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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물 열전④] 출세의 꿈을 품었던 천인 재상, 이의민(李義旼)_백인환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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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9월(통권 21호)

[고려 인물 열전] 

 

출세의 꿈을 품었던 천인 재상, 이의민(李義旼)


 

백인환(중세1분과)


 

최충헌(崔忠獻)의 사노(私奴)였던 만적(萬積)은 신종(神宗) 원년(1198) 반란을 모의하면서 “무신정변 이래로 천인(賤人)들이 높은 관직에 많이 임명되었으니 장상(將相)에 어찌 씨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만적의 말을 미루어보아 당시 천인이 높은 관직에 올라가는 사례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딱 들어맞는 인물로 만적은 자신과 동시대에 살았던 이의민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림 1. 『高麗史』 권129, 열전42, 최충헌. 만적이 반란의 모의하는 내용(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고려사)
 

경군(京軍) 선발, 출세의 기회를 잡다

이의민의 출생연도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경주(慶州)에서 출생하였다. 이의민의 아버지는 소금과 체를 팔던 상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옥령사(玉靈寺)의 비(婢)였기 때문에 이의민의 신분은 천인이었다.

이의민은 자신의 형 2명과 함께 동네에서 횡포를 부려 동네 사람들에게 근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의민의 키가 8척이었고 다른 사람들보다 힘이 강하여 아무도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이의민 형제들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안렴사(按廉使)였던 김자양(金子陽)이 이의민 삼형제를 잡아 고문하였다. 하지만 이의민 혼자만 살아남게 되었고 김자양은 이를 기특하게 생각하여 그를 경군으로 선발하였다.

한편 이의민은 유독 꿈과 관련된 일화가 많다. 그의 아버지는 꿈에서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고 경주의 황룡사(黃龍寺) 9층탑을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또한 경군에 선발된 이후 이의민은 개경의 숙소에 머무를 때 성문에서 긴 사다리를 타고 궁궐까지 가는 꿈을 꾸었다. 두 개의 꿈 모두 이의민이 어딘가를 올라가고 있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이의민이 출세를 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꿈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꿈이 이루어지듯이 이의민은 의종(毅宗)의 총애에 힘입어 승진을 거듭하였다. 의종은 격구·사열·수박 등의 군사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이의민은 수박(手搏)을 잘하여 의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대정(隊正)에서 별장(別將)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무신정변과 국왕시해, 출세가도를 달리다.

이렇게 출세가도를 달리던 이의민의 인생이 크게 바뀌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의종 24년(1170)에 발생한 무신정변이 그것이다. 이의민은 무신정변을 출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였고,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많은 사람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중랑장(中郎將)으로 승진하고 이후 장군(將軍)으로 승진하였다.

명종 3년(1173) 김보당(金甫當)은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을 제거하고 무신정변으로 폐위되었던 의종을 복위시키고자 난을 일으켰다. 이에 정중부와 이의방은 이의민을 경주로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게 하였다.

두 사람이 이의민을 경주로 파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이의민의 고향은 경주로 이 지역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경주민들이 반란군에 가담하는 것을 막고 그들을 안정시키게 하였다. 실제로 이의민이 경주에 도착한 이후 경주민들은 반란군을 제거하였는데, 이러한 점에서 정중부와 이의방의 선택은 정확하였다.

둘째, 두 사람은 이의민의 무장으로서의 능력을 보고 이의민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이의민의 수박 실력은 상당히 뛰어났으며, 무신정변 당시 많은 사람들을 제거하였다는 점을 통해서 이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의민은 전투 중 자신의 눈에 화살을 맞았지만 적을 물리쳤으며, 이후 적들이 그의 군대가 온 것을 들으면 싸우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의민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키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바로 의종을 시해한 사건이다. 의종은 폐위된 이후 거제도에 있었는데 난이 발생하면서 경주로 오게 되었다. 하지만 반란이 금방 진압되면서 조정에서는 의종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사실 의종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변 발생 직후부터 나타났었다. 일부 무신들은 의종을 시해하고자 하였지만 다른 무신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하지만 의종이 반란군에 가담하면서 의종을 시해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시 나왔을 것이며, 이를 강하게 주장한 인물은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이의방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의종의 시해를 이의민에게 지시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 대한 두터운 신임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주1)

한편 이의민은 의종을 시해하면서 여러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한때 자신이 모시던 분이었으며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출세를 시켜준 인물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신의 출세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그는 의종을 곤원사(坤元寺) 북쪽의 연못가에서 시해하였다.
 

그림 2. 『高麗史』 권128, 열전41, 이의민. 이의민이 의종을 시해한 기록(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고려사)
 

이의민은 의종을 시해한 것에 대해서 상당히 자부심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왕을 시해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데, 그것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의종을 시해함으로써 정국이 안정되었다는 점을 이의민은 자신의 최대의 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의종을 시해한 이후 스스로 그것을 자신의 공이라 하고 다녔으며, 그 공을 바탕으로 대장군(大將軍)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경대승(慶大升)의 집권, 그에게 주어진 가장 큰 시련

무신정변 이후 그는 여러 반란을 진압하였고, 의종을 시해함으로써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이의민은 대장군에 임명됨으로써 중방(重房)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는데, 무신정변 이후 중방을 통해 권력이 행사되었다는 점에서 중방 구성원이 된 것은 이제 이의민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렇게 중방의 구성원이 된 이의민의 출세는 순조로울 것 같았지만 이내 그의 출세에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명종 9년(1179) 9월 경대승은 당시 집권자였던 정중부를 제거하면서 새로운 집권자가 되었다. 경대승이 집권한 직후 조정의 신료들은 그의 집권을 축하하였는데 이때 경대승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금을 시해한 사람이 아직 있는데, 어찌 축하할 수 있는가?”
- 『高麗史』 권100, 열전13, 경대승.


경대승의 이러한 말은 그가 정중부를 제거하고 집권하면서 그가 내세운 명분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대승은 임금을 시해한 것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였으며, 그래서 임금을 시해한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다. 경대승의 말을 들은 이의민은 크게 두려워하였다. 경대승이 집권하고 있는 이상 언제든지 자신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자신의 집에 군사를 배치하여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협에 대비하였다.

경대승에게 위협을 받고 있던 이의민은 기회가 된다면 경대승을 제거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의민이 병마사가 되어 북쪽에 출진하였을 때 누군가가 ‘나라에서 경대승을 죽였다.’라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의민은 자신이 먼저 죽이고자 했는데 오히려 먼저 죽었다고 하면서 상당히 기뻐하였다.

하지만 이 소식은 곧 잘못된 소식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오히려 이의민이 했던 말이 경대승에게 전해지면서 그의 분노를 더 키우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본인의 입에서 경대승을 제거하겠다는 말이 나와서 경대승의 위협이 더 무섭게 다가왔을 것이다. 명종 11년(1181) 4월 이의민은 경대승의 위협을 피하고자 병을 이유로 고향인 경주로 내려갔다.

경주로 내려간 이후 경대승의 직접적인 위협에서 벗어난 이의민은 심적으로 편안한 상태였을 것이다. 이의민은 경주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종(明宗)은 이의민의 활동에 대해서 불안을 느꼈을 것이고 이의민의 상경을 여러 번 권유하였다. 하지만 이의민은 여전히 경대승이 중앙에 있다는 점 때문에 개경으로 올라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명종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명종 13년(1183) 7월 경대승이 갑작스럽게 병사하면서 정국은 이전과는 다르게 집권자가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명종은 이의민을 상경시키기 위해 그에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수여하였고 이에 이의민이 상경하게 되었다. 이의민은 상경했지만 정치적 공백이 있었기에 중앙에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고 정국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반전되는 것은 명종 20년(1190)에 이르러서였다.

재상 임용, 그러나 지나친 욕심이 화를 초래하다.

상경한 이후 이의민은 정국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지만 명종 20년(1190) 12월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다음 해 12월에는 판병부사(判兵部事)에 임명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이제 그는 재상의 반열에 오름과 동시에 무반의 인사권을 관장하였다. 이의민은 자신이 정국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을 실감하면서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의민과 그 당여(黨與)들이 정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의 당여에는 문신들과 무신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권력의 중추에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의민 외에도 정국에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은 두경승(杜景升)이 있었다. 두경승 역시 재상이었으며, 문반의 인사권을 관장하였다. 또한 그의 당여 역시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의민이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의민의 입장에서 두경승은 눈엣가시였고, 그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두경승에 대한 불만을 행동으로 표현하였다.

하루는 이의민과 두경승이 같이 중서에 앉아 있었는데 자랑하며 말하길, “어떤 사람이 자신의 용맹함을 자랑하니 내가 그 사람을 이와 같이 때려 눕혔소.”라고 하면서 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흔들렸다. 두경승이 말하길, “언제 일어난 일이오. 나는 맨주먹으로 치니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 버렸소.”라고 하면서 벽을 치니, 벽에 구멍이 뚫렸다. 뒤에 이의민이 두경승과 같이 성에 앉아서 일을 의논하다가 마음이 상하자, 주먹을 휘둘러 기둥을 치면서 말하길, “너는 어떤 공이 있어서 나보다 위에 있느냐?”라고 하였다.
- 『高麗史』 권128, 열전41, 이의민.


이 기록은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기록한 것으로, 재상들이 정치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무력을 자랑하고 있다.

전쟁에서 세운 많은 군공과 의종을 시해하면서 정국을 안정시킨 것을 통해 이의민은 자신의 공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두경승은 자신과 비교해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하였음에도 재상에 임명되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이다.

이의민은 두경승에 대한 불만을 이후에도 계속 표출하였다. 두경승이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임명되었을 때의 축하연에서 화를 내었으며, 두 사람이 동시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을 때 두경승의 서열이 이의민보다 높았기 때문에 이의민이 크게 욕을 하였다.

한편 명종 23년(1193)에 발생한 김사미(金沙彌)·효심(孝心)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의민이 자신의 기반을 지키기 위해 반란군과 내통하는 태도는 다른 신료들이 그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김사미·효심의 난은 운문(雲門)과 초전(草田)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는데, 이 지역은 이의민의 고향인 경주와 가까운 지역이었다. 이의민은 자신의 기반이 있는 경주를 지키고자 토벌군에 아들인 이지순(李至純)을 포함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지순은 반란을 토벌하기는커녕 반란군에게 재물을 얻기 위해 그들과 몰래 연락하고 의복·신발·식량 등을 주었으며, 이에 대한 대가로 토벌군의 동정을 전해주었다. 당시 토벌군 내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알았지만 이의민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처벌할 수 없었다. 오히려 토벌군의 대장인 전존걸(全存傑)이 자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의민이 반란군과 내통한다는 행동에 대해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에는 그가 왕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라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이 나온 것은 이의민이 경주로 낙향한 이후의 행동을 반이의민세력이 주목하고 이의민이 김사미·효심과 관련되었다고 연루하여 이의민을 제거할 때 필요한 명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서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주2)

명종 24년(1194) 공신에 책봉된 이후부터 이의민은 인사권을 멋대로 하고 뇌물을 받아 정사를 처리하였다. 그러나 그와 그 당여들이 서로 연결되어 조정의 신료들이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타인의 집과 토지를 빼앗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이의민의 처와 아들들도 그의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렸다.

이의민은 본인이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 정국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는 현재 상황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지금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에 대한 자부심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의민의 권력남용과 탐욕이 도를 넘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거기에는 최충헌·최충수(崔忠粹) 형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충헌 형제가 이의민에 대해서 불만을 키우게 된 계기는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영(李至榮)과의 다툼 때문이었다. 이지영은 최충수 집에 있던 비둘기를 빼앗았는데, 이때 최충수가 강하게 반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다툼이 벌어졌다. 다툼 이후 최충수는 최충헌에게 이의민의 제거를 언급하였고 최충헌이 이에 동조하였다. 그리고 명종 26년(1196) 4월 최충헌 형제는 자신의 조카인 박진재(朴晉材), 족인 노석숭(盧碩崇)과 함께 이의민을 제거하였다.

고려사 전체를 살펴보더라도 이의민과 같은 삶을 살았던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다. 천인 출신으로 재상이 된 이의민은 출세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재상까지 역임함으로써 기존의 질서에 반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를 시작으로 이후 고려에서 천인 출신이 관직을 얻어 승진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고려에서 무신집권기는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임을 생각하면, 이러한 이의민의 행적은 무신집권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미주>

주1) 김당택, 「이의민정권의 성격」, 『고려의 무인정권』, 국학자료원, 1999, 40쪽.

주2) 김호동, 「고려 명종 23년의 신라부흥운동 사료 검토」, 『신라사학보』 26, 2012, 3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