해 높은데, ‘고인·용인’ 14명, 노동·인부·잡역 7명, 날품팔이 1명으로 도시 하층민의 대표적인 직업이다. ‘무업’은 ‘무직’과 ‘불상不祥’으로 구성되는데 3월 말 서울 시위자의 무업은 9명 전부 ‘무직’이었다. 이렇게 대강 헤아려 봐도 도시의 피고용인, 영세업자, 무직자가 83명, 전체의 67%였다. 나머지 사람들의 경제 사정도 이들과 큰 차이가 없었을 거다. 또 123명의 평균 나이는 28세였다. 삼일운동 피고인 전체의 나이 구간 통계를 보면 ‘20~29세’가 38%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30~39세’ 24%, ‘40~49세’와 ‘20세 미만’ 각 13% 순이었다. 123명의 나이 구간 통계를 내보면 ‘20~29세’ 46%, ‘30~39세’ 34%, ‘20세 미만’ 19%, ‘40~49세’ 4%로 전체에 비해 젊었다. 피고인으로 볼 때 3월 말 서울 시위 참가자는 도시의 가난하며 젊은 ‘기층 민중’이었다. 이런 층이 자발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대거 등장한 것은 처음이 아닐까. 그런데 3월 26일 종묘 앞 시위가 색다른 점은 ‘기층 민중’의 주력이라 할 수 없는 거지와 아이들‘만’의 시위였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한낮 기습 시위가 가능했을 것이다. 군경, 아니 누구도 밤마다 기층 민중의 시위가 격렬히 벌어지는 와중에 군경이 지키고 있는 대낮, 이들이 모여서 만세를 외치리라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한편 3월 말 서울 시위에서 체포된 피고인 중에는 주소가 경성이 아닌 자가 13명으로 전체 123명의 11%를 차지했다. 중심지 경성은 다른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이 왕래를 통해 만세시위가 퍼졌을 것이다. 다만 그 전파의 방향이 일방적이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하자. 경성부 임정(현재 중구 산림동)에 거주했던 최규륜(50세, 무직)은 『매일신보』를 통해 ‘지방에서 열심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 것을 알고 경성에서도 만세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23일 밤 종로 5가 오교 부근에서 만세를 불렀다. 또 주소는 경성부이지만 본적이 경기도나 다른 지역인 사람이 17명, 14%였다. 학업을 위해 모인 학생 4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일자리를 찾아 경성으로 왔을 것이다. 3월 22일 봉래정 만세시위의 주역 엄창근은 충북 면천이 본적이다. 3월 23일 전차에 투석한 유성옥(37세)은 경기도 여주가 본적이다. 이 둘이 언제 경성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직업은 둘 다 ‘노동’이었다. 강원 통천 출신으로 3월 22일 죽첨정 금화산 정상 만세시위에 참여한 변장성(21세), 충남 괴산 출신으로 3월 27일 창성동 경찰관연습소 앞 만세시위에 참여한 김종옥(30세)은 여전히 ‘무직’이었다. 3월 말 서울 시위의 세 번째 특징은 ‘군중’이라는 시위 방식이다. 보통 만세시위는 약속된 모일 모시 특정 장소에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 만세 삼창 등으로 독립 의지를 공유한 뒤 세를 과시하며 또는 세를 얻기 위해 행진한다. 3월 1일 서울 시위가 그랬다. 지역에 따라 식민지배 권력의 핵심인 관청이나 헌병·경찰기구로 나아가 독립 의사를 천명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농촌 시위가 이렇다.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주도자와 조직이 필요했다. 그런데 3월 말 대다수 서울 시위는 주도자도, 공개 행사도, 선언문도, 조직도 명단도 보이지 않는다. 특히 23일, 26일 집중적으로 이뤄진 전차 투석의 경우 우연히 모여 만세 부르고 투석하고 흩어졌다. 조선총독부 측은 그 주체를 ‘부화뇌동하는 군중’으로 보았다.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학자 귀스타브 르 봉 이래로 ‘군중’은 ‘두렵지만 열등한 무리’로 전염병처럼 다루어져 왔다. 나는 ‘군중’을 집단이 아니라 민중의 정치 행동이나 실천의 하나로 보고자 한다. 지배자의 억압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피지배자인 민중이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자신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표출하는 방식이다. <그림 4> 위_1919년 3월 23일 종로5가 부근에서 시위대의 전차 투석으로 유리창이 파괴된 전차 122호 검증도, 아래(3장)_1919년 3월 27일 시위대에 습격당한 재동파출소 검증 그림(자료: ⑦-3, 4~6, 82~83쪽. 검증도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테이터베이스의 해당 자료 ‘원문보기’를 통해 볼 수 있다. 빨간 표시는 투석으로 깨진 유리창이다)
피해를 최소화하는 핵심 전술은 바로 ‘익명성’이다. 예를 들어보자. <그림 4>의 위는 3월 23일 종로5가 부근에서 시위대의 전차 투석으로 유리창이 파괴된 전차 122호 검증 그림이다. 모두 10장의 유리창이 깨졌다. 이와 관련되어 체포된 자는 정필모(26세, 잡역 및 야채장수) 1명이었다. 정필모는 돌을 두 번 정도 던지는 것이 부근에 있던 일본인 순사의 눈에 띄어 붙잡혔다. 두루마기를 입고 모자를 써서 순사가 기억하기 쉬웠을 거다. 겨우 두 번의 돌로 저렇게 유리창 10장을 깰 수는 없다. 던진다고 다 명중하는 것도 아니고 명중한다고 다 깨지는 것도 아니다. 유리창을 깼던 사람들, 그 수많은 전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부근에 있던 순사들은 눈 뜨고도 그들을 누구라 특정할 수 없었다. 3월 23일 밤에 투석으로 전차 20대가 파손되고 그 유리창 103장이 깨졌다. 관련하여 105명이 검거되었다. 그중 검경의 조사를 받은 70명의 사건기록을 보면, 피의자는 대부분 만세는 불렀지만 투석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판결문을 보면 결국 9명만 명확히 투석 건으로 기소됐는데 그나마 4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도시의 밤을 무대로 한 익명의 시위에서 누구를 붙잡아 행위를 입증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림 4>의 아래는 3월 27일 밤 100여 명이 참여한 재동파출소 습격 및 투석 사건의 검증 그림이다. 팔판동에서 시작된 제등 행렬, 준비된 구한국기, 동과 서로 나누어 파출소 협공 등으로 볼 때 3월 말 서울 시위 중 가장 짜임새가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하여 3명이 현장에서 붙잡혀 기소되었는데 2명은 징역 6개월, 1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주범은 잡지 못했다는 소리다. 피의자 중 박계갑(17세, 양말제조직공)은 주동자 2명의 이름과 사는 동네를 말했으나 경찰은 잡지 못한 것 같다. 2명이 기소된 기록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정확한 정보였을까, 아니면 시위 후 죽은 사람일까. 대부분이 만세를 부를 때 곁에 있던 자는 모르는 사람이라 진술했고, 그렇게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도시이고 밤이었다.(주4) 이렇게 보면 3월 26일 한낮 거지와 아이들의 시위가 얼마나 색다른 것인지 명확해진다. 밤에 시위를 벌였다면 익명은 가능했겠지만 전혀 주목받지 못했을 거다. 거꾸로 대낮에 보란 듯이 시위를 일으켰다. 사회의 가장 약자라는 그들의 지위, 그들을 지켜보는 시민의 눈이 밤을 대신하는 방패였다. 군경이 대놓고 폭력 진압하기도 곤혹스러웠을 거다. 그랬다간 지배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다. 신문에는 경관이 “가서 제지”했다고 쓰여 있다. 기록으로 남기기에도 민망했던가, 일본 군경의 기록 어디에도 이 사건은 나오지 않는다. ‘색다름’으로 그 이면 - 일제 군경의 폭력 진압, 이에 맞선 기층 민중의 격렬한 밤 시위 – 을 도드라지게 한 저항의 장인에게 경의를 표한다. 익명성에 기대어 피해를 최소화하는 ‘군중’이란 시위가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까. 조선총독부 측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28일 경성에 3개 중대가 증파되어 주둔했다. 경찰은 일본인 날품팔이, 건달을 동원하여 한복을 입히고 밤에 조선인을 죽이게 했다. 물론 일본 측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윤치호는 3월 26일 자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일본당국은 갈고리와 곤봉, 칼 등으로 무장한 일본인 날품팔이들이 ‘만세’를 외치는 군중을 공격하게 만드는 저열하고 무자비한 방법을 채택했다. 당국은 경찰, 헌병, 군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왜 이렇게 야비한 방법을 쓰는 것일까?”(⑧, 287쪽) 양주흡은 3월 27일 자 일기에 “재동에서 만세를 부른 후 해산된 뒤 회사에 출근하던 세 사람이 가혹한 순사에게 칼을 맞아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3월 28일 자에 “오늘 밤부터 순사가 엄중히 단속하는 한편 건달들이 한복을 입고서 구타를 하므로 우리 동포 중에 외출하는 사람이 적어졌다.” 3월 29일 자에 “교동에서 오늘 밤 일본인이 살인극을 벌었다”고 썼다(⑦-1, 232쪽) 재동의 조선인 사망에 대해 경찰은 “폭민 2명이 도주하다 부상 후 사망했으며, 그 사망은 폭민의 투석에 의한 것”이라 했다(③ 제29보). 사찰 경찰은 “경관이 곤봉으로써 [진압]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수레꾼 등이 결사대로 고용되어 철물상에서 많은 단도를 구입하였다”는 ‘유언비어’를 전하며 “모든 철물상 및 철물 행상을 취조했으나 이와 같은 사실은 없다” 했다(② 제37회).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이제 시민은 밤거리에 나설 수 없게 되었다. 일제는 군대와 테러로써 겨우 도시 기층 민중의 밤 시위를 멈췄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도시 기층 민중의 ‘군중’ 시위는 남긴 족적에 비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4.19 운동 때도 희생된 사망자 156명 중 가장 많은 수는 하층 노동자 61명이었고 무직자 33명을 합치면 절반이 넘었다(⑱, 44~45쪽). 1979년 부마항쟁 때도 시작은 학생이 하였으나 끝까지 투쟁한 자는 빈민, 노동자, 실업자와 같은 도시 하층민이었다(⑮, 414~447쪽). 1980년 5.18 광주항쟁 때 광주지방검찰청이 확인한 항쟁 측 사망자 162명 중 노동자가 35명으로 가장 많은 수였다. 그들은 대부분 일용직이었으며 여기에 점원 행상 등의 서비스직 11명, 생활이 열악한 ‘무직’ 23명과 ‘불명’ 17명을 합치면 86명으로 절반이 넘는다(⑯, 422쪽).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없던 식민지와 독재의 시절, ‘군중’ 시위의 역할은 컸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있는 지금, 혹시 ‘군중’의 그들이 소외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자. 물론 ‘군중’이란 시위를 너무 낭만화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빛나는 면만 있는 건 아니다. 1919년 “3월 23일 고양군 연희면 합정리에 약 30명의 사람이 집합하여 중국인 거주 가옥 2, 3호를 파괴”하였다(③ 제25보) 당시 강원도 통천에서도 중국인 상점이 피해를 보았다(⑨, 574쪽) 이는 1931년 7월 반중국인 폭동을 떠올리게 한다. 1931년에도 주역은 도시의 기층 민중, 시위 형태는 ‘군중’이었다(⑰) 삼일운동과 반중국인 폭동을 비교하면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양자는 민족주의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약자로서 강자에게 정의, 인도, 평화를 요구한다면 자기와 비슷한 또는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똑같이 정의, 인도, 평화로써 대하는 것이 상식이다. 민족 내부의 강자와 약자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대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를 댄다면 그것은 거꾸로 자신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민족주의는 상식이 통하지 않게 하는 구분과 배제의 힘이 있다. 삼일운동이 던진 과제는 깊고 커서 ‘민족주의’만으로 풀 수 없다. 3월 말 서울 시위의 주역, 도시의 기층 민중이 전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드물다. 기록은 지배자와 엘리트 편이다. ‘사막에서 찾은 바늘’ 몇 가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겠다.(주5) 장성환(19세, 이명 장점룡, 대금업)은 23일 오후 8시경 종로 4, 5가에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7개월 전 1918년 8월 28일 종로소학교 쌀 염매소에서 일어난 ‘쌀 폭동’에 앞장섰다가 태형 90대의 처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삼일운동의 배경으로 쌀값 상승, 쌀 폭동을 언급할 때 나오는 사건이지만(⑭, 123~124쪽; ⑳,187~188쪽) 동일인이 양쪽에 다 참여한 사실은 처음 알았다. 기존에 이용되지 않던 관련 판결문(⑩)을 읽어보니 쌀 폭동의 민족적 맥락이 더 잘 이해되었다. 일본인 150~160명과 조선인 600~700명이 구매하러 모이자, 염매소 측은 양자를 나누어서 각각 판매했고, 일본인 전부와 조선인 절반에게 팔자 미곡이 바닥났다. 사지 못한 조선인에게 불만이 없겠는가. 장성환의 직업은 그사이에 ‘무직’에 ‘대금업’으로 바뀌었다. 3월 23일 그는 돈을 받으러 가는 길에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했다. 위의 쌀 폭동에 참가하여 벌금 30원을 물었던 김수한(1919년 18세)도 학생이 주도한 3월 1일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검사의 신문까지 받고 풀려났던 것 같다. 그 사이 김수한의 직업은 인천상업학교 학생에서 모범매약상 점원으로 바뀌었다. 검사의 신문조서를 읽어보니 그가 퇴학하지 않고 계속 학교에 다녔다면 처벌을 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⑦-2, 173~175쪽). 박귀돌(27세, 동아연초회사 직공)은 3월 26일 오후 8시 30분경 종교宗橋파출소(현재 내수동 16번지 부근) 앞에서 군중을 지휘하여 만세를 부르고 파출소에 투석했으며 그곳 순사보에게 독립만세를 외치라 협박하여 징역 5년형을 받았다. 1920년 칙령 제120호로 형기가 반감되었다. 1923년 7월 그는 다시 매일신보에 등장했다. 음독자살을 시도한 실연 청년으로(①-5). 독립도 사랑도 쉽지 않았다. 황인수(20세, 신발직공)는 3월 23일 밤 종로3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불복하고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기각되었다. 그의 상고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올해 3월 1일 조선독립선언서 배포 이후 조선 내외에 거주하는 조선 민족을 비롯하여 조선에서 정신이 있는 자는 남과 여, 노인과 어린이를 막론하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얻기 위해 만세를 불렀다. 민족자결의 시대를 맞이한 지금 이것이 인도(人道)이고 정의임은 세계가 모두 아는 바이다. 자국과 자신을 위해 안전한 권리를 보존하려는 형세는 물이 낮은 데로 흘러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런즉 올해 3월 23일 밤 본인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것 역시 자국 자신을 위해 찬성, 환영한 의미일 뿐이다. 그날 밤 현장에서 붙잡힌 뒤로 수개월 동안 많고도 큰 고통을 받았고 또 유죄 판결로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약함으로 강함을 대적할 수 없으니 육신은 고통을 받았으나 심신은 속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부당한 법률을 행하는 것은 세계 모두가 알고 있는 정의를 귀국이 모르는 것이고, 세계가 평화에 힘쓰는 주의(主義)를 귀국이 망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 한다면 동양의 대표, 동양의 선진이란 명성은 사라질 것이다. 부당한 법률을 사용하지 말고 세계의 통의通義와 귀국의 숙명을 신중히 스스로 지키기 바란다(⑪). <그림 5> 1919년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황인수(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_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기층 민중의 삼일운동 사건기록이나 판결문을 보면 ‘남이 시켜서’ ‘모르고’ 등의 이유를 대면서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수동성, 무지, 돌연 순응은 압도적으로 불리한 권력관계에서 민중이 생존을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경우가 많다. 염상섭의 만세전에 나오는 ‘갓 장수’처럼 말이다. 자발적 몰주체성, 능동적 수동성, 의도적 무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끔 상황과 개인에 따라 황인수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황인수의 이후 행적도 흥미롭다. 1929년 9월 그는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장물 방매 혐의로 징역 8개월, 벌금 30원을 선고받았다. 1941년 중국 한구漢口에서 운전수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1956년 고향 충남 청양군 화성면 면의회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와 당선되었다(⑫, 98쪽; ⑬, 180쪽) 장성환, 박귀돌, 황인수……이들이 바랐던 독립은 어떤 것이었을까? 주1) 거지들의 행진은 F. W. Schofield, 1919.6.1 「Japan's Reign of Terror in Korea(A Trip Thro' A Terrorized District)」, 아이들의 ‘만세놀이’는 매티 윌콕스 노블 지음, 강선미 이양준 옮김 2010 『노블일지 1892-1934』 이마고 233쪽; 참고문헌 ② 제19회(3.15), 제42회(4.7). <그림 1>의 기사 뒷부분에도 3월 27일 아이들의 ‘만세놀이’를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①-1. 1919.3.28 「先頭는 乞人, 群衆은 兒童: 색다른 소요자」 『每日申報』 3면 -2. 1919.3.28 「京城附近 又復騷擾, 이십 육일 밤에 이십여처 소요」 『매일신보』 3면 -3. 1919.4.15 「電車를 停留시키고 승객을 끌어내리어」 『매일신보』 3면 -4. 1919.4.30 「騷擾煽動者 懲役五年, 동아연초직공」 『매일신보』 3면 -5. 1923.7.26 「失戀靑年飮毒, 생명이 위독」 『每日申報』 3면 ② 京畿道警務部 1919 「査察彙報」 제5회(3.2)~ 제42회(4.7) ③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1919 「독립운동에 관한 건獨立運動ニ關スル件」 제25보(3.24)~제29보(3.28) ④ 朝鮮軍參謀部(→ 陸軍省) 1919.4.7 「4月 1日ニ於ケル配備」 日本陸軍省 『朝鮮騒擾事件関係書類 7』 ⑤ 朝鮮總督府法務 1920.1 「妄動事件處分表」 ⑥ 朝鮮總督府 1920 『朝鮮總督府統計年報(1919년도판)』, 朝鮮總督府 ⑦-1. 국사편찬위원회 편 1990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13』 國史編纂委員會 -2. _______________ 1991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14』 國史編纂委員會 -3. _______________ 1996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27』 國史編纂委員會 ⑧ 국사편찬위원회 편, 박정신 이민원 박미경 번역 2015 『(국역) 윤치호 영문일기 6』 국사편찬위원회 ⑨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1971 『독립운동사자료집 6』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⑩ 경성지방법원 1918.10.3 「判決(崔導絃 등 28인)」 ⑪ 고등법원형사부 1919.9.20 「大正8年刑上第742號 判決書(李鐘遠 등 19인)」 ⑫ 白川秀南 編 1941 『在支半島人名錄 第二版 記念號』 白川洋行 ⑬ 李寬鎭 李永斗 共編 1956 『地方議員名鑑(4289年版)』 中央通信社 ⑭ 이정은 2009 『3·1 독립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 국학자료원 ⑮ 김원 2011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현실문화 ⑯ 서중석 2013 『한국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⑰ 정병욱 2015.1 「식민지 조선의 반중국인 폭동과 도시 하층민」 『역사와 담론』 73 _____ 2019.5 「1931년 식민지 조선 반중국인 폭동의 학살 현장 검토」 『史叢』 97 ⑱ 오제연 2016 「4·19혁명 전후 도시빈민」 『한국현대생활문화사 1960년대:근대화와 군대화』 창비 ⑲ 박찬승 2019 『1919: 대한민국의 첫 번째 봄』 다산북스 ⑳ 권보드래 2019 『3월 1일의 밤: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돌베개 ㉑ 이송순 2019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로 보는 1919, 그날의 기록: 제2권 서울|경기도|충청도)』 국사편찬위원회 ㉒ 이양희 2019 「조선총독부의 3·1운동 탄압책과 피해현황」 백년만의 귀환: 3·1운동시위의 기록』, 국사편찬위원회 * 각주에 나오는 문헌은 생략함.
<부표> 1919년 3월 22~27일 서울 시위 상황과 관련 피고인 판결문(자료: ③; 국가기록원 ‘독립운동판결문’ . 이름으로 검색하면 해당 판결문을 찾을 수 있다. 판결문의 밑줄 그은 부분은 ⑦-3 등에 사건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