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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공간’의 살아 있는 현장 속으로_류기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2 BoardLang.text_hits 22,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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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6월(통권 18호)

[서평] 

 

‘해방 공간’의 살아 있는 현장 속으로

 

(정용욱 지음, 『편지로 읽는 해방과 점령』, 민음사, 2021)


 

류기현(현대사 분과)


 

편지는 인류 보편의 매체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문자가 존재하는 곳에는 어떤 형태든 개인 또는 집단 간 다양한 형태의 서신 교환이 있었다. 우리는 스마트폰이 일상생활의 뗄레야 뗄 수 없는 한 부분이 된 시대, 종이 매체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펜으로 편지를 써서 주고받는다. 우리들 대부분은 설레는 마음으로 또는 슬픈 마음으로 누군가의 편지를 쓰고 읽었던 기억을 갖고 있다.

편지가 매체로서 갖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겠지만,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편지의 기록이 갖는 ‘생생함’이 아닐까 한다. 대개의 편지는 작성자가 어떤 대상에 대해 갖는 감정과 생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곤 한다. 기본적으로 사적(私的) 기록물인 편지는 공적 성격의 각종 기록물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발신자와 수신자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이면의 풍경을 날것 그대로 보여줄 때가 많다. 당신이 15년쯤 전에 누군가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가만히 떠올려보거나, 또는 20년쯤 전에 누군가 당신에게 보냈고 지금은 방 한구석에 고이 보관되어 있을 옛 편지들을 들춰내 읽어보자. 기록에 담긴 그 당시의 생생한 감정과 생각들이 당신을 옛 생각에 미소짓게 할 수도 있지만, 어디선가 엄습하는 ‘오글거림’이 온몸을 떨게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편지라고 해서 기록될 당시에 얽힌 100%의 진실을 왜곡 없이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그것이 우리 마음의 내밀한 어떤 부분을 효과적으로 증언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스마트폰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런 것들을 찾아 헤멘다
 

정용욱의 신간 『편지로 읽는 해방과 점령』은 이러한 특징을 지닌 편지라는 매체를 기반으로 미군정기(1945~1948)의 역사상을 그려냈다. 저자는 오랜 시간 동안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대한 연구를 비롯,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 가져다 준 희망이 미군정기를 거치며 ‘분단’이라는 비극으로 치환되는 역사적 동학을 밝히는데 천착해왔다. 이 책은 저자가 2019년 한 해 동안 『한겨레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바탕으로 한 만큼 연구서라기보다는 대중서라고 보아야겠지만 전문 연구자들이 곱씹어볼 만한 내용도 적지 않다.

그간 학계에 등장한 상당수 미군정기 역사 연구들은 ‘국가’가 주체가 되어 생산한 기록물을 주된 자료원으로 삼았지만, 『편지로 읽는 해방과 점령』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대부분의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은 미군정기에 접근하기 위해 주로 미국 정부 및 주한미군정에서 생산한 각종 전문, 비망록, 보고서 등 기본적으로 공적 성격을 지닌 기록물을 발굴·분석하곤 하는데, 저자는 개인들이 생산한 사적 기록물, 편지를 핵심 자료로 활용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책에는 하지(Hodge) 중장을 비롯한 미군정 관계자, 이승만과 김구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 등 익히 잘 알려진 인물들이 주고받은 편지뿐만 아니라 한국의 경제적 이권을 탐내는 미국인 로비스트, 좌우 대립의 틈바구니 속에서 ‘중도적’ 노선을 모색하는 저널리스트, 얼마 되지는 않지만 가족들이 일본에서 모은 재산을 모두 갖고 귀국하게 해달라 청원하는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미군정기를 살아간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이 등장한다.

이처럼 다양한 주체들이 생산한 편지들 중 특히 필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미군정의 ‘검열’ 기록 속에 남은 편지들이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남한 지역에 진주하자마자 민간통신첩보대(CCIG-K)를 설치하여 우편물 검열을 시작한다. 미군정은 정치적·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영향력을 지닌 한국인들의 신원을 담은 ‘감시 대상자 명단’을 작성해 이들이 주고받는 편지를 검열하는 동시에 ‘보통 사람’들의 편지도 일정 비율을 임의 추출해 검열했다. 미군정은 검열한 편지를 기반으로 「서신검열정보요약」을 정기적으로 작성했고, 검열된 편지 중 일부는 군정의 판단에 따라 수신자에게 전달이 아예 차단되기도 했다. 즉 미군정의 검열 제도는 기본적으로 개인들의 자유로운 서신 교환을 가로막는 기제였던 것인데, 역설적인 것은 「서신검열정보요약」을 비롯한 군정의 검열 기록 속에서 수신자에게 결국 전달되지 못한, 또는 삼엄한 감시의 시선을 거친 편지들을 70여 년 후를 사는 우리가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성의 CCIG-K에서 근무하는 한국인의 모습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책은 전체 7장으로 구성되었으며, 편지를 중심으로 사실상 미군정기 3년간의 핵심적 정치·사회적 흐름을 두루 훑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통사(通史)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1장 <‘점령’의 무게: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점령 통치와 탈식민>은 2차대전 종전 직후 일본을 점령한 GHQ/SCAP의 맥아더에게 보낸 재일조선인, 일본인들의 편지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냉전이 탈식민의 과제를 어떻게 덮어버렸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저자는 ‘일본 국민 = 전쟁 피해자’라는 도식의 확산에 따라 일본 사회가 조선을 비롯한 타민족에 대한 침략·식민지배가 수반하는 역사적 책임을 망각하는 과정을 평범한 일본인들의 기록 속에서 예리하게 짚어낸다. 2장 <미군정과 해방 직후 남한 정치>는 이승만, 조봉암, 오병철 등이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 1945년 말 신탁통치 파동부터 1946년 중엽 1차 미소공위의 결렬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이승만이 1946년 8월 자신의 사설 고문인 밀러드 굿펠로(Millard Goodfellow)에게 보낸 편지는 이승만이 해방 정국에서 자본가들과 결탁해 정치 자금을 운영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흥미를 끈다. 3장 <민생과 민의>는 토지개혁, 귀환자 주거 문제, 1946년의 식량 부족 문제 등 사회사적 소재를 다룬다. 토지, 주거지, 식량 등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것들조차 보장받지 못해 미군정을 향해 끊임 없이 편지를 보내야 했던 주민들의 모습은 미군 점령통치의 난맥상을 그 어떤 것보다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승만·굿펠로가 부부동반으로 찍은 사진
 

4장 <좌우 합작 정국>과 5장 <테러의 구조와 동학>은 하지, 이승만, 여운형, 주요한 등 해방 공간 정치무대의 한 가운데 있었던 인물들의 편지를 통해 1946~47년 좌우합작운동 및 미소공위 재개를 둘러싸고 전개된 제 세력 간의 이합집산과 갈등을 그리고 있다. 6장 <1947년 여름, 미 대통령 특사의 방한>은 각계각층의 한국인들이 1947년 8월 방한한 웨드마이어 사절단에 보낸 편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편지에 담긴 한국인들의 염원과는 달리 미국은 점령통치의 근본적 문제점을 해소할 큰 의지를 결여한 채 분단 정부 수립의 길로 걸어갔다. 7장 <단선·단정이냐, 통일 정부냐>는 분단 정부 수립이 필연적으로 몰고 올 “내쟁 같은 국제 전쟁, 외전 같은 동족 전쟁”을 막기 위한 마지막 시도들을 살펴본다. 그렇지만 결국 분단과 전쟁은 현실화되었고, 책의 말미에 저자가 제시한 인민군 소년의 피묻은 수첩은 현실화된 비극을 절절하게 증명한다.

이 책은 방법론적 측면에서 최근 한국현대사 분야에서 점점 많은 관심을 받는 에고도큐먼트(Ego-document) 연구의 잠재력을 보여준다. 저자도 책에서 그 개념을 간략히 설명했지만, 에고도큐먼트는 편지, 엽서, 일기, 수기, 자서전, 회고록 등 자기 고백의 형식을 지닌 사적인 기록물들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필자는 현대사를 공부하고 있기에 다른 전공 시대의 상황은 잘 알지 못하지만, 한국사 분야에서도 조선시대를 비롯한 ‘전근대사’ 연구의 경우 다양한 일기 자료나 서한 자료(석사 시절 조선시대 수업에서 『묵재일기』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던 기억이 난다)를 이미 연구에 많이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현대사의 경우 에고도큐먼트로 분류되는 자료들이 상당히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이 그것을 활용하는데는 상대적으로 인색했던 것도 사실이다. 『편지로 읽는 해방과 점령』은 해방 직후 북한의 자서전·이력서를 기반으로 서술된 김재웅의 『고백하는 사람들』(2020)과 더불어 에고도큐먼트에 관심 있는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 좋은 참조 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와 같이 연구자들에게 방법론적 통찰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편지에 드러난 해방 정국의 다양한 비사를 소개함으로써 읽는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승만이 굿펠로와 주고받은 편지는 군정기 우익 세력이 자금과 조직을 동원하는 방식, 그것을 정치공작에 활용하는 방식 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군정기의 신문과 잡지 같은 공개된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와 같은 비밀스러운 논의는 해방 공간의 ‘정치적 거래’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이승만이 어떤 수단을 동원해 해방 공간에서 최후의 ‘승리자’로 등극할 수 있었는지 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몇 년전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던 ‘정조어찰첩’이 정조가 막후에서 정치를 어떻게 ‘조종’했는지를 보여주며 연구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듯이, 해방 공간의 편지에 기록된 ‘비사’ 또한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다소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다.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가 민초(民草)다. 저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점령기의 정치사회적 변화가 가지는 역사성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변화를 추구한 보통 사람(民草)들의 역할과 행위를 가까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서술하면서 ‘민초’들이 남긴 목소리를 통해 ‘아래로부터 본’ 미군정기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임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책의 전반적인 서사와 흐름은 연구자들에게는 대체로 익숙한 정치사·운동사의 그것과 가까워 보인다. 대개 어떤 글이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표방할 때 독자는 자연스레 ‘아래’로부터의 기록과 목소리가 ‘위’로부터 형성된 기존의 역사 인식·서술에 어떤 균열을 내지 않을지,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지 않을지 기대하는 마음을 갖기 마련인데, 각종 편지를 통해 저자가 구축한 전반적인 역사상이 미군정기에 대한 기존 서사와 얼마만큼 유의미한 차별점이 있는지는 다소 의문이다. 이 책이 ‘아래’로부터의 기록을 통해 군정기의 기존 역사상에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기보다는, ‘아래’로부터의 기록을 가지고 ‘위’로부터의 공적 기록에 기반해 만들어진 기존의 역사상을 보조·강화하는데 머문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과연 ‘민초’가 내는 소리와 그들 내면의 욕망·생각이 이 책의 서술에 잘 관철되고 있는가?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책은 ‘사료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책에 실려 있는 다종다양한 편지들은 국가가 스스로에 대해서 생산한 문서들을 벗어나 보다 다양한 사료의 세계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연구자들을 초청한다. 이제 연구자들이 보다 풍성한 역사 서술을 위해 그 초청에 응답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