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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④] 어느 식민지 조선귀족의 삶 : 민태곤·민태윤 형제_정종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2 BoardLang.text_hits 6,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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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11월(통권 11호)

[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

 

어느 식민지 조선귀족의 삶 : 민태곤·민태윤 형제


 

정종현(인하대 한국어문학과 부교수)


 

1. 조선귀족, 매국의 상급(賞給)


나라를 멸망시킨 적국의 포상을 받은 이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식민지 조선귀족은 ‘매국노’라는 말을 들어 합당한 집단이다. 일본은 1910년 <조선귀족령>을 공포하고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등 총 76명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주었다. 거절한 8명을(주1) 제외한 68명이 이를 받았다. 그들은 법적으로 예우되었고, 자식들은 일본 귀족만 가는 가쿠슈인(學習院)에 다녔으며, 결원이 있으면 무시험으로 제국대학에 입학했다. 그 특권은 상속되었다.


[그림 1] <호외 : 황실령·조선귀족령>, <<매일신보>> 1910. 8. 30.
 
당대인들은 이들을 어떻게 보았을까? 정지용은 교토를 배경으로 식민지 청년의 자의식을 모던한 감각으로 그린 「카페 프란스」에서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주2)고 자조했다. 문학사에서 ‘자작의 아들’은 “구체적인 귀족 계급의 하나를 가리킨다는 것보다 제 손으로 일하지 않아도 예술에 열중할 수 있는 특권계급의 상징” (주3)정도의 뜻으로 해석된다. 허나 당대 교토 유학생 사회를 떠올려 보면, 이 구절은 문학적 상징이 아니라 ‘사실’로도 읽을 수 있다.

이 시가 쓰일 당시 교토제국대학에는 남작 민종묵의 차남 민부훈(법학부)이 재학 중이었고, 뒤이어 후작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문학부), 남작 조동윤의 장남 조중구(농학부) 등도 입학했다. 이들은 가쿠슈인을 거쳐 교토제국대학에 진학했다. 가모가와(鴨川) 개울을 사이에 두고 교토제국대학과 마주 보는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다니던 정지용이 이들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이 두 대학 학생들은 조선인 유학생 커뮤니티에서 함께 어울렸기 때문이다.

옥천의 가난한 농가 출신인 정지용은 학업을 마친 후 모교 영어 교사로 근무한다는 조건으로, 휘문고보 교비 장학금을 받아 유학하고 있었다.(주4) 휘문고보 교주는 전국에 방대한 땅을 소유하고 있어 ‘토지 대왕’으로 불린 ‘자작’ 민영휘였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고 보면,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라는 시구에서는 친일 귀족의 알량한 장학금으로 유학하는 정지용 자신에 대한 자조와 더불어, 식민지 귀족들에 대한 강한 반감과 울분마저 느낄 수 있다.

정지용의 휘문고보 1년 후배인 이태준도 자전소설인 <<사상의 월야>>에서 민영휘 집안과 얽힌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교주 민영휘가 “바람을 쏘이러 장충단 공원에 가셨다가 넓은 마당을 보니 팔백 명 학생을 한 번 한 뜰에 세워놓고 보시고 싶다”(주5)고 전화를 걸어오고, 수업을 중단하고 공원에 모인 전교생은 교가를 부르며 합동 체조를 한다. 학생들의 웃저고리는 벗기라는 ‘교주의 분부’가 내리고 속옷을 못 입은 가난한 고학생인 주인공은 실랑이 끝에 정학 당한다.

정지용과 이태준의 문학 작품에 투영된 조선귀족회 부회장 민영휘 집안에 대한 부정적인 형상은 당대 지식인 일반과 대중들이 바라본 조선귀족의 모습과 그리 큰 차이가 나진 않을 것이다. 조선귀족들 거의 대부분은 일본이 내린 작위의 특권 속에서 호의호식했고, 자식과 손자까지 대를 물리며 그 영화를 누렸다. 그렇지만, 식민지 조선 귀족들 모두가 그랬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극소수였지만, 일본의 통치에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2. 사회주의자가 된 식민지 ‘남작’


식민지 시기를 통틀어 조선귀족은 한일합방 당시 작위를 받은 76명, 여기에 1924년에 추가로 작위를 받은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 작위를 계승한 81명의 습작자를 더해 총 158명이었다. 이들 중에서 고종 망명을 도모해 이른바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검거된 남작 김사준, 3·1운동 당시 일본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자작 김윤식과 자작 이용직,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남작 김가진 등이 작위가 박탈되어 매국노의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58명의 조선귀족들 중에서 해방 이후 유일하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사람이 있다. 남작 민태곤(閔泰崑)은 1940년대 초반 항일 비밀결사 조직에 가담했다가 옥고를 겪고 스물 여덟의 한창 젊은 나이에 죽었다. 김사준의 고종 망명 모색과 김가진의 직접 망명 및 독립운동 가담도 큰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그들은 대한제국의 고위관료로 망국에 책임이 있었고, 작위를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충성은 망국의 사직과 군왕을 향하는 복벽(復辟)의 성격을 지녔다.

이에 비해 민태곤은 그들과는 다른 새로운 세대였으며, 그 저항의 사상도 이전과는 새로운 종류의 것이었다. 민태곤은 1917년 12월 17일 경성부 입정(笠井)동 258번지에서 남작 민종묵의 증손자로 태어났다. 민종묵은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었으며, 구한말 통상·외교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로, 대한제국에서 외부, 탁지부, 법부, 농부대신 등을 지냈다. 그의 남작 작위는 민철훈을 거쳐 양손 민규현과 그 아들들인 민태곤·민태윤의 4대까지 이어졌다.(주6)

민태곤은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만 17세의 나이에 남작 작위를 습작했다.(주7) 대전중학교를 거쳐 1939년 일본의 도호쿠제대 문학부에 진학하여 서양사를 전공했다. 그는 1940년 5월 무렵부터 학생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조선의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모색했다. 이를 위한 이론적 모색으로 마르크스의 「임노동과 자본」, 라비스트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교정」 등 사회주의 계통의 서적들을 함께 공부했다. 특고월보에서는 이들의 혐의를 ‘민족공산주의 운동’으로 명명하고 있다.(주8)

이들은 조직의 실천 활동으로, 첫째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운동 단체의 건설을 위해 사회주의 사상을 채택하고 연구할 것, 둘째 조선 내 신분제도의 타파, 셋째 학생들에 대한 군사교육 및 창씨개명 반대, 넷째 조선에서의 의무교육제도 실시, 다섯째 재일조선인 노동자의 생활개선 등을 협의했다.(주9) 이러한 활동을 하다가 민태곤은 오창근, 이건호, 김태철 등과 더불어 1941년 12월 9일에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고 조직은 와해되었다.


[그림 2] <민태곤씨 습작>, <<조선신문>> 1934. 12. 16
 
 
[그림 3] <<특고월보>> 1941년도 1월호
 
 
귀족 지위가 주는 안온함을 박차고, 고통받는 동족을 위한 삶을 실천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민태곤의 집안은 여흥 민씨의 일원으로 조선 왕조의 권세가였으며, 식민지 시기에는 식민 권력에 적극적으로 결탁하며 그 비호를 받았다. 민철훈의 동생으로 민태곤에게는 종증조부였던 민부훈은 이즈음 교토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를 합격한 후 총독부 판사로 재직하면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실형을 내리고 있었다.(주10)

이런 친일 귀족 집안에서 자랐으면서 민태곤은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남작이라는 작위가 동족과 나라를 판 대가라는 사실을 아프게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마음먹기 따라 집안 어른인 민부훈처럼 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고, 아니면 세상과 거리를 두고 학문에 숨을 수도 있었다. 그에게는 도호쿠제대 졸업과 동시에 이화여전 교수직이 내정되어 있었다고 전한다.(주11) 하지만 그는 꽃길 대신 운동의 가시밭길을 택했고,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는 시련을 겪는다.

어쩌면 귀족 신분은 끝까지 그를 따라다니는 족쇄였는지도 모른다. ‘도호쿠제대 조선민족독립운동그룹’의 성원들이 체포된 것은 1941년 12월 9일로 같지만, 그들이 풀려난 시기는 각기 다르다. 1943년 4월 22일에 검거된 조직원들 중에서 제일 먼저 민태곤이 센다이지방재판소의 기소유예 판결로 풀려났다. 오창근, 황채연 등은 센다이지방재판소 형사부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43년 9월 18일에 2년 징역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집행유예지만 미결감에서 이미 2년여에 가까운 수형 생활을 한 뒤였다.

일본 당국은 조선 귀족의 신분을 지녔기에 민태곤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타파하고자 했던 귀족 신분이 그를 동지들과는 다른 법적 처분을 받게 한 것이다. 그렇다고 민태곤이 고초를 겪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1년 5개월여 동안 경찰과 검찰의 혹독한 취조와 수형 생활을 거치며 그의 폐는 망가졌다. 동지들 보다 먼저 풀려났다는 미안함과 자괴감, 무너진 육체의 괴로움 끝에 그는 폐결핵으로 1944년 11월 22일 죽음을 맞이했다.(주12)

 

 

3. ‘갑자생’ 귀족의 해방 전후


민태곤은 독립운동 공적으로 2009년에 대한민국 애족장을 받았다. 뒤늦은 서훈에는 그의 동생 민태윤(閔泰崙)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민태윤은 형의 독립운동 자료를 얻기 위해 “일본 내각총리대신, 법무대신, 대법원, 동북제국대학이 있는 센다이의 지방법원장과 검찰청장한테 다 편지를 보냈”지만, “관련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그러던 중 교토대학의 미즈노 나오키 교수의 자료 제공으로 드디어 형 민태곤의 서훈을 이룰 수 있었다.(주13)

민태곤의 일곱 살 터울 동생인 민태윤은 그 유명한 ‘갑자생’(1924년)이다. “묻지마라 갑자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모진 풍파를 겪었다. 이들은 대대적인 징용과 징병의 첫 대상자로, 심각한 신체적 결함만 없으면 더 묻지도 않고 신체검사에 합격시켰다고 한다. 중국, 남양 등지로 끌려간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죽었다. 겨우 살아 돌아온 이들 앞에는 한국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인민군이나 국군 혹은 두 군대 모두에서 징집되었다.(주14)

민태곤도 갑자생들의 신산한 삶의 행적을 공유하고 있다. 그의 생애는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가 기획한 서울역사구술자료집에 채록된 그의 구술을 통해서 가늠해 볼 수 있다. 부정확하거나 왜곡될 수 있는 주관적 기억에 의존한 것이기에 구술 자료를 활용할 때에는 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민태윤의 구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터뷰어의 질문이 없었기 때문이겠지만, 민태윤은 자신이 남작 작위를 습작한 식민지 조선귀족 출신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식민지 귀족이란 사실은 감추지만 대신에 민씨 가문에 대한 자긍심은 숨기지 않고 곳곳에 내비치고 있다. 가령,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휘문고보 입학 이유를 ‘민씨 가문’의 민영휘가 만든 학교이고, “어른들이 거기가 제일 좋은 학교니깐 그리 가라고 해서” 진학했다고 회고한다. 또한, 당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이유도 “저희 민씨 집안에서 절대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에게는 여흥 민씨라는 양반가의 자부심이 강하게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1944년 3월 휘문고보를 졸업한 민태윤은 1944년 12월 ‘아카가미(赤紙)’라 불린 징집 영장을 받는다. 그는 식민지 귀족이었지만 징집을 벗어날 수 없었다. 요즘도 병역 비리 뉴스가 간간히 되풀이 되듯이, 예나 지금이나 권세 있고 재력있는 집안에서는 여러 편법으로 군역을 회피했다. 하지만 당시 민태윤은 하나 뿐인 형이 항일비밀결사에 참여하다 후유증으로 죽었고 가족이라고는 홀어머니만이 남은, 재산도 권세도 없는 영락한 명목상의 귀족일 따름이었다.

그는 “증조부가 미곡상을 하다가 잘못되어” 가세가 기울어 연기군 소정리로 낙향했다고 기억한다. 그의 증조부는 민종묵을 습작한 2대 남작 민철훈으로 은행취체역으로 활동하며 1920년 3월에는 농림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미곡상’이란 아마도 이 농림주식회사였을 것이다. 민태곤/태윤 형제의 아버지인 남작 민규현이 1930년 1월 몰락해 가는 조선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해 조직된 재단법인 창복회에서 150원을 수령한 기록이 있다.(주15) 사업이 망하며 가세가 기운 탓으로 보인다.


[그림 4] <<친일인명사전>>의 ‘민종묵’ 기사
 
 
[그림 5] <<친일인명사전>>의 ‘민철훈’ 기사
 
 
영락한 가세 속에서, 그리고 형의 항일비밀결사 경력에 대한 당국의 따가운 눈총 속에서 민태윤은 징병을 회피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는 1945년 1월 16일 입대 후 허난성 신샹시(河南省 新鄕市)의 중국 북지파견군 시미즈부대(沈部隊)에서 7개월 여를 주둔하며 미군의 B29공습을 일상으로 겪다가 7월 경 용산으로 귀환했다. 다시 1945년 8월 초순에 흥남비료공장 인근에 배치되어 참호를 파다 해방을 맞이해 8월 19일 화물차를 타고 서울로 귀환했다.

살아 돌아온 그는 경성경제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가 서울대 상대로 통합되는 ‘국대안’의 파동 속에서 졸업하지 못하고, 결혼과 함께 국립도서관에 취직한다. 얼마 뒤에 집안 친척이 실장으로 있는 신탁은행(후일의 한일은행) 조사실로 직장을 옮겼다가 한국 전쟁을 겪게 된다. 피난하지 못한 민태윤은 길거리 등에서 여러 차례 인민의용군 징집을 당하지만 기를 쓰고 도망쳤고, 수복 후에는 국민방위군에 징집될 위기에 처하자 교통부 철도국원이 되었다.

철도국은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가서 죽기 싫었던 그가 선택한 직장이었다. 한강과 서울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특권과 더불어 청량리 역 구내에 관사도 주어졌다. 이후 그는 교통부 본부 항공과로 옮겨가 근무하다 조중훈이 인수하여 민영화된 대한항공에 “교통부에서 간 낙하산 인사”로 기획팀에서 근무하다가 1979년에 퇴임했다. 세 나라 군대에 휘둘린 갑자생 ‘남작’ 민태윤은 그 위험을 피하고 “아주 운이 좋”게 살아남아 ‘국민/시민’의 삶을 살 수 있었다.

 

 

4. 민주주의의 시대, 귀족은 사라졌는가?


귀족의 사전적 정의는 “혈통, 문벌, 공적 등에 의해 정치적, 사회적 특권을 가지게 된 사람”을 일컫는다. 민주공화국인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귀족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귀족 계급이 사라진 것은 지난 세기의 민주적 변화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귀족 계급 스스로가 그 존재의 도덕적 근거를 허물어버린 탓도 크다. 이씨 왕가는 ‘왕공족’으로 일본 황실의 일부로 안주했고, 양반가들은 일본의 작위를 받으며 그 권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그 귀족들의 잔재는 사라졌을까? 조선귀족들이 특권 속에서 일군 재산과 영화는 후손들에게 세습된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민영휘 집안은 그 사례다. 민영휘는 민씨 척족 중의 하나로 그 아버지 민두호는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민쇠갈쿠리’라고 불리는 탐관오리였다. 민영휘 자신도 평양 감사로 있으며 백성을 쥐어 짜 고종에게 금송아지를 진상했다고 한다. 조선귀족이 된 후 재산이 더욱 불어 식민지 최고의 갑부로 일컬어졌다.

조선 왕조의 벌열(閥閱) 양반 귀족이자 식민지 조선 귀족이라는 특권 아래 쌓은 민영휘의 재부는 후손들의 사회적 성공의 토대가 되었다. 손자 중 하나는 제일은행장과 한국은행장 등을 역임했으며, 도쿄제대를 졸업한 증손자는 사업가로 성공하고 풍문여고를 설립했다. 많은 이들이 찾는 남이섬 유원지도 민영휘 후손의 소유이다. 휘문고등학교는 민씨 집안이 소유해 왔으며, 최근에는 또 다른 후손인 이사장이 50여 억 원의 교비횡령으로 법정구속 되었다.

친일 귀족의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연좌제’적 비난을 하는 것은 물론 옳지 않다. 그렇지만 그들의 사회적 성공은 특권 속에서 축적한 민영휘의 재산과 그를 토대로 형성한 사회자본에 힘입은 바 크다. 최근 이 집안에서는 국가에 귀속된 민영휘의 재산을 되찾으려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 판정을 받았다. 백성을 희생삼아 얻은 사회적 특권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그 재산을 되찾겠다는 염치없음만으로도 그 후손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한국 사회에서 과연 귀족은 사라졌는가? 혈통과 문벌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의미의 귀족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에는 새로운 유형의 귀족들이 등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재벌들은 그 능력이 검증되지도 않은 3세, 4세에게 경영권을 세습하고 있으며, 대통령의 자식이라는 경력(?) 만으로 집권 여당의 비례 국회의원이 되는가 하면, 근래에 이르러서는 아버지의 지역구를 승계했거나, 승계하려는 정치인 2세, 3세들도 등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현재 한국사회는 (조)부모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그 자식의 사회적 성공을 좌우하는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고착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분명 민주주의 사회이지만, 한편으로는 공고한 신분제 사회처럼 느껴질 때도 많다. 민태곤을 검거한 일본 경찰은 그가 가담한 항일 비밀결사의 혐의를 “민족공산주의 운동”이라고 규정했다. 그 규정이 암시하듯이, 민태곤이 꿈꾼 세상은 특권이 폐지되어 사회적 불평등이 사라져 모든 민중들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독립한 새 나라였다.

자기 계급의 한계를 극복한 민태곤의 삶은 우리에게 되묻는 듯하다. 대한민국은 특권계급이 없는 만인이 평등한 사회인지를---.
주1) 작위를 거부한 8명은 유길준, 김석진, 조정구, 민영달, 윤용구, 조경호, 한규설, 홍순형이다.

주2) 정지용, <카페 프란스>, <<학조>> 창간호, 교토학우회, 1926, 89쪽.

주3) 사나다 히로코,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 역락, 2002, 125쪽.

주4) 정지용의 장남 정구관 씨의 회고에 근거함. 사나다 히로코, 위의 책, 152쪽.

주5) 이태준, <<이태준전집>>3, 소명출판, 2015, 216쪽.

주6) 아들이 없던 민철훈은 민재위(閔載褘)를 양자로 입적한다. 민재위가 일찍 사망함에 따라 민철훈의 남작 작위를 민재위의 아들 민규현이 습작했다. 간략한 가계도를 그리자면, ‘민종묵-민철훈-(민재위 습작 전에 조기 사망)-민규현-민태곤·민태윤’의 4대에 걸친 5명의 남작 작위 습작.

주7) <민태곤씨 습작>, <<조선신문>>, 1934년 12월 16일.

주8) 일본 경찰은 오창근, 민태곤 등 도호쿠제대 및 제2고학생 11명을 1941년 12월 9일에 검거하였고, 이들의 범죄 피의 사실을 “민족공산주의운동”이라 명명하고 있다. 內務省警保局保安課, <<特高月報>>, 1942년 1월호, 114쪽.

주9) 민태곤 등의 행적에 대해서는 <독립유공자 공훈록>(공훈전자사료관) 및 변은진, <<일제말 항일비밀결사운동 연구-독립과 해방, 건국을 향한 조선민중의 노력>>, 도서출판선인, 2018, 278-280쪽을 참조.

주10) 민종묵의 차남인 민부훈은 경성제일고보와 가쿠슈인, 교토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다. 부산지방법원 판사, 대구지방법원판사 등을 거치며 안동콤그룹 사건의 이필, 권중택 등의 재판, 전라도 지역의 사회주의자 윤승현, 김시중, 송종근, 고형주 등의 재판에 참여하였다. 소송인으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관직에서 물러나 변호사 개업을 했다.

주11) 민태윤의 구술,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서울역사 구술자료집(3)-서울 사람이 겪은 해방과 전쟁>>, 선인, 2011, 25쪽.

주12) <민태곤 男>, <<매일신보>> 1944. 11. 24. “그 동안 신병으로 요양 중이던 바 11월 22일 오전 0시 20분 부외 미아리 564번지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향년 28세이다.”

주13) 민태윤의 구술, 앞의 책, 25쪽.

주14) 한겨레의 김효순 기자가 쓴 <<나는 관동군, 인민군, 국군이었다>>(서해문집, 2009)는 관동군으로 징집되어 패전 후 시베리아 억류자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북한에 갔다가 다시 남한으로 넘어온 이들의 고단한 삶을 추적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바로 갑자생으로 징병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었다.

주15)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ㄱ∼ㅂ)>>, 민족문제연구소, 2009, 806-8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