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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인 듯 섬이 아닌 신안군 답사기 ③] 보라색 섬, 조선육지면발상지비와 이충무공유적지를 찾아서_남기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2 BoardLang.text_hits 3,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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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5월(통권 17호)

[섬인 듯 섬이 아닌 신안군 답사기]

 

보라색 섬,
조선육지면발상지비와 이충무공유적지를 찾아서


 

남기현(근대사분과) 


 

답사 마지막 날이 되었다. 오늘 일정은 비금도 가산항에서 배를 타고 암태도로 들어간 후 안좌도로 이동하여 반월도와 박지도를 본 후, 고하도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답사를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라색 섬을 아시나요?

비금도 가산항으로 이동하여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한 후 배에 올랐다. 썰물인 상태여서 정박한 배 주변으로 넓게 갯벌이 펼쳐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진 1> 비금도 가산항 주변(@남기현)
 

암태도 남강선착장에 도착한 후 차를 타고 약 35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갔다. 2016년 ‘가고 싶은 섬’으로 지정된 반월도와 박지도를 보기 위해서였다. 신안군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반월도와 안좌도, 반월도, 박지도를 잇는 다리를 ‘퍼플교’라고 표시했다. 보라색과 섬들, 그리고 섬들을 잇는 다리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했다. 궁금증은 도착과 동시에 해결되었다. 반월도와 박지도의 마을, 길, 공중전화, 휴지통까지 모두 보라색이었다.
 

<사진 2> 퍼플섬의 보라색 휴지통(@남기현)
 

<사진 3> 퍼플섬의 보라색 공중전화(@남기현)
 

왜 퍼플섬(purple Island)라고 불리는지, 그 섬을 잇는 다리가 왜 퍼플교인지를 알 수 있었다.
 

<사진 4> 퍼플섬(purple Island)(@남기현)
 
 
<사진 5> 퍼플교(@남기현)
 

퍼플교를 통해 반월도 박지도 주변을 걸어갈 수 있었다. 맑은 하늘에 보라색 다리,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갯벌은 색다른 경관이었다.
 

<사진 6> 퍼플교와 갯벌(@남기현)


퍼플교를 지나갈 때에는 약간의 요금을 내야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비용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참고로 보라색 옷을 입고 오게 되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으니, 보라색을 좋아하는 분들은 색을 맞춰 입고 인생사진을 남기는 것에 도전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퍼플교를 건너 안좌도로 가면 보라색 자스민으로 덮인 언덕을 발견할 수 있다. 평일이어서 사람들이 적었는데, 성능이 좋은 사진을 가진 사람들이 전경을 찍고 있었다. 나중에 퍼플섬을 방문하는 분들은 이곳에서 사진을 찍어볼 것을 추천한다.
 

<사진 7> 퍼플섬 전경(@남기현)
 
 
<사진 8> 반월도의 어린왕자(@남기현)


고하도 조선육지면발상지와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퍼플섬 일대를 둘러보고 점심식사를 한 후 고하도로 향했다. 고하도는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신안군이 아닌 목포시에 속해 있다. 개항기 고하도는 개항장이었던 목포와 가깝게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각축전이 일어났던 곳이라고 한다. 특히 1899년에는 일본영사 와카마츠 도사부로(若松兎三郞)가 목화의 한 종인 미국산 육지면을 시험 재배했다. 결국 1904년 재배에 성공하였고 육지면은 이후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목화 수확기에는 목포항이 흰 목화솜으로 가득 찼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어떻게 보면 일본의 기술력의 이식을 상징할 수 있는 고하도를 주목했다. 1936년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육지면 재배를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이 비석이 현재 남아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고 이것을 보러 가기로 했다.
 

<사진 9> 고하도 조선육지면발상지비(@남기현)
 

하지만 비석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대략적인 위치는 확인할 수 있었지만 무성한 무화과 밭 어디인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무화과 밭으로 들어갈 때에는 밭을 지키는 개의 견제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함께 답사를 한 선생님들의 노력 끝에 무화과 밭 안쪽에 있는 비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의 전면에는 “조선육지면발상지이다.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朝鮮陸地綿發祥之地 朝鮮總督 宇垣一成)”라고 적혀 있었다. 후면에는 “메이지37년(1904) 목포주재대일본제국영사 와카마츠 도사부로(若松兎三郞)이 이곳에 처음으로 육지면을 시작했다(明治三十七年木浦駐在大日本帝國領事若松兎三郞氏此地ニ初シテ陸地綿ヲ試作ス)”라고 새겨져 있었다.


<사진 10> 고하도 조선육지면발상지비 전면(@남기현)


<사진 11> 고하도 조선육지면발상지비 후면(@남기현)
 

우카키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의 후임으로 조선총독이 된 인물이다. 부임 이후 ‘일선융합’, ‘내선일체’ 등과 같은 동화정책을 수행하였고, 황국신민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사진 12>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남기현)
 

우가키의 조선총독 재임기간은 1931년부터 1936년까지였다. 조선육지면발상지비는 우가키가 조선총독에서 물러나는 해에 만들어진 비석이었던 것이다. 조선육지면발상지비를 만들 당시 고하도 주변상황, 그리고 우가키가 주도한 식민지 통치정책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목포 답사를 다시 오게 되면 이곳을 꼭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 13> 고하도 조선육지면발상지 주변 전경(@남기현)
 

충무공 이순신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하도

조선육지면발상지에서 내려와 길을 따라 3분정도 안쪽으로 들어가면 충무공 이순신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볼 수 있다. 이 비석은 지방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식이름은 이충무공고하도유허비(李忠武公高下島遺墟碑)이다. 이 비석을 중심으로 유적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사진 14> 고하도 이충무공 유적(@남기현)
 

1597년 이순신은 고하도에 성을 구축하고 군사를 주둔시켰다. 충무공은 106일간 이곳에서 주둔하며 군량을 비축하고 전력을 비축하였다. 1722년(경종 2년) 통제사로 부임한 오중주(吳重周)와 충무공의 5대손 이봉상(李鳳祥)은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비 1기를 세웠다. 이 비석은 일제시기 야산에 버려져 있었는데, 해방 이후 현재의 장소로 옮겨왔다고 한다. 1949년에 비각이 건립되었고, 1963년 1차 중수를 거쳐, 1974년 9월 24일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사진 15> 이충무공고하도유허비(@남기현)
 

고하도 주변을 보고 목포역으로 향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나니 답사가 종료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신안군 답사는 꼭 보고 싶었던 암태도소작쟁의 현장을 가볼 수 있었고, 조선육지면발상지비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와 함께 신안군의 풍경을 즐기며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현재 답사기를 쓰는 시점은 코로나의 확산으로 사회적 상황이 좋지 않다. 빠른 시간 내에 사회적 상황이 좋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