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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태종대 경원부(慶源府) 이설(移設)·덕안릉(德安陵) 천장(遷葬)의 의미와 동북면(東北面) 변화_지요환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2 BoardLang.text_hits 2,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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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7월(통권 19호)
[나의 학위논문] 태종대 慶源府 移設·德安陵 遷葬의 의미와 東北面 변화(2020. 4. 『사림』 72) 지요환(중세 2분과) 1410년 2월 3일. 올적합(兀狄哈) 여진 무리들은 오도리(吾都里)·올량합(兀良哈)과 연합하여 경원부(慶源府)를 침입하였다. 병마사(兵馬使) 한흥보(韓興寶)는 지난 날, 여진이 경원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믿지 않았던 자신을 후회하였다. 새벽부터 성 밖을 둘러쌌던 여진들을 향해, 1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흥보는 출전하였다.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져 죽었다. 화살 세 발을 몸에 맞은 한흥보는 겨우 성 안으로 피신하였고, 3일 만에 죽었다. 병사 15명이 전사했고, 말 5필이 죽은 전투였다. 여진들은 인근 여사(廬舍)에 불을 질러 비축해둔 모든 것들을 전소시킨 후 사라졌다. 여진의 침입이 발생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태종은 여진 정벌을 명령하였다. 동시에 경원에 있는 덕릉과 안릉을 옮기고 군(郡)을 폐하여 경성(鏡城)으로 물러나 지키는 사안을 재상들에게 문의하였다. 재상들은 모두 긍정적으로 답변하였다. 의정부는 능실을 천봉(遷奉)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후 정벌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정벌 이후로 여진의 침입은 다시 시작되었고, 피해가 증가하자 태종은 경원부 이설을 재논의하였다. 태종은 경원부를 이원화하여 이설하였다. 외적 방어를 위한 거점은 경성으로, 능실은 함흥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논문 <태종대 慶源府 移設·德安陵 遷葬의 의미와 東北面 변화>는 2018년에 작성한 석사학위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으로, 경원부 이설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경원 지역과 경원부는 태조대에 북방 개척의 의미와 조선 건국의 지역적 기반에 관계된 상징성을 지녔다. 태종은 그럼에도 경원부를 옮겨 방어 지점을 경원보다 남쪽으로 정하고, 많은 지역들 중에서 덕릉과 안릉을 함흥에 옮겼다. 태종은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논문을 작성한 것이다. 태종의 경원부 이설은 동북면을 둘러싼 조선, 명나라, 여진의 이해관계 속에서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변화되는 정치적인 여건 속에서 진행되었다. 의정부는 경원에서 여진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다른 방편이 있음을 제시했지만 태종은 그것보다 경원부 이설을 추진하였다. 이는 태종이 자초한 점도 있지만 태조와 다른 국내외적 조건 속에서 즉위하였던 그가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어쩌면 최선의 조치였던 셈이다. 그림 1. 1872년 지방지도 상의 함흥부 지도(출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태종대의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국내외의 여러 정황은 북방 정책 중 특히 동북면 정책에 많이 영향을 미쳤다. 또한 태종이 취했던 변화되는 국내외 상황의 대처 방안 역시 명나라와 여진의 행보에 득실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 왕대까지 이어졌다. 특히 세종대 북방 개척은 더욱 복잡하게 국내외적 요소들이 뒤섞였을 것이다. 방어 거점의 이동과 선대 능이 추가로 천장된 함흥의 위상 변화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지역 정책은 세종의 북방 인식과 그 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림 2. 경원부 이설 추이
이 논문을 시작으로 넓게는 변방의 국방 정책, 좁게는 동북면의 축성 또는 지역 정책이 지니는 왕대별 정치적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변방의 위기가 지속되고 있을 때 조선의 왕들은 어떤 인식을 통해 어떤 정책을 추진했는지 그 추이를 살펴보고 싶었다. 더불어 동북면을 비롯한 북방뿐만 아니라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해안 지역도 마찬가지로 정리해보고 싶었다. 왕마다 상이한 조건 속에서 변방의 위기를 극복할 대책이 마련될 것이고 이는 국내외적 상황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 전기의 국방 정책은 하나의 체계성을 띠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점이 어느 정도 설명된다면, 국가의 위기가 끝났음에도 위기 상황에서 유지되었던 하나의 정치 체제가 사라지지 않고 유의미하게 잔존하여 작동된 이유를 밝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