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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물 열전②] 고려 사람으로 살았던 남당(南唐) 사람, 채인범_강민경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2,9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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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7월(통권 19호)
[고려 인물 열전] 고려 사람으로 살았던 남당(南唐) 사람, 채인범강민경(중세1분과) 3‧1운동이 일어나고 얼마 뒤인 1920년 3월, 조선총독부박물관의 협의원協議員이었던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熊彦, 1870-?)는 박물관이 수집하려는 유물의 감정평가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얼마 전 조선총독부박물관과 자주 거래하던 한 골동상이 다양한 물건을 가져와 사라고 내밀었는데, 그 물건들에 대한 감정 평가가 막 끝났기 때문이다. 그의 붓은 무심히 종이 위를 오가며 글자를 적어 내려간다. 이제 값을 치르면 물건들은 박물관에 들어올 것이다. 그림 1. 채인범 묘지명의 구입 평가서, 대정大正 9년(1920) 3월 30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https://www.museum.go.kr/modern-history/)
평가서의 맨 앞을 차지한 ‘채인범석관급묘지’ - 곧 채인범(蔡仁範, 934-998)의 석관石棺과 묘지명墓誌銘에는 60원이라는 가격이 매겨졌다. 단칸방 월세가 1원, 학교 선생님의 월급이 20원, 군수 월급도 70원 하던 시절이니 상당한 액수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천 년 전의 역사를 거두어들이는 가격이라고 생각하면 참 싸지 않은가. 그렇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묘지명인 「채인범 묘지명」은 박물관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고려사高麗史』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같은 공식 역사 기록에서 찾을 수 없던 한 인간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도 오늘의 우리들에게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채인범의 선택, 남당에서 고려로 신라(新羅, BC 57-935)가 멸망하기 1년 전인 934년, 바다 건너 오(吳, 902-937)의 항구도시 천주泉州에서 사내아이 하나가 태어났다. 그의 부모나 선대가 누구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성은 채씨蔡氏요, 이름이 인범仁範이었음은 분명하다. 그가 네 살 되던 해 천주를 다스리던 오가 멸망하고 남당(南唐, 937~975)으로 왕조가 교체되었으므로, 그는 남당의 천주 사람으로 자라났다. 그가 남당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채인범의 고향이 당시 손꼽히는 무역항이었던 천주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아무래도 바깥세상에 호기심이 많은 청년의 삶을 살지 않았을까. 어쩌면 일찍 과거를 보아 관료가 되었을 수도 있고, 평범한 독서인이나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으로 지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채인범은 새로운 자신의 삶을 개척하였다. 채인범의 행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가 37세 되던 970년부터이다. 그는 이때 본주지례사本州持禮使, 곧 천주 지방관이 고려에 보내는 사신의 일원으로 고려에 건너왔다. 지례사의 격은 정식 사절에 비해 낮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외교란 국가와 국가 사이의 중요한 문제이므로, 지방관이 보내는 사신이라도 결코 인선을 허투루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지례사의 일원이었던 채인범은 끝내 고려에 눌러앉았다. 그렇다면 채인범은 왜 고향을 등지고 고려에 눌러앉게 된 것일까? 이를 알려면 채인범이 살았던 시기의 상황을 한 번 되짚어보아야 한다. 10세기, 격동의 동북아시아 그가 살았던 10세기 동북아시아는 일대 격변이 휘몰아치던 난세亂世였다. 세계제국 당唐이 망한 뒤 그 영역에는 지역의 군사통치자인 절도사節度使들이 황제를 자칭하며 이른바 오대십국五代十國이 난립했고, 거란契丹은 요(遼, 916-1125)를 세운 뒤 발해(渤海, 698-926)를 멸망시키고 만주 일대를 석권하였다. 천 년의 왕국 신라에도 왕족들 사이에 왕좌를 둔 큰 다툼이 벌어졌으며, 이윽고 호족豪族이 각 지역에서 발호하면서 끝내는 후삼국後三國으로 나뉘었다. 채인범이 태어나기 30여 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채인범이 태어나 자라나는 동안에도, 고려가 삼한三韓을 하나로 묶어 혼란을 수습해 가는 와중에도 중국 지역의 분열과 혼란은 그치지 않았다. 그림 2. 채인범 묘지명, 가로 73.0cm, 세로 107.0cm, 두께 10.5cm, 무게 230kg,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관7884)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http://www.emuseum.go.kr/main)
이 큼지막한 묘지명의 주인공 채인범이 고려에 간 970년은 후주後主 이욱(李煜, 재위 961~975)이 남당을 다스리던 때였다. 남당은 오대십국의 여러 왕조 중에서도 경제적, 문화적으로 큰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이 시기 남당은 화북 일대를 통일한 후주(後周, 951-960)와 북송(北宋, 960-1127)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특히 채인범이 고려에 간 1년 뒤인 971년, 남당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던 남한(南漢, 909-971)이 북송에 멸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눈앞에 다가오던 국가의 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지식인 채인범에게 고려로의 사행使行은 하나의 기회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고려를 택했을까. 우선 남당과 고려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많은 교류가 있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 고려가 남당에 공식적인 사절을 보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십국춘추十國春秋』와 『육씨남당서陸氏南唐書』, 961년 남당의 사신 장료章僚가 남긴 『해외사정광기海外使程廣記』 같은 남당측 자료를 보면 고려와 남당이 건국 직후부터 서로 사신을 파견했었음을 알 수 있다.주1) 채인범의 묘지명에서 보이듯 조정 차원이 아니라 남당의 지방관들도 고려에 사신을 보냈었으며, 그들이 고려 국왕을 알현하는 것도 가능했다고 보인다. 그 주州의 지례사 … 를 따라 … 동쪽의 해 뜨는 곳에 다다라 광종光宗께서 왕위에 있던 건덕乾德 8년(970, 광종 21) 우리 조정에 배알하니 … 오월(吳越, 907-978)이 후백제(後百濟, 892-935)과 책봉-조공관계를 맺었던 사례처럼 오대십국 시기 존재했던 여러 왕조는 한반도에 있던 세력과 다양한 방식으로 교섭하곤 했다. 남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뿐만 아니라 946년 남당에서 편찬된 『속정원석교록續貞元釋敎錄』이나 952년 남당의 승려 정균靜筠이 편찬한 『조당집祖堂集』이 고려 재조대장경 안에 포함되어 있고주2) 개성의 고려시대 유적에서 남당의 동전 당국통보唐國通寶가 출토된 적이 있어주3) 두 나라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물적 교역이 있었음을 방증한다. 물건이 오고 가면 사람과 소식도 오고 가는 법, 채인범에게 고려는 낯설기만 한 나라가 아니었을 것이다. 백이伯夷의 옛 땅이고, 기자箕子의 옛 관문이로다. 스카우터 광종, 외국의 인재를 끌어들이다 채인범이 고려에 온 시기가 광종(재위 949-975) 때였던 것도 주목되는 사실이다. 최승로(崔承老, 927~989)는 <오조정적평五祖政績評>에서 그가 섬겼던 광종대의 정치를 이렇게 평가했다. 쌍기(雙兾, ?-?)를 등용한 뒤로부터 문사文士들을 높이고 중용하여, 대접이 지나치게 후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재능 없는 사람[非才]들이 지나치게 등용되어 순서를 따르지 않고 별안간 승진하여 일 년도 안 되어 갑자기 재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 이에 남북용인南北庸人이 다투어 청탁하고 의탁하였는데, 지혜와 재능이 있는지는 논하지 않고 모두 특별한 은혜와 예절로써 대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후생後生은 다투어 나아가고, 오래도록 덕 있는 자들은 점점 쇠락하였습니다. 비록 화풍華風은 소중하게 여기셨지만, 중화의 훌륭한 법식은 취하지 못하셨으며, 중화의 선비는 예의로 대우하셨지만, 중화의 현명한 인재는 얻지 못하셨습니다. 그림 3. 『고려사』 최승로 열전의 ‘남북용인’ 부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고려사) 최승로가 보기에 광종대는 ‘재능 없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이 등용되었던 때였다. 쌍기로 대표되는 오대십국 출신 귀화인 - “중화의 선비”들도 그 비판의 주요 대상이었다. 특히 최승로는 그들을 “특별한 은혜와 예절로써 대접”했다는 것, 곧 광종이 비용을 엄청나게 치르면서 스카우트했다는 데에 비판의 날을 세웠다. 광종에게 스카우트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채인범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집 1채와 종[臧獲], 토지, … 와 여러 물품을 내려주고, 그 필요로 하는 것들을 모두 다 관官에서 지급해주라고” 할 정도로 후하게 대접받으며 벼슬길에 올랐다. 그렇다면 그 스카우트는 정말로 과도한 것이었을까. 기존의 연구에서는 광종대 고려에 온 오대십국 출신 인물들을 ‘남북용인’의 한 사례로 해석했다.주4) 하지만 채인범은 용인庸人, 곧 쓸모없는 사람이기는커녕 묘지명에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달하고, 문장을 잘 지었다”라고 특별히 기재할 정도로 능력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그가 고려에서 처음 맡은 관직이 외교 실무를 담당하던 예빈성禮賓省 낭중郞中이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광종대의 낭중이 어떤 품계의 관직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문종대文宗代 정비된 관제에 따르면 정5품의 실직實職이었다. 고려시대 한계漢系 귀화인들이 처음 받는 관직은 대체로 6품 이하였으며, 5품 이상인 경우라도 실직인지 확실치 않은 경우가 많다.주5) 광종 후반기에 고려에 온 채인범이 실직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충분히 능력 있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주6) 아울러 채인범은 광종과 경종대景宗代의 거듭되는 숙청에서도 살아남아 목종대穆宗代까지 주로 예부禮部의 관료로 재직하면서 외교와 예제禮制 분야에서 활약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가 채인범을 우대했던 이유를 좀 더 자세히 보여준다. 남당은 당의 계승을 명분으로 일어난 왕조였으므로, 건국 초부터 당초唐初의 제도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초당初唐 시기와 만당晩唐 시기의 제도를 혼용해 국가를 운영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려 또한 당제唐制를 받아들였지만 고려의 현실에 맞게 변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남당의 제도를 크게 참고하였다고 추정된다.주7) 이때 채인범과 같은 남당 출신 지식인들이 이를 도왔을 것이다. 북중국 후주 출신의 문신 쌍기가 과거제科擧制의 도입을 비롯해 광종대 개혁과 제도 정비의 큰 축을 맡았음은 유명하다. 하지만 강남江南의 지식인들 또한 그에 못지않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인재를 등용할 때 그 출신지를 가리지 않고 적재적소에 활용하고자 했던 입현무방立賢無方의 정신을 광종이 여기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는 그들을 품었고, 그들은 고려를 도왔다 채인범은 목종(穆宗, 재위 997-1009) 1년인 998년 6월 향년 65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마지막 직책은 차관급이라 할 수 있는 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郞이었고, 죽은 뒤에는 바로 예부상서禮部尙書, 지금의 외교부 장관 직위가 추증되었다. 묘지명에 의하면 그는 두 번 혼인하여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다. 그들은 모두 고려 지배층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묘지명을 만들 당시 큰아들은 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 감수국사監修國史(종1품)에 이르렀다. 둘째 아들은 합문지후閤門祗候(정7품), 셋째 아들은 군기주부軍器主簿(정8품)였고, 막내 아들은 출가하여 불주사佛住寺라는 절의 큰스님이 되었다. 희한하게도 채인범의 묘지명에는 그 아들들의 이름이 한 자도 적혀있지 않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채충순(蔡忠順, ?-1036)이 채인범의 큰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주8) 채충순 역시 아버지만큼이나 고려에 공헌했고, 아버지보다 높은 이름을 역사에 남겼던 인물이다. 그림 4. 고려사 채충순 열전 부분 (출저: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고려사) 채충순은 목종대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있으면서 김치양(金致陽, ?-1009)의 난을 진압하고 현종(顯宗, 재위 1009-1031)을 옹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채인범의 묘지명을 보면 그는 현종이 즉위한 해에 “은총을 입어” 정2품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는데, 이는 현종 즉위 공신이었던 채충순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채충순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현종의 명을 받아 요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현종이 거란군의 침입으로 위기에 빠져 몽진蒙塵할 때마다 그를 호종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종도 그를 매우 신뢰하였다. 현종은 자신의 부모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절 현화사玄化寺에 비석을 세울 때 비문 글씨와 음기(陰記, 뒷면에 새기는 글)를 채충순에게 맡겼고, 또 채충순이 1030년 병에 걸려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할 때 현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정종(靖宗, 재위 1034-1046) 2년인 1036년 채충순이 숨을 거두자 나라에서는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공을 기렸다. 주목되는 점은 채인범-채충순 부자의 출신을 두고 당시 고려 사람들이 문제를 삼았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승로마저도 쌍기 같은 중국 지역 출신 인물들의 자질을 거론하였지, 그들이 외국인이라는 점을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그들을 받아들여 이룩할 고려의 발전이었고, 그만큼 고려는 외국의 인재를 자국의 사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70여 년의 역사 속에서 귀화한 외국인이나 영주권자들이 고위 공직을 맡았던 사례가 몇이나 되던가. 만약 외국 출신 인물에게 외교부 국장을 맡긴다거나 이주노동자의 아들이 국무총리에 지명되었다고 하면 과연 어떤 반응들이 나올까. 그러나 천 년 전 고려에서는 이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외국인이라고 차별하지 않고 함께 살았으며, 그들의 능력을 활용해 발전을 꾀했던 나라, 그것이 고려였다. 그에 화답하듯 채인범은 고려의 중견 관료로 여생을 마쳤고, 그 아들은 고려의 최고 지배층 반열에 올랐다. 200kg이 넘는 돌에 새겨진 채인범의 묘지명은 채충순이 권력의 정점에 있던 시절인 1024년,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며 새롭게 만들었던 것이다. 반듯하게 갈아낸 면 위에 격자를 새기고 정제된 해서楷書로 한 자 한 자 단정히 새겨낸 품이 과연 명가名家의 물건임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땅 위의 권세와 영광이 모두 흩어지고 고려라는 왕조도 스러진 뒤, 언제인지는 모르나 채인범의 무덤은 이름 모를 도굴꾼에 의해 파헤쳐졌다. 그의 삶을 담은 묘지명과 석관은 일본인들의 손을 거쳐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가, 「채인범 묘지명」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의 소용돌이를 무사히 버티고 이 땅에 남았다. 영욕의 세월을 모두 떠나보낸 지금, 「채인범 묘지명」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2층 서화실에서 오가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채인범 이대二代의 삶, 나아가 고려시대 역사의 한 자락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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