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기획연재
[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②] 오빠들이 떠난 자리 : 임택재와 임순득 남매_정종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2 BoardLang.text_hits 3,857 |
|
웹진 '역사랑' 2020년 8월(통권 8호) [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 오빠들이 떠난 자리 : 임택재와 임순득 남매정종현(인하대 한국어문학과 부교수) 「우리 오빠와 화로」 혹은 사회주의의 젠더적 위계조선희의 『세 여자』(주1)는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등 격랑의 20세기를 살아낸 여성 사회주의자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은 남성 중심의 젠더 서사처럼 느껴지는 한국 사회주의운동사에 새로운 감각을 제공했다. 1950년대 연안파 몰락을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종결로 본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박헌영·김단야·임원근 등 남성 트로이카의 위성이 아니라 스스로 빛나는 별이었던 그녀들의 삶을 되살린 것만으로도 고평해 마땅한 작품이다. 여성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존재들이었을까? 근대 한국에서 그녀들은 ‘로자 룩셈부르크’로 불리며 신성화되거나, ‘꼴론타이’의 후예로 성애화되었던 양가적 성(‘聖/性’)의 대상이었다. 이를테면, 조명희의 「낙동강」에서 박성운의 유지를 쫓아 혁명의 길에 나서는 여주인공은 이름 대신 ‘로사’로 호명되며, 이광수의 「혁명가의 아내」에서 ‘공산(孔産)’의 처 방정희(方貞姬)는 조선판 꼴론타이이자 ‘희대의 요부’로 그려진다. 이 성(聖/性)녀들은 일종의 거울상이다. 꼴론타이를 악의적으로 오독한 이광수에 비할 바 아니지만, 「낙동강」의 ‘로사’도 여성 사회주의자에 대한 타자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낙동강」은 백정에 대한 농민 계층의 오랜 멸시를 넘어서 조선이 ‘민족됨’을 이루는 순간을 형상화한다. 이 과정에서 ‘백정의 딸’ ‘로사’는 신분적 굴레와 여성을 옭죈 봉건 윤리의 억압을 깨고 투쟁하는 주체로 거듭난다. 허나 로사의 각성은 죽음으로 완성된 신성한 혁명가인 박성운과의 관계 속에 배치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는 남성/여성 사회주의자의 권력 관계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참조가 되는 시다. 인쇄공장 노동자인 청년(오빠)은 남겨질 누이(화자)와 어린 남동생을 걱정하며 ‘외로운 담배연기’를 뿜으며 번민한다. 하지만 그는 노동자 계급을 위한 “위대한 결정과 성스런 각오”로 행동에 나서고 “거치른 구두소리”와 함께 끌려간다. 화자인 누이동생은 이러한 사연을 회상하며 오빠와 그의 동지들처럼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내겠다는 각오를 전하고 있다. 이 단편서사시가 그려내는 여성노동자의 주체화의 과정은 감동적이다. 하지만 그 각성은 대자적 존재인 오빠와 그의 동지들인 청년들에 의한 것으로 설정된다는 점에서 보면 의존적이다. 여성 주체의 각성은 남성 지도자의 영향 아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오빠와 화로」는 ‘전위-대중’의 관계를 ‘오빠(남편/남친)-누이(아내/여친)’의 젠더적 관계로 자연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때 투쟁 중에 죽었거나 감옥에 갇힌 존재들인 오빠는 윤리적 판단 너머에 있다. 나경석과 나혜석, 최승일과 최승희, 이관술과 이순금, 그리고 1970년대의 전태일과 전순옥에 이르기까지, 현실 속에서도 「우리 오빠와 화로」와 유사한 ‘오빠-여동생’ 유형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오빠의 빛에 가려 희미한 흔적만을 남긴 이도 있지만, 드라마틱한 삶으로 오빠의 존재를 지워버린 누이들도 있다. 현실의 여러 사례들 중에서 여기서는 전향의 괴로움 속에 죽어간 임택재와 오빠가 떠난 자리에서 신념을 이어간 임순득 남매의 사연을 살펴보려 한다.(주2) 사회주의 활동가 임택재(任澤宰)와 전향시인 임사명(任史冥)임택재(1912-1939)와 임순득 남매의 본적은 전북 고창군 고창면 월곡리 276번지이다. 아버지 임명호(任命鎬, 1878-1950)와 어머니 전주 이씨(1877-?) 사이의 2남 3녀 중 각각 2남과 막내로 태어났다. 임택재의 신문조서 공술에 따르면, 임명호는 전라북도의 ‘군속(郡屬)’으로 근무하기도 했고, 1934년 시점에 재산은 5,000원 가량이었으며 빚은 없었다.(주3) 임명호의 가정은 임순재 임택재 형제와 막내 딸 임순득을 서울과 일본에 유학보낼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 임택재는 공립고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4월에 고창고보에 진학했다. 1925년 4월에 중앙고보로 전학했다가 1926년 1월에 다시 고창고보 2학년으로 재입학했다. 고창고보의 학적부에 따르면, 그는 문예부 활동에 열심이었고 성적도 학급에서 2∼3등을 했던 수재였다. 고창(고보)이라는 지역의 분위기가 머리 좋고 감수성 예민한 소년 임택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는 몇 편 남아 있지 않은 그의 시편 중에서도, 특히 「고향」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시 「고향」에서 임택재는 ‘높이 빼여난 半登山’을 “의적 碧梧의 전설, 젊은 의병 朴包大의 혼이 서식하는 산”(주4)이라고 노래했다. ‘방등산’, ‘방장산’으로도 불리는 ‘반등산’은 지리산,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3대 영산으로 이름 높은 산이다. 벽오는 백제 유민 출신의 의적으로 반등산 벽오봉에 그 이름이 붙을 정도로 유명한 지역 전승의 주인공이다. 의병 박포대는 구한말에 활동한 의병장으로 이른바 ‘남한대토벌’ 때 일본군에 잡혀 처형된 이 지역의 민간 영웅이었다. 갑오농민전쟁과 의병전쟁 희생자의 후예들인 고창 주민들이 군민대회를 통해 세운 학교가 ‘고창고보’였다. 평안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견주어 “북 오산, 남 고창”이라고 부를 만큼 고창 사람들은 이 학교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소년 임택재는 망국민의 영웅인 벽오와 박포대의 전설이 깃든 반등산 기슭에서 “이 땅의 잃은 세기를 되찾으려”(주5)는 꿈을 키우며 자랐다. 1929년 3월에 고창고보를 졸업한 임택재는 4월에 일본의 야마구치(山口)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야마구치 고교 입학 후 임택재는 “메마른 삶과 가난한 경치”의 고향 사람들에게 “성대한 만찬을” 주기 위한 투쟁의 삶에 뛰어든다. 1931년 귀향하는 길에 금산군 예수교 성결교회의 설교를 방해한 죄로 검거되었다가 풀려나는가 하면, 1932년 1월에는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 오노다 시멘트 분회 명의로 반일 격문을 뿌렸고, 3월에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5월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때 검거된 이력 때문에 야마구치 고교에서 제적당한다. 귀향한 임택재는 경성제국대학 진학 준비를 위해 서울로 가서 1932년 10월경 이관술의 집에서 하숙하며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 1933년 1월에는 적색독서회 조직혐의로 종로서에 구속되어 취조를 받고 석방되지만, 다음날 다시 동대문경찰서에 구속되어 和田獻仁 등의 반제동맹사건으로 조사받는다. 1934년 3월에 이재유 그룹과의 관련 때문에 검거되어 1935년 12월 20일이 되어서야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2년여의 미결수 생활을 끝낼 수 있었다. 석방 보름 전인 1935년 12월 6일, 그는 담당판사 야마시타 히데키(山下秀樹)에게 「진정서」를 제출한다. “생이 하나의 본연의 자세인 것처럼 효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하나의 본연의 자세”라며 늙은 부모와의 애달픈 사연을 적은 후에, “‘이상’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겉모습을 가지고 저를 고혹시킨, 저 빵의 권리의 주장이 이제는 저의 앞에 단지 잔해로만 가로 놓여 있는 것을 봅니다. 저의 사색에서 지금이야말로 사적유물론의 붕괴를 느낍니다”(6)며 전향했다. “심장을 도려내어 이 종이에 싸서 드리고도 싶습니다”라는 그의 절절한 호소가 통했는지, 야마시타 판사는 임택재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여 부모에게 돌려보냈다. 사회로 돌아온 임택재는 미곡상을 하면서 결혼도 했지만, “꽉 닫힌 조그만 껍질 속에 들어앉은 달팽이”처럼 웅크려 지내다가 1939년 2월 16일 스물 여덟의 한창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했다. 2년 여 동안의 사진의 변화가 말해주듯이, 아마도 육체적 고문과 정신적 압박이 병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사진 1> 동대문서에서 촬영(1933.2.9)
<사진 2> 형사과에서 촬영(1934.5.9)
<사진 3> 서대문형무소 촬영(1935.2.7)
출옥한 임택재는 任史冥이라는 필명으로 죽기 전까지 「고향」, 「어두운 방의 시편들」, 「독백」, 「말」과 유고시 「십년 또 십년」 등 총 5편의 시를 발표했다.(주7) 그의 시들을 읽다 보면, 자신의 전향에 대한 부끄러움과 시대에 대한 깊은 절망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신념을 잃은 자신을 “타다만 장작개비 피글 피글 연기만 내는구나”라고 자조하고, “산은 무너지고 해, 달, 별, 돋지마라! 이 어두운 방에 남아 내 홀로히 바삭바삭 말라서 길이길이 잠들을까”(주8)라고 되뇌인다. 전향의 번민으로 괴로워하는 그에게 “어두운 방에 가만히 있는 탓이네 밖으로 나가보게!”라며 “이제는 거대한 삘딩에 가죽가방을 들고 조석 드나드는-, 금강산의 로케이슌을 다녀온 씨이크한-, 쩌나리즘의 조고만 일각에서 편집을 도맡는-, 또는 새로운 정열로 인간탐구의 작품을 쓴다는-, 전날부터의 벗들은 고히 충고를 하여주”(주9)지만, “산에 올라 ‘이놈들아!’--외치고 싶은 나”(주10)는 이미 생활과 현실을 헤쳐가기 힘겨우리만큼 몸도 마음도 지치고 병들어 있다. 조금 길지만 임택재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썼던 「십년, 또 십년」을 함께 읽어 보고 싶다. “그만 망서리겠읍니다./말에 올라 길을 달려야겠읍니다./좁은 골목길에서는/첨하에 꺼른 거미줄이 작고만 얼골에 얽힐것이오.//들에 나서면/활작 열린 한 들복판/影畵같이 또렸한 나에게/四方에서 총끝을 향하고,/그리고 나의말을 겨누기도 할것이오.//하라버지의 이야기에는/비리먹은 망아지가 있읍니다./나의 말도 그 비리먹은 망아지요/나도 이땅에다 또하나의 傳說을 심을것이오./(누이야. 저 커다란 대야, 그때 항상 아버지께서 쓰시던 놋대야에 찬물을 하나가뜩 떠오렴)//나는 허리에서 비수를 하나 빼여/그 정한물에 던저놓았읍니다./그리고 대야속의 變化를 가르치며 외쳤읍니다./---오오 故土에서 솟는 물은 이처럼 피가 아니냐, 이렇게 生生한 피속에서 칼날은 시퍼렇다만/내가 헛되이 죽는날에는 구덕이가 스를 것이다. 칼도 녹스러질것이다!//아아, 나는 나의 어린아들도 섞여있는 무리에게 하직하고/定한 方位로, 말을 쏜살같이 달려야겠습니다.//(주11) “이 땅에 또 하나의 전설을 심을 것”을 결심하며 그는 누이에게 아버지가 쓰던 놋대야에 찬 물을 떠오라 요청한다. 그가 빼어든 비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그가 사랑한 사람들이 살았던 故土에서 솟는 깨끗한 물, 즉 민중들의 “생생한 피속”에서 “시퍼렇게” 날이 설 것이다. 배교자의 고뇌 속에 칩거하던 그는 마침내 “定한 方位”로 달려갈 것을 결심했지만, 끝끝내 스러졌다. 이제 오빠에게 ‘정한 물’을 요청받았던 여동생 임순득의 삶을 살펴볼 차례이다. 이화/동덕여고보에서 두 번 퇴학당한 열혈 투사 임순득임순득(任淳得, 1916∼?)은 고창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1929년 4월에 서울의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9년 11월 3일에 그 유명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930년 1월 서울에서도 근우회의 지도 속에 이화여고보가 앞장서 여학생만세운동을 벌였다. 당시 1학년이었던 임순득은 이 시위의 주모자는 아니었지만, “열렬한 독서가이자 능변가”(주12)였던 성격을 감안해 보면, 만세 시위에 함께 참여하며 큰 감격을 경험했을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 3학년이 된 임순득은 1931년 6월 25일 이화여고보의 2, 3, 4학년 학생 약 3백여 명이 벌인 학생동맹휴학 사건의 주모자가 된다. 이들의 요구조건은 “종교신앙의 자유권과 교원 4인 배척 및 교육 시간을 여섯 시간으로 하여달라는 것” 등이었다. 정규교과 외의 성경 시간을 폐지하고 선교사 교원을 배척하는 등, 한 마디로 미션스쿨인 이화여고보의 기독교 교육에 반기를 든 동맹휴학이었다. 임순득에 설득되어 맹휴에 가담한 동창생 작가 전숙희는 다음처럼 회고한다. “오전수업을 마치고 정오가 되자 주모급의 한 학생이 교정에 있는 종을 울렸다. 이것을 암호로 전교생이 일제히 교정에 모였다. 이때 Y(임순득)는 용감하게 단상으로 뛰어올라가 교장과 교사 배척문을 낭독하고 전교 동맹휴학을 선포했다. 황급히 쫓아온 선생님들은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 서있을 뿐이다. 나는 온몸이 떨렸다. 교정은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다음 순간, 전교생들은 교정 위 풀밭으로 가서 농성대열로 주저앉았다.”(주13) 당시의 경찰 기록은 이 동맹휴학을 서울계의 조선공산당재건준비회 사건으로 파악하고 있다. 1930년 1월의 여학생만세사건을 주도하고 퇴학당한 이화여고보의 최복순이 고려공산청년연맹회에 가입한 후 학창시절 같이 자취했던 4학년 조숙현을 끌어들이고, 다시 조숙현이 3학년 임순득을 포섭하여 일으킨 맹휴였다는 것이다.(주14) 최복순과 조숙현은 기소되었지만, 17살의 임순득은 어리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학교 측은 석방된 임순득을 퇴학시킨다. <사진 4> 1931년 8월 30일 서대문경찰서에서 촬영
<사진 5> 이화맹휴 주모자로 취조받을 때 작성한 신상기록카드
퇴학당한 임순득은 1932년 봄 동덕여고보 3학년에 편입했다. 동덕여고보에는 걸출한 사회주의 활동가인 이관술이 지리와 역사를, 신체제기에 자결로 염결한 생애를 마감한 한글학자 신명균이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천도교 계통의 동덕여고보는 사회주의 여성활동가의 산실이었다. 박진홍, 이순금, 이경선, 이종희, 김재선 등 이후 혁명적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동/민족 해방에 앞장선 여성사회주의자들이 학내 독서회 활동을 통해 성장하고 있었다. 임순득은 1932년 10월 이관술의 지도 아래 이경선, 김영원과 함께 독서회를 꾸렸다. 이들은 『자본주의 구조』, 『임노동과 자본』 등을 강독했다. 1933년 1월이 끝날 무렵 이관술, 이경선, 임순득이 독서회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된다. 이관술 집에 하숙하고 있던 임택재도 함께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 결성준비위원회’ 사건으로 확대되어 이관술은 학교에서 쫓겨났다. 임순득은 불기소처분을 받았지만 동덕여고보는 그녀를 퇴학시켰다. 1933년 여름 동덕여고보에서 제적된 뒤, 1937년 2월에 단편소설을 통해 문단에 나타나기까지 4년여 동안 그녀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확실하진 않다. 다만, 1933년 7월의 일본 경찰 사찰보고에 임순득이 일본 유학을 계획 중이라는 구절이 있고, 임택재의 1937년 3월의 증인신문조서에 동생이 서울의 ‘조선미술공예사’에서 기자로 일한다는 진술이 남아 있다. 야비한 비평을 일삼았던 김문집도 “두뇌가 우수한” 임순득이 일본의 ‘여자고등사범학교’를 다니다가 “중도에서 집어치우고 난데없는 문학에 손을 적셨다”(주15)고 조롱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들 자료를 종합해보면, 동덕여고보에서 퇴학당한 이후 임순득은 일본의 ‘동경여자고등사범’ 혹은 ‘나라여자고등사범’에 유학하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귀국하여 ‘미술공예사’ 기자를 거쳐 1937년부터 본격적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임순득이 왜 ‘난데없는 문학에 손을 적셨’는지, 또 그녀의 문학이 김문집에게 조롱받을 만큼 수준이 낮은 것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아무래도 그 판단은 작품을 직접 살펴보는 수밖에는 없다. 「일요일」과 「나즈케오야(名付親)」와 글쓰기의 저항·윤리동덕여고보 시절의 동지이자 선배들인 박진홍, 이순금, 김재선 등이 경성콤그룹과 중국 연안 등지에서 사회주의자로서 계속 투쟁할 때, 임순득은 작가로서 자신의 소명을 이어갔다. 1937년 2월에 발표한 임순득의 등단작 「일요일」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다. 미나미 지로(南次郎) 총독 부임과 황민화 정책의 추진, 중일전쟁의 발발과 제국 이데올로기의 득세가 준비되던 때에 임순득은 경성 C신문사 타이피스트 강혜영의 평범한 ‘일요일’을 담담히 그린다. 일요일 오전 혜영은 “요새 읽기 시작한 에렌부르크의 소설이나 마저 읽을까? 성북동에 나가서 스케치나 한 장 그려볼까?” 고민하다가 감옥에 있는 애인 윤호의 옷을 빨며 집에 머문다. 그녀에게 놀러왔다가 감옥에 있는 애인 빨래나 하는 혜영을 조소하는 여학교 동창인 M과 P는 이미 과거의 신념을 잊고 일상의 평온에 안주한 자들이다. 저녁 무렵 영화보러 가자고 찾아온 주간신문의 편집자인 윤호 친구 H도 “진실한 생활 태도에서 물러난 사람”(주16)일 뿐이다. 이 작품에는 윤호를 낡은 이데올로기로 인식하며 현실과 타협하고 일상에 안주하는 과거의 동지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동시에 혜영 자신의 내면을 섬세하게 성찰하는 지적 사유가 섞여 있다. 윤호는 지나버린 과거가 아니라 혜영의 생활과 이어진 현재이다. 소설이 소련 작가인 에렌부르크의 작품을 읽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것도 흥미롭거니와, 당면한 생활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을 보여주는 이들을 “소금쟁이 종족”으로 설명하는 다음의 대목도 인상적이다. “혜영이는 생각하였다. 소금쟁이는 수면 위에서 잠시라도 유쾌한 맴도리를 그치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돌고만 있다. 소금쟁이는 흐르는 물 위에서는 결코 돌지 않는다. 거울같이 잔잔한 물이겠지만 생동하는 물결 있는 흐르는 물 위에서는 그 쾌활하고 만족할 수 있는 맴도리를 못한다. 물의 깊이를 모른다. 흐름의 정신과 육체를 모른다. 안정된 평면이 현존하면 고만이다. 소금쟁이의 의욕이란 안온한 순간에 대한 욕심뿐이다. 아아, 소금쟁이들이여!”(주17) 카프 해산 이후의 후일담 문학에서 전향의 유력한 논리는 ‘생활의 발견’이었다. “안온한 순간에 대한 욕심 뿐”인 소금쟁이들과는 다른 ‘생활’을 살며 미래를 응시한 것은, 적어도 이 시기의 소설에서는 대부분 여성들의 몫이었다. “윤호를 그런 곳에 남겨 놓고 자기 혼자 계절의 변화를 즐길 만한 마음은 추호도 움직이지 않”을만큼 그녀에게 윤호는 “생활의 표식”이었다. 결말에서 혜영은 “무한히 광대한 것의 색채를 내 몸에 감고 있다는 것이나마 늘 느끼고 싶”(주18)어하는 윤호에게 차입해주기 위해 “코발트색 스웨터”의 팔을 “짜고서” 기쁨 속에서 잠이 든다. 감옥의 사회주의자 남성과 감옥 밖 여성의 구도는 ‘우리 오빠와 화로’의 젠더적 위계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혜영에게는 “윤호와 대등한 인격으로서 깎임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주19)다는 점에서 그들의 관계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이 소설은 사회주의 투사 윤호를 기다리는 애인의 서사가 아니라, 남(성)의 글을 ‘淸書’만 하던 타이피스트 강혜영이 사회주의의 객관적 상관물인 ‘코발트색 스웨터’를 직접 ‘짜는(쓰는)’ 주체가 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나즈케오야(名付親)」도 볼수록 근사한 소설이다. 1942년 10월 『문화조선』에 일본어로 발표된 이 소설은 5촌 조카의 이름을 짓는 과정을 그린다. 서술자는 소설가 친구 고려아(高呂娥)와 상의하여 여자아이라면 굴원(屈原)이 지조의 상징으로 사용한 풀이름을 따서 ‘임혜원(任蕙媛)’으로, 남자 아이라면 유대 민족의 해방자 모세(毛世)와 굴원을 한 자씩 따서 ‘임세원(任世原)’으로 짓기로 한다. 1942년에 이름과 정체성의 관계를 문제 삼는 소설이란 어떤 의미일까? 알다시피 1940년 2월부터 창씨개명 정책이 실행되었다. 임순득의 집안 역시 1940년 8월 5일 본관인 豐川을 활용하여 ‘토요가와’로 창씨했으며, 임순득의 호적상의 이름도 ‘토요가와 쥰(豐川淳)’으로 바뀌었다. 창씨 후이지만 작품은 ‘任淳得’으로 발표되었고, 혜원과 세원도 ‘任’씨로 설정하여 일종의 ‘사소설적 독법’을 구축했다. 이 시기 이른바 ‘친일매체’에 발표된 임순득의 일본어 작품들은 일본어로 쓰면 무조건 ‘친일문학’으로 취급하는 통념을 전복시킨다. 민족과 계급의 해방을 외치던 오빠들이 죽거나, 갇히거나, 전향한 빈자리에서 임순득은 묵묵히 글을 쓰며 신념을 지켰다. 임순득은 젠더화된 한국문학사, 암흑기의 한국문학사를 다시 사유하게 하는 작가이다.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점에서, 냉전과 분단의 한국문학사를 재구성하는 데에도 참조가 될 것이다. 이구영과 성혜랑 등이 남긴 북한에서의 임순득에 대한 전언이 있지만, 조금 더 자료를 모은 뒤에 남은 이야기를 이어가겠다.(주20) 주1) 조선희, 『세 여자-20세기의 봄』1·2, 한겨레출판, 2016. 손석춘의 『코레예바의 눈물』(동하, 2016)도 여성 사회주의자 주세죽의 생을 그린 작품으로 특기할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