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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⑨] 모스크바 8진(眞) 형제들의 붉은 청춘_정종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4,3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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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9월(통권 21호)
[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 모스크바 8진(眞) 형제들의 붉은 청춘정종현(인하대 한국어문학과 부교수) ‘임은(林隱)’을 찾아서 1982년 4월 일본 도쿄의 자유사(自由社)에서 김일성 개인 숭배를 비판하는 책이 한 권 출판되었다. 책제목은 《北朝鮮王朝成立秘史:金日成正傳》, 저자는 ‘임은(林隱)’이었다. 과장된 보천보전투와 조국광복회의 실상, 김일성 전설의 공백기인 소련88여단 시절 이야기, 해방 전 만주 동북항일연군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활약상, 한국전쟁 발발의 진상, 김일성의 정적 숙청 과정, 주체사상의 반공산주의적 성격 등을 중심으로 김일성 우상화를 비판한 책이었다. 저자는 “신비로운 김일성의 공과 죄를 밝힌 글이기 때문에 그 저자인 나 자신도 신비로운 존재로 남아 있을 것”주1)이라며 ‘수풀에 숨는다’는 ‘林隱’이 필명임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저자자기소개’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출생: 나는 동양의 반봉건적 식민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직업: 조선혁명가, 경력: 조선의 사회주의 건설에 참가,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 현주소: 지금 시대에 과연 몇 사람이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 거주하겠습니까. 기타: 노코멘트” 임은은 “김일성의 망신은 우리 조선사람들의 망신이며,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망신은 세계공산주의자들의 망신이기 때문에” 책을 쓰기까지 10년도 더 망설였다. 하지만, 그는 김정일 후계구도가 명확해진 “조선노동당 제6차대회”(1980)에 분노해 공산주의를 배신한 왕조 세습을 비판하기로 결심했다.주2) 임은은 “우리나라 인민”과 “김일성 자신”이 책을 읽어주기를 바랐지만, 2대 세습을 ‘왕조’라고 혹평한 이 책이 북한 독자에게 읽히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책은 서울에서도 동시에 번역 출판되었다. 표지 하단에 “재소 북한공산주의자가 쓴 김일성정전”이라며 저자의 정체를 조금 더 드러내고 제목도 《(북한)김일성왕조비사》주3)로 변경했다. 전두환 정권의 검열 기구는 출판과 동시에 이 책을 금서로 묶었다. 김일성의 항일 경력이 과장된 점은 비판했지만, 그가 항일무장투쟁에 나서서 활약한 혁명가라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을 가짜나 마적으로 폄하했던 남한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견해였다. 또한, 임은은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폴 포트 등 사회주의를 망친 독재자들을 비판하며, 진정한 혁명가 레닌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는 김일성에게 숙청된 국내파, 연안파, 소련파 사회주의자들을 “붉은 순교자들”로 불렀다. 알다시피 조선과 만주, 소련에서 활동했던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남북한 양쪽에서 제거되었다. 이 책이 냉전기 한반도의 금서가 된 것은 결과적으로 남북한 정권이 사회주의에 대한 배타성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렇다면, 임은은 과연 누구일까? 그의 책은 1987년 10월 21일 문화공보부의 “출판활성화조치”에 따른 선별적 해금 조처에 의해 금서에서 해제되었다. 이후 1989년에는 다시 북한 창설 주역이 쓴 김일성정전(옥촌문화사)으로 정식 출판되었다. 저자 임은은 새 책의 서문에서 자신을 “해방 후, 북조선 창설에 깊이 참여했던 공산주의자이면서도 숙청을 피해 소련에 거주”하고 있는 망명객이라고 소개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의 실제 본명은 밝히지 않았다. 그림 1. 왼쪽부터 일본 자유사 판본(1982), 한국 한국양서 판본(1982), 김일성정전(옥촌문화사, 1987) 훗날 알려진 임은의 실체는 구한말의 의병장 왕산 허위의 손자인 허웅배(1928.3.17.∼1997.1.5.)였다. 허웅배가 필명으로 삼은 임은은 할아버지 허위가 살았던 향리인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서 가져온 것이다. 알다시피 허위는 고종 퇴위 이후에 궐기한 13도창의군에서 진동창의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최초로 처형당한 의병장이다. 허위의 순국 이후 그 집안의 후손들은 만주로 이주해 항일 투쟁에 가담했다. 허웅배는 북만주 주하에서 허위의 셋째 아들 허준의 3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뒤에는 북한 내무성 문화국에서 당조직문화사업 책임자로 일한다. 한국전쟁 때에는 인민군 편제로 바뀐 조직을 따라 서울에 진주했으며, 1952년 9월 파견유학생에 선발되어 소련의 국립 영화대학교에서 유학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국을 뒤로 하고 인민의 기대 속에 떠난 유학이었다. 헌데 그는 왜 망명객이 되어야만 했을까? 허웅배의 개인 숭배 비판과 소련 망명주4) 1957년 11월 27일, 모스크바의 날씨는 꽤나 쌀쌀했다. ‘제8차 재쏘 조선유학생 동향회’가 열리는 모스크바 광산대학 강당을 향하는 허웅배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는 오늘 김일성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하기로 마음먹고 기숙사를 나선 참이다. ‘공화국’의 현실을 곱씹어 생각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예전에는 당과 국가정책에서 그 어떤 부조리를 느끼더라도 본인이 이해 못했을 뿐이지 지도부에서는 심오하고 원대한 대책을 세우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지만, 소련 유학은 차츰 자신이 목숨 걸고 지켰던 ‘공화국’이 무언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품게 했다. 무엇보다 1년 전 1956년 2월 14일에 개최된 소련공산당 20차 당 대회에서 제1서기 흐루쇼프가 연설한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는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흔히 스탈린 격하 연설이라고 알려진 이 비밀 보고는 스탈린 치하에서 막대한 규모의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구체적 통계를 제시하며 스탈린 개인 숭배를 격렬히 비판했다. 소문에 따르면 흐루쇼프의 연설이 한창일 때 강단 뒤편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동지! 스탈린이 그 모든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때 지도부였던 당신은 뭘 하고 있었습니까?” 흐루쇼프는 연설을 중지하고 연방 각지에서 모인 1,355명의 열성당원을 쳐다봤다. “누가 말했습니까?” 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서기장은 회중 시계를 꺼내들었다. “1분의 여유를 주겠습니다. 누군지 일어나서 다시 말해보시오.” 정적 속에 시간이 흘렀지만 어느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시계를 호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저는 스탈린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때 아까 소리를 지른 동지가 한 것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주5) 흐루쇼프는 연설 말미에 그 내용이 절대 외부로 나가서는 안 된다, 적들에게 탄약을 제공해선 안 된다고 말했지만, 연설 전문은 유출되어 1 그림 2. 19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연설하는 흐루쇼프(위키피디아)와 1956년 흐루쇼프의 비공개 연설문 956년 6월 4일 《뉴욕타임스》 1면을 장식했다. 허웅배는 연출과 2년 선배인 폴란드 출신 예르지 호프만(Jerzy Hoffman)으로부터 흐루쇼프 연설을 전해 들었다. 호프만과는 평상시 논쟁과 토론을 나누던 사이였다. 흐루쇼프 연설은 민주적 사회주의 체제를 고민하던 허웅배에게 북한의 일인 숭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했다. 실제로 흐루쇼프 보고의 여파는 컸다. 북한에서도 1956년 8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연안파의 윤공흠, 김강, 서휘 등이 김일성 개인 숭배를 비판하고 나섰다. 하지만 연안파는 곧바로 반당 종파주의자로 몰려 숙청되었다. 1957년 10월에는 소련대사로 있던 이상조가 연안파로 지목되어 송환에 직면하자 소련에 망명했다. 만주의 항일 투사 출신인 이상조는 허웅배의 친형인 허광배와 함께 활동한 사이였다. 허웅배는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허웅배 역시 연안파라는 정치적 배경 때문에 귀국하더라도 숙청의 광풍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가 김일성 개인숭배를 비판하려고 결심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할아버지 허위가 죽음으로 지키려 했던 산하였고, 동북항일연군의 용장인 당숙 허형식이 되찾으려다 순국한 나라였다. 또한 자기 형제들이 함께 세우고 지켜낸 공화국이었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라면 독재와 개인숭배로 인민의 나라를 망치는 자들과 맞서야 했다. 그림 3. 허형식(동북항일연군 3로군 참모장, 1909-1942)
그림 4. 허웅배(허진, 1928-1997)
허웅배는 스탈린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때 침묵했던 이들처럼 비겁하게 살진 않겠다고 다짐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광산대학 강당에는 이신팔 주소련 대사와 평양에서 온 당중앙조직부장 한상두 및 선전선동부 부부장 김도만 등을 비롯하여 소련 각지의 유학생 400여명이 운집해 있었다. 회의에서 한상두와 김도만은 1년 전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비판한 세력인 김두봉, 최창익, 윤공흠, 이상조, 김강 등의 연안파를 반당 종파주의자라 비난했다. 유학생 대표자들도 단상에 나와 당과 수령을 찬양하고 체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그렇게 회의는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때 허웅배가 토론 발언을 신청하고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는 ‘우리 당에는 개인 숭배가 없’고, ‘있었다면 남로당 추종자들에 의한 박헌영에 대한 개인 숭배만 있었다’는 당의 설명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잘라 말했다. 그의 논리는 명확했다. “개인 숭배는 국가의 제2인자에게 차려지는 것이 아니라 제1인자에게만 차려지는 것이다.”주6) 허웅배의 발언에 회의장은 심하게 술렁거렸다. 고급 당학교 유학생 대표 등이 허웅배의 발언을 제지하였고, 허웅배는 연단에서 끌려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소동을 겪은 며칠 뒤 대사관에서는 허웅배가 제기한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토의하자며 대화를 요청했다. 허웅배는 그 진정성을 믿고 대사관에 찾아갔지만 곧바로 붙잡혀 구금되었다. 강제송환과 숙청의 위기에 직면한 그는 대사관 화장실 창문을 통해 탈출한 후 소련에 망명을 신청했다. 소련 당국은 허웅배와 그의 연인인 의과대학 유학생 최선옥에게 ‘무국적’ 망명 허가를 내주었다. 학살당한 항일빨치산의 딸 최선옥은 혁명 유자녀들만 다니던 만경대 학원 출신이었다. 1958년 이른 봄에 허웅배와 최선옥은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했다. 이후 허웅배는 타쉬켄트의 니자미 사범대학교 노어과를, 최선옥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들의 망명은 허웅배와 함께 삶과 세계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해왔던 영화대학교 북한유학생들을 깊은 고민에 빠뜨렸다. 모니노 숲의 ‘8진(眞)’ 형제 북한 정권은 1946년부터 국가를 이끌어갈 후세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유학생 해외 파견을 시작했다. 소련이나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에서 발전된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을 배우고 익힐 우수한 젊은 인재들을 선발했다. 전쟁 중에도 유학생 파견은 중단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폐허로 변한 조국을 부흥하고 발전시킬 과제가 주어졌다. 전쟁 중 유학생으로 선발된 학생들은 인민군에 복무했거나 사회성분과 당성에서 흠결이 없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1952년 9월 4일 신의주유학생강습소에서 약 2백명의 제7기 소련유학생이 출발했다. 그 중에는 모스크바 국립영화대학교를 지망한 허웅배(연출과 7기), 한대용(시나리오과 7기), 정린구(촬영과 7기)도 포함되었다. 영화대학교에는 한 해 앞서 도착한 최국인(연출과 6기), 리경진(시나리오과 6기)이 공부하고 있었다. 1953년에는 다시 양원식(촬영과 8기), 김종훈(촬영과 8기)이 입학했고, 1954년에는 리진황(촬영과 9기)이 영화대학교 유학생 대열에 합류했다. 그림 5. 1956년 11월 국립 영화대학교 기숙사 앞. 왼쪽부터 정린구, 김순자, 허웅배(허진), 한대용(한진), 리경진(리진), 김종훈, 리진황.
국제 사회주의의 수도였던 모스크바에는 각국에서 유학생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서도 북한 유학생들은 발군의 성적을 거두었다. 폭격으로 커다란 잿더미로 변한 폐허에서 원시 인류처럼 살아가는 참혹한 상황에 있던 인민들이 보내준 유학이었다. 그들은 평소에도 자주 어울려 조국의 현실, 학업과 올바른 삶에 대한 토론을 나누었다. 그렇게 친밀하게 지내던 허웅배의 망명 결행은 영화대학교 동료 유학생들은 물론 소련 유학생 전체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북한대사관은 영화대학교 학생들이 허웅배에게 물들지 않았을까 조바심을 냈다. 대사관 직원 입회 하에 학생들의 입장을 확인하는 공식적인 토론회가 수차례 열렸다. 대사관 관계자들 앞에서는 눈치를 보며 얼버무린 뒤 이들은 자체적으로 토론을 거듭했다. 후배 그룹들은 반당분자인 허웅배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 귀국해서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때 선배 그룹의 리경진, 최국인, 한대용, 정린구 등이 후배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했다. 최국인은 허웅배 보다도 먼저 망명을 결심했다. 그는 종파사건 직후 개인 숭배가 심해지는 공화국에서 양심을 속이고 수령만을 위해 봉사할 수는 없다며 소련에 남을 결심을 허웅배와 리경진에게 밝혔다.주7) 김일성종합대학 영문과 출신의 리경진은 영화대학교 역사상 소련인과 외국인을 통틀어 처음으로 전과목 만점을 받은 수재였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흠잡을 곳 없던 인물로 동료들의 신망이 두터운 유학생 모임의 리더였다. 리경진은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그들이 공개적으로 허웅배를 비판하면 무사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극히 단순한 생각이라는 점을 깨우쳐 주었다. 유학생들은 이미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의 물을 먹었기 때문에 조국에 돌아가더라도 종파이론에 의해 이용만 당하다 숙청당할 것이라는 점을 논리적으로 설득했다. 깊은 번민에 빠졌던 영화대학교의 북한유학생들은 집단적으로 망명하기로 결정하고 향후 행동을 함께 하기로 결의했다. 8명의 영화대학교 유학생들이 연안파 혹은 그와 유사한 정치적 이력과 배경을 가졌기 때문에 망명했다고 말하는 건 이들 청년들의 진정성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른다. 허웅배, 최국인 정도를 제외하면 그들 대부분은 연안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를테면, 한대용의 아버지 한태천은 김일성 수상의 산업시찰과 현지지도를 수행한 뒤 그 교시들을 정리하여 ‘로동신문’과 국내 잡지들에 발표하는 북한 권력의 최측근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북한 사회에 돌아가면 출세가 보장된 계층의 청년들이었다. 자신이 망명했을 때 가족이 처할 위기, 망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의 곤경, 망명에 성공해도 장담할 수 없는 불안한 미래 등 모든 두려움 속에서도 조국을 등지고 망명을 결정한 데에는 청년들 특유의 이상과 정의감에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들은 이미 1950년대 모스크바에 불어온 ‘자유’의 공기를 흠씬 들이켰기에 당대 북한의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1951년 5월 한국전쟁 진상조사를 위한 국제민주여성연맹 조사위원회에 참여한 네 명의 서방측 여성들은 여행 중 경유한 모스크바를 “자유롭고” “미소가 가득”한 “뚜렷한 행복의 도시”라고 기록하고 있다.주8) 이 즈음이 여전히 스탈린의 통치기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스탈린 사후의 해빙기에 모스크바에서 생활한 북한유학생들이 호흡했을 자유의 공기가 짐작될 것이다. 일인 숭배에 투항하는 대신 비판의 자유를 선택한 그들은 소련 당국에 망명요청서를 발송했다. 1958년 6월 북한대사관의 요청으로 영화대학교의 북한유학생들은 학교에서 집단 퇴학을 당했다. 기숙사에서 쫓겨난 그들은 모스크바에서 40-50Km 가량 떨어져 있는 모니노라는 곳의 숲으로 가서 천막을 치고 지내기 시작했다. 인근 집단농장의 일을 거들어 야채를 얻어왔고 호수에서 낚은 물고기를 끓여 먹는 생활이었다. 천막 생활은 한 달 가량 이어졌다. 그들은 매일 쉬지 않고 조국과 세계의 변화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했다. 어느 날 그곳으로 리경진이 남겨둔 약도를 보고 먼저 망명한 허웅배가 찾아왔다. 그는 타쉬켄트에서 가져온 식용품을 잔뜩 꺼내놓았다. 허웅배는 동료들에게 “우리들은 이제 참사람이 되겠다는 뜻으로 같은 이름 ‘진(眞)’을 쓰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허웅배(허진), 리경진(리진), 한대용(한진) 등은 결의대로 ‘진’이라는 이름을 죽을 때까지 사용했다.주9) 마침내 1958년 8월 4일 소련 정부는 이들의 망명을 허용하고, ‘무국적 임시 거주증’을 내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음악대학의 정추와 연극대학의 맹동욱도 망명 대열에 동참했다. 소련 당국은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하여 정치적 회합을 통해 집단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망명 유학생들을 소련 전역으로 한 명씩 갈라놓았다.주10) 각자의 임지로 떠나면서 그들은 북한대사관에 우편을 발송했다. 우편 안에는 그들의 조선유학생 여권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장이었던 최용건 앞으로 보내는 다음과 같은 편지가 첨부되어 있었다. “나는 현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에서 헌법에 보장된 공민의 권리가 난폭하게 유린되고 있는 상태로 말미암아 1958년 6월 1일부터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권을 포기함을 통보한다. 만일 조국이 모든 합리성을 회복한다면 소련 유학에서 습득한 나의 지식을 인민의 이익에 보답하기 위하여 즉시 조국으로 돌아갈 것이다.”주11) 형제애에서 인류애로 피를 나누어야만 형제일까? 신념과 의리로 만들어진 형제들도 존재한다. 일본 유학에서 만나 대한제국을 입헌군주국으로 바꾸기로 의기투합한 허세문과 김익용은 ‘입헌’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김립과 허헌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주12) 허웅배(임은)는 《김일성정전》에서 신흥무관학교의 김경천(金敬天, 본명 김광서), 지청천(池靑天, 본명 지석규), 신동천(申東天, 본명 신팔균) 등 이른바 “남만삼천(南滿三天)”이 조국 광복을 맹약하며 돌림자 천(天)을 쓴 일화를 전한다.주13) 허웅배가 ‘진’이라는 이름을 쓰자고 제안한 데에는 이처럼 그가 익숙하게 접했던 남성들의 신념 결사에 대한 문화적 관습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신념을 공유한 형제 결사인 만큼 그들은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벼리려 했다. 소련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리경진은 ‘진’의 형제들이 함께 지켜나갈 생활신조를 다음과 같은 문서로 만들었다. (1) 자기 직장에서 겸손하고 근면하고 성실하고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는 모범적인 일꾼이 될 것. 이들은 대학교, 방송국, 극장, 신문사 등의 직장에서 교수, 감독, 극작가, 촬영기사 등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갔다. 그들은 편지를 통해 서로를 격려하고 때론 질책하며 민주적 공산주의 사회를 향한 이상을 지켜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들의 조국은 합리성을 회복하기는커녕 3대 세습의 왕조 국가로 타락했다. 그들에게 “소련 유학에서 습득한 지식을 조국 인민의 이익에 보답”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망명 뒤 그들의 삶의 궤적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잃지 않고 자기 생(生)을 치열하게 살아낸 인간의 기품을 느낄 수 있다. 카자흐스탄 국립영화소에서 <용의 해>, <쇼칸 발리하노프> 등 소수 민족의 영화를 만든 최국인, 소련의 고려인 문학을 풍성하게 일군 한진·리진·허진 등 재소고려인 문사 3진의 작품은 조국의 인민에게 보답하진 못했지만, 소련의 소수자(민족)들을 보듬으며 보다 성숙한 인간애가 실현된 결과물들이다. 그들이 보여준 삶의 위엄은 김소영 감독의 <굿바이 마이러브 NK:붉은 청춘>(2017)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꼭 짚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1958년 소련 북한유학생 집단 망명 사건은 항상 열 명의 남자유학생의 서사로만 언급된다. 하지만 최초 망명을 결행한 것은 허웅배와 더불어 의과대학 유학생 최선옥이었다.주15) 혁명유자녀 계급의 소련 유학 출신 의사로 누릴 꽃길을 마다하고 그녀는 허웅배와의 망명을 선택했다. 사랑의 힘과 더불어, 북한 권부에 대한 최선옥의 비판의식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결정이다. 이후 남편 허웅배와 망명한 동료들을 보듬고, 그들이 병들었을 때 보살핀 것 역시 최선옥이었다. 그림 6. 영화 <굿바이 마이러브 NK:붉은 청춘>(김소영, 2017)과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김연수, 2020) 망명 이후 ‘진’의 형제 공동체는 남성 연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와 관련하여 한진과 그녀의 아내 지나이다 이바노브나의 혼인 신고 장면은 각별한 감동을 준다. 바라나울 시청 비서는 서류를 제출한 지나이다에게 “누가 이 고려인과 결혼하도록 강요했나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비서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세상에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랑이라는 것은 민족, 국적, 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주16) 망명한 유학생들은 새로운 땅에서 사랑을 했고 가정을 꾸렸으며 아이를 낳았다. 리진 부부와 한진 부부는 자신들의 첫 아이에게 ‘용기’를 뜻하는 ‘안드레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 아이들은 낯선 세계에서 이상을 지키려는 그들의 “용기”의 원천이자 다짐이었다. <미주> 주1) 林隱, 《北朝鮮王朝成立秘史:金日成正傳》, 自由社, 1982, 11쪽. 주2) 林隱, 위의책의 서문 참조. 주3) 《(북한)김일성왕조비사:김일성정전》, 한국양서사, 1982. 주4) 허웅배와 소련 북한유학생의 집단 망명 사건에 대해서는 이지수, <1950년대 재소 유학생의 소련 망명 사건과 북한의 폐쇄체제 강화:허웅배의 미출간 회고록과 러시아 문서보관소의 서한을 중심으로>, 《세계지역연구논총》 38집 2호, 2020, 조규익·김병학,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의 삶과 문학》, 글누림, 2013, 박유리 기자, <1958년 북한 모스크바 유학생 ‘집단 망명’ 사건, 그후>, 《한겨레신문》 2015년 9월 4일자를 참조하여 서술하였다. 주5)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문학과지성사, 2020, 177쪽. 주6) 허웅배 회고록(오로라의 고려인, 미출간물) ; 여기서는 이지수, 앞의 논문, 60쪽 재인용. 주7) 조규익·김병학, 앞의책, 163쪽. 주8)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창비, 2021, 100-102쪽. 주9) 조규익·김병학, 앞의책, 171쪽. 주10) 망명한 북한유학생들이 흩어진 곳은 다음과 같다. 허웅배(타슈켄트 대학), 한대용 바르나울(알타이주 중앙도시)의 텔레비전 방송국, 최국인(알마아타 영화 촬영소), 김종훈(무르만스크 영화 촬영소), 양원식(카자흐스탄 영화촬영소), 정린구(마하치칼라-다게스탄 수도 영화촬영소), 리진환(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영화촬영소), 리경진(모스크바 근교촌), 정추(알마아타 음악원), 맹동욱(알마아타 소년극장) 주11) 이지수, 앞의 논문, 63쪽. 주12) 김철수, 지운 김철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엮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8쪽. 주13) 임은, 《북조선창설주역이 쓴 김일성정전》, 옥촌문화사, 1989, 44쪽. 주14) 조규익·김병학, 앞의책, 174-175쪽. 주15) 소설가 김연수는 《일곱 해의 마지막》(문학동네, 2020)에서 허웅배와 최선옥의 에피소드를 새로운 이야기로 창출했다. 망명유학생을 잡기 위해 그가 사랑하는 라리사(강옥심)를 대사관이 억류했고,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 남학생은 대사관에 들어간다. 옥심은 중앙당학교 교장인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망명을 포기하고 남학생은 혼자서 화장실 창문으로 탈출한다. 이후 옥심은 북한으로 들어갔지만, 아버지는 끝내 숙청되고 그녀도 권총 자살하고 만다. 이처럼 북한유학생 망명 사건은 감독과 작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며 영화와 소설로 다시 쓰여지고 있는 중이다. 주16) ‘지나이다 이바노브나의 내레이션’, 김소영(감독), “굿바이 마이러브 NK:붉은 청춘”(2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