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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17세기 청ㆍ조선 관계 연구_이명제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2 BoardLang.text_hits 28,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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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3월(통권 15호)

[나의 학위논문] 

17세기 청ㆍ조선 관계 연구

 

(2021. 2. 동국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이명제(중세 2분과)


아직도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데 이렇게 논문을 소개하게 되니 매우 부끄러울 따름이다. 약간의 민망함을 무릅쓰고 잠시 진지한 이야기를 전개해보고자 한다.

청(淸)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그리고 조선

淸은 만주족 고유의 특질을 고수하였는가? 아니면 入關 이후에 漢化되었는가? 청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이미 장시간 지속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청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청의 제국질서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확장된다. 청 제국이 내륙아시아적 특질을 유지하였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大淸帝國’이라고 명명하는 반면, 중국의 황제권력을 중심으로 단일한 질서에 의해 통제된 제국이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中華帝國’이라고 강조한다.
‘한화이론’과 ‘신청사’ 사이의 논쟁은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청과 조선, 양국 관계에 대한 논의로까지 쉽사리 확장되지 못하였다. 즉, 청의 정체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청과 조선의 관계는 전통적인 중화질서의 연장선상에서 인식되어 왔고, 여전히 그렇게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의 몇몇 연구들은 양국 관계가 전통적인 중화질서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위치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본 연구 또한 그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출발하였다.
본고에서는 문제의식을 가다듬는 차원에서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청ㆍ조선 관계가 전형적 조공ㆍ책봉 관계라기보다는 특수한 관계에 가까웠다면 새로운 관계는 어떠한 방식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를 추동하였던 주체는 누구였는가? 그리고 조선과 청 관계는 변화 없이 지속되었는가? 변화가 발생하였다면 그 동인은 무엇이었는가? 어느 순간 변화가 중단되고 일정한 방식이 유지되었다면, 그것은 언제였으며, 그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본 논문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왜 17세기를 주목해야 하는가? 왜 청ㆍ조선 관계인가?

논문을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착수한 작업은 양국의 사신 명단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사신 인선은 양국 관계의 변화상을 추적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작업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업은 이미 몇몇 선구적인 연구에서 진행되었다. 이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추가 작업이 필수적이었는데 크게 두 가지 측면에 주력하였다. 첫째, 아직까지도 완벽하게 파악되지 않는 청대 초기 사신들의 명단을 최대한 밝혀내는 것. 둘째, 이를 바탕으로 청측 사신들의 소속 팔기를 밝혀내는 것. 그렇게 수집된 자료를 엑셀에 넣고 이리저리 돌려보기 시작하자 몇 가지 특징이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우선 1691년이라는 새로운 기점이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즉 1691년 이전까지의 데이터들은 다양한 변화들을 보이는 반면, 1692년부터 1881년까지의 데이터들은 변화의 진폭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으로 1691년 이전까지의 다양한 변화들이 기존에 변곡점으로 지적되어 왔던 동아시아 국제정세(예를 들어 명ㆍ청 교체 혹은 삼번의 난)보다는 청 내부의 정치적 변동과 시기상으로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1637년부터 1691년까지 청의 황제는 숭덕, 순치, 강희제까지 총 3명이었지만, 순치와 강희제의 경우 모두 10살도 되기 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섭정기간을 거쳤다. 즉 50여 년 동안 적어도 청 내부에서는 4~5차례의 정치적 변동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조선에 파견되는 사신단의 구성 역시 함께 변화하였던 것이다.


[표 1] 청의 對조선 조칙 반포 양상(연평균, 1667~1881)


청은 조선에 조칙을 반포할 때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지만 조선에서 파견된 사신 편에 발송하기도 하였으며(순부), 혹은 정식 사신 대신 차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후대로 갈수록 정식 사신 파견 비율이 줄어든다. 또한 조칙 반포 횟수 자체가 강희 후반 이후로는 연평균 1회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표 2] 시기별 상삼기 출신 사신 파견 비율
 

팔기는 청의 군사, 정치, 경제, 사회를 지탱하였던 근간이었다. 황제 역시 팔기 전체가 아니라 특정 기의 주인에 불과했다. 따라서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기를 장악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순치 친정기 이후로는 정황, 양황, 정백의 삼기가 황제 직속 기로 고정되는데 이를 상삼기(上三旗)라고 한다. 위의 그래프는 조선에 파견된 사신 중에서 황제 직속의 상삼기 출신 비율을 구한 것이다. 옹정 연간 이후로는 대체로 80% 이상으로 고정된 반면 그 이전까지는 변동의 폭이 큰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대략 50여 년간의 ‘조정’을 거쳐 청의 대조선 외교 관행이 확립되었으며, 이렇게 확립된 관행은 이후 2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비교적 큰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정의 배경에는 청대 초기 황제권의 변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본 논문은 바로 이 점에서 17세기를 주목하였고, ‘조ㆍ청 관계’ 대신 ‘청ㆍ조선 관계’를 선택하게 되었다.

청ㆍ조선 관계 특수성의 증거들

그렇다면 청ㆍ조선 관계가 전통적인 중화질서로 손꼽히는 명ㆍ조선 관계와는 어떠한 차이점을 보이는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 볼 차례이다. 지면의 한계 상 구체적인 이야기를 풀어놓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몇 가지 증거들만 제시해보고자 한다. 가장 첫 번째 논의되어야 하는 지점은 호부 중심의 외교 체제이다. 명의 경우 대(對)조선 외교 업무를 예부에서 관장하였다. 하지만 청은 병자호란 이전에 이미 호부와 예부 중심으로 대조선 외교를 운영하였고, 이는 점차 호부 중심으로 정착되었다. 호부가 대조선 관계를 주도해 나간 것은 청ㆍ조선 관계가 명ㆍ조선 관계로 대표되는 예제적 질서보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하는 억압적 질서를 선호하였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청ㆍ조선 관계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청이 강제한 ‘정축절목’에 의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는 도르곤의 집권을 꼽을 수 있다. 통상적으로 청ㆍ조선 관계 전환의 계기로 명의 멸망과 청의 입관을 주목해 왔다. 특히 청의 입장에서 조선의 이반을 더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이러한 주장들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실제로는 청의 ‘입관’ 이전, 즉 ‘도르곤 집권’의 시작과 함께 청ㆍ조선 관계가 변화하였다. 섭정에 불과하였던 도르곤이 자신의 권력 기반 확보를 위해 조선을 자신의 우익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는 소현세자ㆍ봉림대군 등과 의제적 군신관계를 맺으며 미래를 꿈꾸었다. 비록 소현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기도 하였지만 조선의 왕위계승 문제에 대한 간섭까지 불사하며 자신의 뜻을 이어나갔다. 또한 홍타이지도 포기하였던 조선과의 혼인 관계(의순공주와의 결혼)를 관철시켰다. 도르곤의 이러한 시도들은 전통적인 중화질서와는 전혀 무관하였으며 오히려 조선을 외번과 같은 형태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는 순치 연간 예부 중심 외교 체제 구축에 대한 재평가이다. 순치제는 직접 친정에 나서면서 도르곤에 의해 변질되었던 정축체제를 원상복구시키는 작업에 나섰다. 우선 도르곤에 의해 사사롭게 전용되기 시작한 호부 중심 외교체제를 붕괴시켰다. 호부가 담당하였던 범월과 도인 등의 업무는 형부와 병부로 이관되었으며, 이마저도 정명수의 처벌과 함께 예부로 단일화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조선에 대한 사문 행위가 정비되어 황제의 권위를 회복하고 청ㆍ조선 관계를 재조정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순치제의 외교적 재정비를 단순히 ‘明制’의 계승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순치제는 곧이어 러시아의 동진에 맞서 조선의 파병을 관철시킴으로써 ‘대청제국’ 질서 구축에 조선을 동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신 인선에 대한 정비 작업을 통해 시위처 및 3품 이상의 고위 관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이는 유구ㆍ안남 등 동남 초승달 지역에 해당하는 여타의 외국들과 분명히 차별되는 점이었다. 즉 순치 10년을 기점으로 對조선 관계에 분명한 변화의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하였지만 이는 ‘명제’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대조선 관계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이었다.
마지막으로 강희 연간 양국 관계가 고착화되는 계기에 주목했다. 강희제는 삼번의 난 시기 청의 위기를 외면하였던 조선을 강력하게 응징하였다. 조선 국왕마저도 처벌의 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하지만 강희제는 다른 한편 청ㆍ조선 관계의 전환도 동시에 기획하였다. 이는 명의 유산을 온전히 계승함으로써 중원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었는데, 외교 관계에서는 의례화의 형식으로 발현되었다. 이러한 전환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것은 강희 30년(1691) 조총 진상 사건이었다. 당시 청은 준가르의 갈단 세력과 초원에서 경쟁하며 의도한 성과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조선에서는 청나라 사신의 강압에 못 이겨 반강제적으로 청에 조총을 진상하였다. 조총 진상은 조선의 의도와는 달리 ‘대청제국’ 질서에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결과를 창출하였다. 강희제는 곧바로 조선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낮추고, 세폐를 감면하였으며, 사신 파견의 빈도를 낮추며 조선의 선택을 보상하였다. 강희 30년 청ㆍ조선 관계는 마침내 ‘중화질서’에 수렴하는 듯 보이지만 이는 ‘대청제국’ 질서에 기여한 대가였다.

마치며

이상 박사학위논문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였다. 논문은 여전히 부족함으로 메워져 있지만, 이 역시 지금의 나를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공부를 통해 계속해서 부족함을 메꾸어나가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이 논문이 완성되는 데에는 한국역사연구회 ‘국제관계사연구반’에서의 공부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연구반 활동을 통해 나의 무지를 정확히 깨닫고 많은 자극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기회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