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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고려후기 만호제(萬戶制) 운영과 만호(萬戶)의 정치활동_강성수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6,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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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9월(통권 21호)

[나의 학위논문] 

 

고려후기 萬戶制 운영과 萬戶의 정치활동

 

(2021. 02.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강성수(중세1분과)


 

대학원에 진학할 당시 고려시대사를 전공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막연한 소망을 석사과정 중에 나름대로 연구하고 싶은 분야로 구체화하려는 노력도 해보았다. 그러나 기존에 구축된 선행연구라는 벽이 있었고, 공부를 할수록 머리만 아파지는 상황만 반복될 뿐이었다. 하지만 아예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고려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국가인 원나라(몽골)가 존재했던 13~1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일단 관심사가 생기자 13~14세기 고려와 관련된 이것저것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다보니 당시 고려에 유입되었던 원 제도, 나아가 고려에 있어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외부의 제도가 고려 국내에서 어떻게 ‘정착’되어갔으며, 운용되었는지 주목하게 되었다. 이때, 고려에 도입된 ‘만호제’와 그로 인해 탄생한 ‘만호’에 대해 알게 되었다.

만호제는 원의 제도로, 일본원정을 전후한 시기 고려(충렬왕)의 요청으로 인해 일부 고려 관인이 만호제 체계를 경험하면서 군사제도로 도입되었다. 이후, 군사기지 기능과 부가 역할을 도맡았던 만호부 설치, 출정군 체계로서의 3군만호 체제 마련, 만호의 세습·인사권·재추겸임과 같은 요소와 특징이 갖춰지며 고려의 만호제는 정립되었다. 이렇게 정립된 만호제는 공민왕 5년(1356) 10월, 이른바 반원개혁이라 지칭되는 과정을 거친 후에 고려의 군사제도로 재정립되어 명맥을 이어나갔다.

만호제의 도입과 정립은, 기존 한족왕조를 통해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제도가 고려에 들어온 사례인데 필자는 여기에 흥미를 가졌다. 또한, 주지하듯이 충렬왕대 벌어진 정쟁에 일부 만호가 참여하고 고려 국왕의 재가조차 받지 않고 군을 동원하는 모습 역시 흥미로울 따름이었다. 이에 필자는 두 가지 의문을 가졌다. ‘고려에서 만호제를 도입한 이유는 무엇이고, 도입하여 이를 어떻게 운영하였는가?’, ‘만호들이 고려 정계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와 그 역할은 무엇인가 였다.’ 이러한 의문은 기존연구로 해소할 수 있었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충렬왕이 만호제를 바탕으로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나 만호들이 원 관직인 만호직과 함께 겸하던 재추직의 위상 등을 바탕으로 중앙정계에서 활동했다는 등의 성과가 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의 바탕에는 충렬왕대 정립된 만호제가 공민왕 5년에 개편되기 이전까지 크게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다는 등의 이해가 반영되었다. 이로 인해 충렬왕 이후, 공민왕 5년 이전까지 만호제와 만호와 관련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민망할 정도로 단순한 이해였으나 당시에는 나름 문제의식을 갖추었다고 생각하여 구상을 하나씩 잡아나갔다. 이에 논문에서는 충렬왕~공민왕 5년까지에 주안점을 두고 만호제 운영방식 변화와 만호의 활동에 대해 재검토하였다. 논문에서 중요하게 언급한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우선 필자는 충렬왕이 만호제를 운영함에 있어 군사제도라는 본질은 유지하면서도 다른 목적이 있었음을 상정하고, 천착해 나갔다. 그 결과 크게 세 가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①당시 정국운영 방식인 ‘측근정치’의 기반인 국왕 측근의 위상보정, ②측근의 중앙정계 진출을 위한 발판 마련, ③측근이자 만호인 인물들을 통한 군권장악 및 행사가 만호제를 운영했던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는 다양한 층위의 인물들이 만호가 되는 상황에서 만호 인사권에 고려 국왕의 영향력이 보장받고 있었으며, 측근세력에 대한 통제권이 확고했기에 가능한 운영방식이었다.

이 같은 상황이 변화한 것은 원에 의해 고려 국왕이 폐위·복위되는 소위 중조정국이 시작된 후였다. 국왕이 교체되는 상황으로 인해 고려 국왕의 위상과 신변에는 문제가 생기고, 국왕과 대비될 수 있는 존재가 등장하자 측근세력은 재구성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호들은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들 세력의 입지를 위해 활동하였다. 예컨대 충렬왕과 충선왕의 정치적 대립 중에 충선왕 측 만호들은 만호의 권한으로 군을 동원하여 반대세력에 속한 인물들을 견제하였다. 필자는 이를 고려 국왕의 통제 속에 있던 만호들이 능동적으로 세력을 전환하여 국왕에게 저항할 수 있는 최적의 존재로 변모한 것이라 생각했다. 만호는 측근으로서 또한, 재추로서 중앙정계에서 활동하면서도 만호로서 군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충숙왕~충혜왕을 걸치며 중조 정국이 이어지자 극대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사진 1] 만호가 군을 동원해 정쟁에 참여한 최초사례인 ‘韓希愈 무고사건’이 기록된 『고려사』 세가 충렬왕 25년(1299) 정월 정유일 기사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충숙왕과 충혜왕이 즉위하고 폐위·복위되는 동안 중앙정계에서는 심왕옹립운동·조적의 난·충혜왕 압송과 같은 다양한 사건이 벌어졌다. 위 사건들은 모두 만호가 참여하거나 주축이 된 사건으로, 고려 정계에서 만호가 일정한 역할 또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방증이라 생각했다. 만호들은 심왕옹립운동이 벌어질 때는 국왕에 대한 정치적 공작에 동참하였고, 조적의 난에는 군대를 동원한 직접 공격, 충혜왕 압송사건에는 압송을 위해 온 원 사신들과 함께 충혜왕과 충혜왕 측근세력 제압에 참여하였다.

특히 충렬왕-충선왕의 대립 때는 직접적인 공격대상이 측근세력으로 한정되었으나 이때는 고려 국왕을 직접적으로 공격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군무를 맡고 전시에 대처하는 만호제와 만호의 근본적인 역할과 거리가 먼 현상이다. 지면 관계상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이렇듯 과감한 행동이 가능했던 원인은 충숙왕대 만호에 대한 국왕의 영향력이 한층 더, 저하되고, 충혜왕대는 고려 국왕의 위상이 여러 이유로 인해 최악에 달해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만호들이 정치적 입장에 따라 국왕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만호제를 운영하는 방식에 있어 군사적 기능이 회복 혹은 강조된 시점에 관해서도 검토하였다. 앞서 언급한 내용들이 충숙왕~충혜왕대 만호의 정계 활동을 통해, 만호제를 운영하기 시작한 처음의 목표가 어긋났던 것과 만호의 정치적 역할 등을 나름대로 추적한 것이라면, 충정왕대부터는 고려 조정의 주도로 만호제 운영방식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충정왕 2년(1350)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된다. 왜구에 대한 고려 조정의 방비책 중 하나는 만호제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왜구가 침입한 지역 등에 만호를 파견하여 대비 및 토벌을 담당하게 하였다. 본문에서는 이를 만호제에 의거한 전시인사를 단행한 것으로 보았다. 이후 공민왕도 충정왕대의 방안을 따라 만호를 지방에 파견하여 방수임무를 맡겼고, 원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견할 때도 지휘관 일부를 ‘정남만호’로 임명한다. 이 같은 사례들은 1356년 이후 고려에서 만호제를 변방방위를 위한 군사제도로 완전히 개편하기 이전부터 만호제를 군사제도로 재활용했던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의 여지가 있다.
 

[사진 2] 왜구의 침입이 시작되었음을 기록한 『고려사』 세가 충정왕 2년 2월 기사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이상의 검토는 충렬왕 복위 후~공민왕 5년까지 만호제와 만호의 성격·역할 등이 계속해서 변화했음을 엿봤던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선학들의 여러 연구에 기대서 겨우 논문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논문에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아 여러모로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논문을 처음 써서 그런 것이라고 내심 위로해봤지만, 오히려 글쓰는 기술이나 논리적인 측면에서 보이는 오류에 재차 반성하게 된다. 특히, 만호의 영향력이나 역할을 언급하면서도 이를 어떤 식으로든 정의내리지 못한 점은 큰 한계라고 생각한다. 향후에는 좀 더 꼼꼼하게 연구하고, 결과물을 다듬어보리라 다짐해본다. 덧붙여 논문 구상부터 마무리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한국역사연구회의 여러 선생님들과 논문을 지도하고 심사해주신 교수님들께선 따뜻한 조언과 날카로운 비판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에 지면을 통해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