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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⑥] 혁명가 형제, 역사를 세우다 : 김사국과 김사민 형제_정종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3,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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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6월(통권 18호)

[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 

 

혁명가 형제, 역사를 세우다: 김사국과 김사민 형제


 

정종현(인하대 한국어문학과 부교수)


 

1. 조선공산당 통합 협상의 진풍경


1925년 11월 28일, 경성 모처 밀실에 세 사람이 모였다. 한 편에는 서울청년회 속 비밀 꼼그룹인 고려공산동맹(서울파) 협상단인 최창익과 정백이 자리했다. 이들의 맞은편에는 화요파 조선공산당 협상 대표 주종건이 마주하고 있었다. 이 모임은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유력 분파인 서울파와 화요파가 당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예비 접촉의 자리였다. 이후 대표를 바꾸며 도합 세 차례에 걸쳐 양 파벌 사이의 통합모임이 이어졌지만, 최종적으로는 결렬되었다.주1)
식민지 조선의 초창기 공산주의 운동사는 국내외에서 여러 분파들이 복잡하게 뒤얽힌 파쟁의 역사였다. 러시아, 만주, 상해를 배경으로 활동하던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대립했다. 국내에서도 대중조직을 주도한 서울파,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국내지부격인 서울상해파(사회혁명당), 일본 유학생들의 북풍회, 그리고 이후 조선공산당의 주류가 된 화요파 등 여러 분파가 당창건과 운동의 헤게모니를 두고 경합했다.주2)
1925년 4월 17일 화요파를 중심으로 창립된 조선공산당은 그 해 11월 22일 발생한 ‘신의주사건’주3)으로 많은 청년 당원들이 검거되며 타격을 입었다. 화요파는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서울파’와 통합해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첫 예비접촉에서 화요파는 중앙간부 7인 중 2명만을 서울파에게 할당하고, 서울파의 리더였던 ‘김사국 동지는 당분간 조선공산당에서 완전히 제외할 것’을 주장했다. 서울파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이어진 2차 회담에서 화요파는 중앙간부를 서울파보다 화요파에 1인 더 할당할 것, 김사국을 제외할 것을 재차 요구했다. 서울파는 불리한 중앙위원 배분을 받아들이고, 김사국도 당분간 휴양할 것이니 화요파도 이 문제를 함구하는 선에서 합의하자고 제안했다. 화요파는 서울파의 제안을 수용하는 듯했지만, 3차 교섭에서 1대1 합당이 아니라 서울파 성원들의 개별 입당과 중앙간부는 모두 화요파로만 채울 것을 요구함으로써 결국 협상을 깨버렸다.
화요파는 왜 성사 직전의 통합을 뒤엎었을까? 1926년 3월 코민테른은 화요파 중심의 조선공산당을 정식 지부로 승인했다. 곧이어 3차 교섭이 진행 중인 1926년 5월 8일에 서울파의 리더였던 김사국이 죽었다. 코민테른의 권위를 등에 업은 데다가, 눈엣가시 같던 서울파의 리더마저 죽자 화요파는 통합 대신 흡수로 선회한 것이다. 화요파는 왜 상대파 리더만 빼놓고 통합하자는 억지를 부렸을까? 화요파가 막무가내로 떨쳐내고 싶었던 김사국은 누구인가?

 

2. 식민지 해방의 빛, ‘해광(解光)’의 삶


1926년 5월 8일 오후 5시. 조선독립과 무산대중을 위한 가열한 활동에서 얻은 폐병으로 김사국이 서른 다섯 한창 나이에 불꽃같은 삶을 마감했다. 죽음은 역설적으로 누군가의 삶을 보여주는 척도다. 당대 저널리즘은 다투어 “조선 사회운동의 제일인자”주4)의 영면을 애도했다. 5월 12일에는 “정우회(政友會), 전진회(前進會), 조선노동당, 청년총동맹, 형평본사(衡平本社)” 등 62개 단체 1,000여 명의 인파가 운집한 ‘사회운동단체연합장’으로 영결식이 열렸다.
 

그림 1. 「육십단체연합장 고(故)김사국씨 영결식」, 『시대일보』 1926. 5. 13.
 

김사국의 영결식에 모인 사회단체들의 면면과 그가 죽은 직후부터 여러 해에 걸쳐서 서울·제주·춘천·부산·거제·도쿄·간도 등 국내외 각지에서 잇달아 열린 추도회들은 김사국의 삶의 치열함과 그 대중적 영향력을 방증한다. 총독부 당국은 죽은 뒤 1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이어진 김사국 추도회를 경계해야만 했다.주5) 화요파가 김사국만 빼자고 생떼 부린 것도 그의 리더십과 대중적 영향력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힘이 어디서 왔는지 그의 삶을 살펴 보자.
김사국은 1892년 11월 9일 충남 연기에서 소지주였던 김경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경수는 젊은 아내 안국당과 어린 사국(思國)·사민(思民) 형제를 남겨두고 요절했다.주6) 김경수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어린 형제에게 붙인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돌림자인 ‘思’에 ‘國’과 ‘民’을 붙인 뜻은 ‘위국위민(爲國爲民)’의 유교적 규범과 관련된 듯하다. 형제는 나라와 민중을 위한 실천적 삶으로 아버지의 뜻 이상으로 그 이름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
안국당은 남편의 3년상을 치른 후 친정에 의지하고자 어린 두 아들과 충주로 이주했다. 친정에서 1년여를 보내던 어느 날 술사로부터 두 아들이 스물 이전에 요절할 운명이며 ‘불전에 축수하면 장수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녀는 곧장 두 아들을 데리고 금강산 유점사로 들어갔다. ‘해방의 빛’처럼 읽히는 김사국의 필명 ‘解光’은 이 시절 법명일지도 모른다. 머리를 깎고 장삼을 두른 안국당은 정성껏 불공을 드리면서, 형제에게 선생을 붙여 한학을 공부시켰다.
허나 한학만으로는 사람 구실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세 모자는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김사국은 보성학교에서 배우고 17세 때인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피혁회사에 다니며 고학했다. 1909년에는 도쿄 한인유학생들의 연합단체인 대한흥학회에 가입해 『대한흥학보』 출판부원으로 활동했다. 귀국하여 한성중학에서 수학하고 함경도 덕원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18년 무렵 만주로 건너가 관동도독부 육영학교에서 고등교육을 이수했다.
1919년 2월 경성으로 귀국한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김사국은 당대 조선의 민족·사회운동의 일선을 떠나지 않고 그 중심에서 활동한다. 3·1운동 때 학생대표를 지낸 강기덕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사국이 입국해 학생층의 독립선언문을 따로 기초했다고 회고했다.주7) 1919년 4월 김사국은 13도 대표자들로 조직된 ‘국민대회’를 개최해 임시정부 선포를 주도함으로써 한성정부 수립의 계기를 마련했다. ‘국민대회’ 사건으로 그는 1년 6개월 형을 살았다.
이때까지 김사국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가진 ‘대동단’ 계열의 민족주의자였다.주8) 출옥 후 김사국은 민족해방을 위한 새로운 이념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국내 중심의 사회주의 대중 활동을 지향했다. 청년운동에선 서울청년회, 노동운동에선 노동대회를 중심으로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특히 서울청년회는 두드러진 활동성을 보였다. 사람들은 이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사회주의자를 ‘서울파’라고 불렀다.
김사국은 서울파 공산주의그룹의 탁월한 지도자였다. 1921년 11월 도쿄로 건너가 흑도회 창립에도 참여했던 김사국은 1922년 귀국했다. 그가 대표로 있던 서울청년회는 김윤식 사회장 사건과 코민테른 자금을 상해파 국내지부에서 유용한 ‘사기 공산당’ 사건을 거치며 청년연합회에서 탈퇴하고, 새로운 전국 단위 사회운동체로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주창하였다. 일련의 사회운동을 하며 김사국과 서울파는 대중 속에서 그들과 함께하는 활동을 조직했다.
1922년 10월 21일 김사국과 서울파가 개최한 ‘지게꾼 취체 문제’에 대한 비판 집회는 한 사례다. 사설지게꾼 취체사무소의 착취에 대해 고발하는 이 보고회에는 400여명의 노동자들이 청중으로 참여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주9)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택배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고발하며 함께 싸우는 자리였다. 김사국은 “군의 머리는 천하에 가장 밝아서,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비평은 듣는 자로 하여금 경탄케 한다”주10)는 평판을 들을 만큼 명석했나보다. 하지만 그러한 명석함 보다 대중의 고통을 나누며, 진심을 다해 함께 싸우는 열정, 그것이 김사국의 진정한 힘이자 화요파가 두려워했던 그의 영향력의 본질이었다.

 

3. 코민테른과 식민지의 전위당 경쟁


김사국의 삶은 합법적 활동 영역과 공산주의 전위당이라는 비합법의 영역에 걸쳐 있었다. 1923년 2월 10일 김사국을 중심으로 서울청년회 내부에 사회주의 전위당인 고려공산동맹이 결성되었다. 1923년 봄 ‘고려공산동맹’ 책임비서 김사국은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코민테른과의 상설적인 연락기관을 설치하고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받는 임무가 그에게 부여되었다. 김사국은 코민테른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를 얻진 못했다.
고려공산동맹 뿐만 아니라 국외의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고려공산당, 국내의 북풍회 계열, 화요파 계열 등이 전위당을 결성하고 조선공산당의 대표성을 승인받기 위해서 경합했다. 코민테른은 처음에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합동을 추진했고, 1926년 3월 31일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을 통해 화요파 조선공산당을 승인하였다. 코민테른은 자신들이 승인한 조선공산당과 투쟁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꼼그룹(공산주의그룹)도 인정하면서 분란의 씨앗을 남겼다.
김사국은 초기부터 조선공산당이 국내 운동을 기반으로 결성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단일당을 창립하기 위해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를 열었다. 김사국은 국내에 아무런 기반을 갖지 못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당통합을 주도하는 것에 반발했다. 화요파 등 국외로부터 잠입한 해외파 중심 전위당에도 반대했다. 당시 사회운동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어 보자.

일본갔다 온 자는 그저 피상적으로 일본이 어떻다 할 뿐이오 구미에 갔다 온 자는 또한 피상적으로 구미를 꿈꿀 뿐입니다. 조선에서 1년간 소작권 피탈자가 기만명인지 조선의 실직자가 1년간 해외로 몇만명이 나아가는지 조선의 토지는 1년간 얼마나 매진(賣盡)되는지 그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구제하고 그것에 대한 방어 또는 투쟁할 무슨 방편을 생각하는 청년이 적습니다.(중략) 나는 이것을 여러 동지와 늘 말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조선에는 아직까지 신임할 만한 지도자 없는 것 그것이외다. 사회운동이나 민족운동을 물론하고 상당한 지도자가 아직 뵈지 않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조선에는 아직 위대한 사상가가 없고 뜨거운 열정가가 없습니다. 민중의 앞에 솔선해 나서서 불식불면(不息不眠)히 일하는 도덕적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 아직 없습니다.주11)


죽기 세 달 전 김사국이 잡지 『개벽』에서 조선에 대한 걱정을 논하는 한 대목이다. 그는 소작권을 뺏긴 자들은 얼마인지, 실직자가 어느 정도인지, 토지는 얼마나 수탈되는지 등 조선의 정치경제적 처지를 이해하고, 어떻게 투쟁할까를 고민하는 청년이 적다는 점을 우려한다. ‘외풍(外風)을 쐬고’ 와서 일본과 구미를 보편적 전범으로 내세우는 경박한 지식 청년에 대한 비판이지만, 이른바 사회운동의 해외파들에 대한 못마땅한 심기도 읽을 수 있다.
생각해 보면 김사국이야말로 조선의 안과 밖을 두루 누비고 다닌 사람이다. 일본 유학과 흑도회 활동, 대륙 관동주에서의 중국 유학, 코민테른의 승인을 위한 연해주 생활, 그리고 사회운동의 후진 양성을 위한 간도 ‘동양학원’과 영고탑 ‘대동학원’ 시절에 이르기까지 그는 ‘外風’을 흠뻑 맞으며 동아시아를 주유했다. 하지만 그는 식민지 사회주의자의 활동의 거점은 국내라고 확신했다. 서울의 청년회관에서 맞은 그의 죽음은 이러한 신념의 상징적 구현처럼 느껴진다.
김사국은 왜 해외의 사회주의자들을 불신했을까? 한기형 교수는 이 시기의 작품인 염상섭의 『만세전』(1922)과 심훈의 『동방의 애인』(1930)을 겹쳐 읽으며, 식민지의 안과 밖이라는 역(域)의 차이를 포착한 바 있다.주12) 조계지인 상하이, 사회주의의 수도인 모스크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공간인 도쿄는 동질의 공간이었다. 급진적 사상이 굽이쳤지만 그곳은 기본적으로 안온하고 평화로운 장소였다. 반면, 식민지는 ‘속중(俗衆)’들의 저속하고 고단한 삶들이 뒤엉킨 불안과 긴장의 땅이었다.
물을 떠나면 물고기가 죽듯이, 국내 민중들과 동떨어진 해외의 공산주의 전위당이란 공상일 뿐이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에 대한 김사국의 적대감에는 이런 생각이 깃들어 있었던 듯하다. 그는 국내에서 고통받고 있는 “무산 민중을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을 일관되게 주창하면서, “민중의 앞에 솔선해 나서서 불식불면(不息不眠)히 일하는 도덕적 책임감이 강한” 지도자를 염원했다.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에서처럼, 조선 민중은 그가 죽고서야 김사국이 기다리던 지도자가 사실은 김사국 그 자신이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4. 혁명가 김사민의 용맹과 비극


김사민은 형 보다 여섯 해 뒤늦은 1898년에 태어났다. 서울파의 영수였던 형의 큰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김사민 또한 3·1운동 때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민족의 독립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불꽃처럼 살았던 청년 혁명가였다. 김사민은 형이면서 지도자인 김사국과 보조를 맞추며 노동대회 및 자유노동조합과 서울청년회, 그리고 고려공산동맹에서 경기 지역 오르그 등을 맡으며 서울파 수뇌부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김사민이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임경석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김사민은 소학교를 마친 후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 조선보병대란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 이후 ‘이왕가’의 경비를 위해 잔존시켰던 조선인 군대의 명칭이었다. 1931년까지 존속했는데, 해산 당시 병력은 200명이었다. 무기와 탄약, 인사관리 등을 조선 주둔 일본군이 관장했다. 김사민은 이 부대에서 3년간 근무했다.주13)
3.1운동 당시 국민대회 사건으로 김사국이 투옥 중일 때 동생 김사민은 새로운 투쟁을 조직했다. 1920년 4월 조직된 조선노동대회 간사로 활동하던 김사민은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조선을 내방했을 때를 기회로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일대 시위운동을 기획했다. 김사민은 계획이 탄로나 동료 15인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보안법’ 5조 위반으로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외딴섬 덕적도에 1년간 거주 제한 명령을 받았다.주14)
1922년 8월에는 형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의 5인 간부진에 나란히 취임했다. 국제공산청년회 가입 단체로서 조선의 공산주의 청년운동을 지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이후 독자노선을 걸어간 고려공산동맹의 경기도 책임자로, 또 합법공간인 노동대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김사민은 ‘신생활사 필화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신생활』11호(1922)를 ‘러시아혁명 제5주년 기념특집호’로 간행하면서 ‘자유노동조합선언문’을 게재한 혐의였다.
자유노동조합이란 1922년 10월 29일에 창립한 노동단체다. 서울의 지게꾼과 막벌이꾼 200여 명을 회원으로 한 직업별 노동조합이었다. 이 단체는 일제하 노동운동의 역사 속에서 획기적 의의를 갖는 조직이었다. 주로 지식인 출신자로 구성된 여타 노동자 단체에 비하면, 말 그대로 노동자 중심의 조합이었다. 김사민은 자유노조 결성의 중심인 의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선언문이 실린 『신생활』의 동인 기자였다. 이 사건으로 김사민은 징역 2년형을 선고받는다.


그림 2. 「신생활 사건의 공판 풍경」, 『매일신보』 1922. 12. 27.
 

옥중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김사민은 “항상 불평을 가지고 무슨 이유로 불법 감금을 하느냐고 부르짖으며” 여러 차례 강하게 저항했다. 1923년 2월 1일 간수장이 그를 불러 “설유를 하고 갔다가 구류하려고 구치감문을 들어설 때”에 김사민은 “용맹하게 간수의 칼을 빼어 문턱에 섰던 간수 요코오 마사이치(橫尾政一)의 머리를 찍”어서 중상을 입혔다.주15) 사건을 전하는 당시 신문 기사들에서는 김사민의 용맹한 저항에서 받은 통쾌한 느낌이 전해진다.
그렇지만, 그 용맹한 행동의 대가는 혹독했다. 사건이 발생하고 석 달이 지난 뒤에야 가족 면회가 허용되었다. 면회장에 나선 김사민은 홀로 걷지 못했고, 간수 3명의 부축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어머니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서도 겨우 눈을 한 번 들어보았을 뿐 아무 소리 없이 멍하게 허공만 쳐다보았다. 간수들은 “이따금 정신병 증세가 일어나면 그럴 때가 있다”고 얼버무렸다.주16) 심신이 모두 망가진 김사민은 1924년 7월 26일 만기 출소했다.
도대체 어떤 고문이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박헌영은 고려공청 사건으로 자신이 받은 고문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에 따르면 당시 체포된 사회주의자는 경찰서의 비밀장소로 끌려가서 “냉수나 혹은 고춧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거나 손가락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가죽채찍으로 때리거나 긴 의자에 무릎을 꿇어앉힌 다음 막대기로 관절을 때리거나” 하는 고문을 당했다. 7, 8명의 경찰들이 고문희생자가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축구공처럼 주먹으로 치고 때리는 ‘축구공놀이’라는 고문도 있었다.주17)
조선인 사회주의자는 ‘あか(빨갱이)’이자 ‘불령선인’의 이중의 비국민으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박헌영 전기에서는 그가 정신병으로 위장해 출옥했다고 영웅화하지만, 실제로 정신착란이었을 개연성이 크다. 정신을 회복한 박헌영과 달리 조선공산당의 제2대 책임비서 강달영은 고문에 의한 정신이상으로 고생하다 죽었다. 일본인 간수에게 중상을 입힌 김사민에게 가해졌을 고문이 어땠을지는 미루어 짐작할만하다. 그 고문의 순간에 이미 그는 살해당한 셈이다.

 

5. 비극 속에서 움튼 소망, 역사를 세우다!


일가의 비극은 계속 이어졌다. 1928년 1월 5일 남편 사후 3년여만에 김사국의 평생의 동지이자 부인인 박원희가 죽은 것이다. 그녀는 고려공산동맹원으로 그 자신 쟁쟁한 사회주의 활동가이자 김사국·김사민 형제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다. 그녀는 김사국의 유지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을 하면서, 중앙집행위원으로 1927년 근우회 창립에도 참여했다. 한창 활동 중에 감기 기운으로 앓아누웠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갓난쟁이 딸 하나만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김사국의 7주기를 맞아 남은 가족의 근황을 전하는 기사에 따르면, 안국당과 김사민은 견지동의 청년총동맹 사무실 한쪽 구석의 쪽방에 기거하고 있었다. ‘장발홍염의 주의자’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김사민과 안국당은 구걸로 연명했다. 문득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활동가의 감각이 살아난 것일까? 김사민은 각종 신문지 수십관을 방 한모퉁이에 정연히 쌓아 두고 있었다고 한다. 폐인이 된 아들을 보살피며, 먼저 간 장남을 떠올려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 사국이는 금년이 마흔 둘인데 설흔 다섯에 죽었답니다. 오늘이 음력으로 삼월 스무나흣날이지요? 내일 모레가 우리 사국이 제삿날인데 구걸해다 먹고사니 제사를 지낼 수가 있어야지요. 작년도 재작년도 제사를 못 지냈어요. 제사 한 번 지냈으면……주18)


죽은 아들의 나이를 헤아리고 있는 안국당의 절절한 슬픔이 전해 온다. 이 기사는 김사국·박원희 부부의 유일한 딸인 김사건이 곤궁하나마 외조모의 보살핌 속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史建’. 딸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자식의 이름에는 부모의 욕망이 깃들기 마련이다. 자식의 평안과 부귀영화를 바라는 건 부모들의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이들 혁명가 부부는 딸의 안녕과 부귀 대신에 “역사를 세우다”라는 엄숙한 소명을 이름에 담았다.
‘史建’에서는 자신들의 딸이 올바른 역사의 주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더불어, 고통받는 민중들과 함께 해방의 역사를 만들어가겠다는 부부의 다짐도 느껴진다. 이들이 일궜던 서울청년회는 1929년 8월 30일 해체되었으며, 서울파도 사회주의 전위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분해되었다. 하지만 이들 비극의 혁명가 가족이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 뿌린 운동의 씨앗들은 이후 해방의 아름드리나무로 자랐다. 올곧은 역사를 세우고 간 이 가족을 기억해 두자.

 

미주

1. 「朝鮮唯一共産黨組織問題に關する報告:本同盟と火曜會との交涉顚末」(148-153쪽)(1926.10) 러시아문서보관서에 보관되어 있는 이 자료는 서울청년회 내 콤그룹인 고려공산동맹이 화요파와의 통합 논의를 코민테른에 보고한 문서이다. 전명혁 『1920년대 한국사회주의 운동연구』, 선인, 2006, 303-312쪽을 참조.
2. 아직까지 식민지 조선의 초창기 사회주의 운동과 조선공산당의 복잡한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명료하게 정리한 책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각기 다른 공간과 분파에 초점을 맞춘 다음의 훌륭한 단행본들을 종합해 읽어보면 그 전체상의 윤곽을 그릴 수 있다. 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역사비평사, 2003, 이현주, 『한국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일조각, 2003, 전명혁, 앞의 책.
3. 1925년 11월 22일 밤 10시 무렵 신의주 경성식당 2층에서 신의주의 청년단체인 신만청년회 회원들이 결혼식 피로연을 열고 있었다. 1층에서는 변호사 박유정 등이 신의주경찰서의 일본인 순사와 한인 순사와 회식 중이었다. 실랑이 끝에 청년회원들은 이들을 집단구타했다. 이후 일본 경찰의 가택수색으로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박헌영이 상해를 통해 코민테른에 보내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의 회원 자격 사표(査表)’ 통신문 3통의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후 고려공산청년회에 대한 경찰의 일제 검거가 시작되어 조선공산당은 타격을 입고 활동이 크게 위축된다.
4. 「김사국씨 영면-조선사회운동의 중진으로 파란중첩한 씨의 삼십평생」, 『동아일보』, 1926. 5. 10.
5. 「鳴咽悽愴裡 김씨추도식거행-거긔에도 금지가 여러차례」, 『조선일보』, 1927. 5. 10.
6. 김사국, 김사민의 가계와 출생연월일, 부친이 죽은 정확한 시기 등은 당대 신문보도마다 각기 다르게 보도하여 혼란을 초래한다. 최근 전명혁은 김사국의 호적부의 발굴을 통해서 이 문제를 정리하고 있다. 김사국의 호적상 출생일은 1895년 11월 9일이지만, 이는 호적상 기재 착오 혹은 늦은 출생신고 때문으로 1892년 11월 9일생이다. 동생은 김사민은 그와 여섯 살 터울인 1898년 생이며, 그들의 부친인 김경수가 죽은 것은 김사민이 호주를 승계한 광무8년(1904) 무렵, 즉 김사국이 13세 때로 보인다. 이상은 전명혁, 앞의 책, 434∼444쪽.
7. 「3·1절을 앞두고 떠오르는 피의 기록, 당시의 전국학생대표 康基德氏談」, 『경향신문』, 1950. 2. 26.
8. 이에 대해서는 이현주, 앞의 책을 참조.
9. 「擔軍總取締問題」, 『동아일보』 1922. 10. 23.
10. ‘소식’, <청년조선 1>, 1922년 2월15일, 여기서는 임경석, 「임경석의 역사극장-혁명으로 살다간 ‘붉은 형제’」, 『한겨레21』 1065호, 2017. 6에서 재인용.
11. 김사국, 「現下 朝鮮에 대한 憂慮點과 喜悅点(各人各觀) -세 가지 걱정과 세 가지 기쁨」, 『개벽』 1926년 2월호, 35∼36쪽.
12. 한기형, 「통속과 반통속, 염상섭의 탈식민 서사」, 『식민지 문역』,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9.
13. 임경석, 앞의 글.
14. 「김씨는 1년간 거주제한」, 『동아일보』 1920. 9. 2.
15. 「재옥 중의 金思民, 看守의 검으로 看守를 斫傷」, 『조선일보』 1923년 2월 2일자.
16. 「김사민의 위독설」, 『조선일보』 1923년 5월 9일자
17. 박헌영, “죽음의 집, 한국의 감옥에서”; 임경석, 「박헌영과 김단야」, 『역사비평』 2000년 겨울호, 128∼129쪽에서 재인용.
18. 「방초는 푸르것만 가고 못오는 이의 유족은?」(4), 『조선일보』 1933.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