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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물 열전⑤] 냉혹한 정치가, 최충헌_김효섭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3,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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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10월(통권 22호)

[고려 인물 열전] 

 

냉혹한 정치가, 최충헌


 

김효섭(중세1분과)

 

*지난 연재 보기


 

최충헌(崔忠獻)은 60년간 이어진 최씨 정권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다. 국왕이 아닌데도 이렇게 권력을 오랫동안 오로지한 인물은 최충헌을 비롯한 최씨 집권자들뿐이었다. 이에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를 둘러싸고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이 정권의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기반에 관한 여러 사실이 드러났다.
의종 24년(1170)에 발생한 무신정변 이후 여러 집권자가 등장했지만, 오직 최충헌만이 장기 집권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점은 최씨 정권의 구조만이 아니라 최충헌이라는 인물이 지니고 있던 개인적 역량도 함께 살펴보아야 최씨 정권에 대한 이해가 더욱 분명해질 수 있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번 글에서는 권력을 획득하고 정권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최충헌의 역량, 특히 그의 정치적인 역량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최충헌이 당시의 정치구조와 역학관계를 정확히 꿰뚫는 안목은 물론, 자신의 판단을 과감히 실행할 결단력을 갖춘 냉혹한 정치가였으며, 이러한 역량이 오랜 기간 유지된 최씨정권의 토대가 되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권력 구조를 꿰뚫는 정치적 안목으로 중방(重房)을 무력화하다.

명종 26년(1196) 4월 개경, 이의민(李義旼)의 아들 이지영(李至榮)과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崔忠粹) 간에 비둘기를 둘러싼 다툼이 발생하였다. 이 사소한 다툼은 정국을 뒤흔들 거대한 태풍이 되었다. 최충수는 분노에 가득 찬 상태로 형인 최충헌에게 이의민 일파를 제거하자고 제안하였고, 최충헌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거사 당일, 최충헌과 최충수는 조카인 박진재(朴晉材)와 친척인 노석숭(盧碩崇)과 함께 미타산(彌陀山) 별장에 있던 이의민을 급습하여 살해하였다. 이후 이들은 국왕인 명종을 찾아가 이의민을 죽였다는 사실과 그 명분을 고하였다. 이때 최충헌 형제가 제시한 이의민 제거의 명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의민은 임금(의종)을 시해하였고, 둘째, 백성에게 해를 끼쳤으며, 셋째, 대보(大寶), 즉 왕위를 넘보았다는 것이다. 최충헌 형제는 명종에게 이의민의 잔당을 토벌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낸다. 이들은 명종의 허락을 바탕으로 저자에서 군사를 모집하였고, 이를 이용해 개경 도성의 문을 모두 닫은 후 그 안에 있는 이의민 일파를 모두 사로잡았다. 이와 함께 경주에 있는 이의민의 삼족(三族)도 제거하였다.

이 시점을 기점으로 이의민 일파는 사실상 소탕되었다. 이는 최충헌 일파가 정변을 일으키면서 내세운 목적이 달성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최충헌과 그 일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정계에 있던 유력 인물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길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고위직 역임자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특히 중앙군 최고 지휘관들의 협의체인 중방(重房)을 구성하는 상장군(上將軍)과 대장군(大將軍) 12명이 제거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중방은 상장군 8인과 대장군 8인, 총 16인으로 구성되었다. 이 정도 수의 상장군과 대장군이 제거되었다면, 중방은 순식간에 무력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방은 무신정변 이후 권력 기관으로 부상하여 명종대 정치를 주도한 기관이었다. 따라서 중방이 무력화되면서 당시 정계에는 일시적인 권력 공백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 정변을 일으키는 시점에 정치적, 사회적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던 최충헌 일파는 이러한 권력의 공백 속에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최충헌과 그 일파에 의해 제거된 인물들을 모두 이의민 세력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많은 인물이 이의민 일파에 대한 숙청 작업이 마무리된 이후에 제거되었다. 이는 이의민과 별다른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음에도 최충헌 일파에 의해 숙청당했던 인물이 많았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길인(吉仁)이라는 인물은 최충헌이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는 최충헌과 그 일파가 이의민 일파를 제거한 이후 거사 명분에 맞지 않는 행위를 일삼았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진다면 최충헌 일파는 도리어 정치적 정당성을 상실하고 공격 대상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최충헌 일파는 명종 26년(1196) 5월 숙청 작업을 마무리하고 명종에게 봉사(封事)를 올렸다. 이를 통해 이들은 향후 국정 운영의 방향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의민 일파의 제거라는 정변의 명분을 재천명함으로써 자신들 손에 의해 제거된 인물들을 모두 이의민 일파로 규정하였다. 이로써 최충헌 일파의 행동은 거사 명분에 부합하는 행위로 수식되었고, 그들은 정치적 정당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최충헌과 그 일파는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이의민 제거라는 표면적인 명분을 넘어 권력 기구였던 중방을 무력화하고 이를 정변의 명분에 맞는 행위로 포장함으로써 기존의 권력 구조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최충헌이 당시의 권력 구조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각 상황에서 요구되는 행동을 주저 없이 시행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림 1. 경기 개성 만월대 전경 유리원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미지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http://www.emuseum.go.kr/main)

 

2. 하룻밤 설득으로 얻어낸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승리

이의민을 제거하고 중방을 무력화한 최충헌과 그 일파는 머지않아 권력 독점을 향한 여정의 마지막 걸림돌인 명종과 두경승(杜景升)까지 제거하고 신종을 즉위시켰다. 이제 정계에서 이들에게 대항할 만한 힘을 가진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 최충헌, 최충수, 박진재 등 최충헌 일파의 핵심 인물들은 각기 독자적으로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이들 간의 권력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으로 이어졌다.

신종 즉위년(1197) 10월,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는 최충수의 시도로 인해 최충헌 일파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최충수는 기존의 태자비를 내쫓고 자신의 딸을 태자와 혼인시키고자 하였고, 신종과 태자는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최충헌은 이러한 상황을 전해 듣고서 최충수를 찾아가 이 시도를 만류하고자 하였다. 아래 자료에서 당시의 상황이 드러난다.

최충헌이 말하기를, “자네가 딸을 동궁(東宮)에게 들인다고 들었는데, 그런가?”라고 하였다. <최충수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최충헌이 타이르며 말하기를, “지금 우리 형제는 비록 세력은 나라를 무너뜨릴 만하지만, 가계는 본래 한미(寒微)한데, 만약 자네의 딸을 동궁의 배필로 삼는다면 세상의 비난이 없겠는가? 하물며 부부 사이는 은의(恩義)가 기본인데, 태자와 비(妃)가 결혼한 지 여러 해인데 하루아침에 떼어 놓는다면 인정상 어떠하겠는가? 옛사람이 ‘앞 수레가 넘어지면, 뒤 수레는 이것을 경계로 삼는다.’라고 하였네. 지난 날 이의방이 딸을 태자와 혼인하게 하였다가 끝내 다른 사람 손에 죽었는데, 지금 그 전철을 밟아도 좋은가?”라고 타일렀다. 최충수는 하늘을 바라보고 긴 한숨을 짓기를 한참 동안 하더니 말하기를, “형님의 말씀이 옳으니, 감히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高麗史』 권129, 열전42, 반역3, 崔忠獻.


최충헌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며 최충수를 설득하였다. 첫째, 자신들 가문의 사회적 위상이 왕실과 혼인할 정도가 아니다. 둘째, 인정상 혼인한 지 상당 시간이 지난 태자 부부를 강제로 떼어놓을 수 없다. 셋째, 딸을 태자비로 들였다가 정적에게 살해당한 이의방(李義方)의 전례가 있다. 그런데 최충헌이 최충수를 만류한 이 상황의 이면에는 최충수의 권력이 강해지는 상황을 저지하려는 그의 의도가 숨어있었다. 만약 최충수가 딸을 태자비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향후 정국에서는 최충수의 정치적 발언권이 최충헌의 그것을 점차 압도하여 갔을 것이다. 이 시기가 무신 권세가에 의해 왕권이 많이 축소된 시기임은 분명하지만, 국왕이라는 존재가 당시 사회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여전히 상당하였다. 따라서 혼인 등을 통해 형성하는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가 지니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최충헌도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충수의 태자비 납비(納妃) 시도를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최충수는 처음에 최충헌의 설득을 따르고자 했으나, 끝내 딸을 태자비로 만들기 위한 절차를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서 최충헌과 최충수는 양자 간의 군사적 충돌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각기 군사적 실력 행사를 준비하였다. 이 시점에 각자가 갖추고 있던 군사력은 백중세였으며, 최충헌은 최충수와의 승부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에 최충헌은 자신의 편에 서서 함께 싸워줄 세력을 규합하였고, 그 결과 박진재, 노석숭 등의 지원을 약속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왕인 신종의 지지도 얻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통해 최충헌은 최충수를 압도하는 군사력을 확보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충헌의 정치적 안목이 다시 한번 빛났다. 최충헌은 최충수의 태자비 납비 시도를 사회적 위상 및 인정(人情) 등과 연관된 문제에서 나라와 국왕에 대한 반역으로 전환하고 자신을 이러한 일을 저지하는 정당한 일을 행하는 존재로 부각하였다. 이런 설득 방법은 효과적이었다. 박진재는 국가의 안위와 관련된 대의를 위해서는 친족을 멸할 수 있다고 하면서 최충헌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과정이 불과 하룻밤 만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최충헌은 하룻밤 만에 정치적 정당성, 명분을 조작함으로써 최충수와의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자신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음날 도성 한복판에서 최충헌 형제 간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박진재와 노석숭 등의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은 최충헌의 군대는 비교적 손쉽게 최충수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최충수는 이 과정에서 최충헌의 군사에게 살해당했다. 결국 최충헌은 권력을 둘러싼 강력한 경쟁자 중 한 명으로 부상한 동생 최충수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면서 권력 독점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3. 백중지세(伯仲之勢)를 무너뜨린 묘안, 인사권 장악

최충수가 제거된 이후에도 최충헌의 조카이자 정변의 주역 중 한 사람인 박진재가 최충헌의 경쟁자로 남아있었다. 사실 박진재는 명종을 폐위시킨 후 누구를 다음 국왕으로 세울 지에 관한 논의, 최충수가 딸을 태자비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를 둘러싼 최충헌 형제 간의 다툼 등과 같은 중요한 정치적 사안마다 최충헌을 지지했다. 이에 두 사람은 상당 기간 정치적 유대를 유지하며 공존하였다. 하지만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수 없듯이, 두 인물 간의 정치적 갈등이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신종 2년(1199) 8월에는 박진재의 문객인 이적중(李勣中)이 최충헌을 제거하려 하였으며, 신종 4년(1201) 9월에는 박진재가 최충헌을 제거하고자 모의했다는 익명서가 붙기도 하였다.

하지만 최충헌은 그와 비슷한 수의 문객(門客)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던 박진재를 손쉽게 제거할 수 없었다. 이에 최충헌은 막대한 출혈을 감수해야 하는 군사력 동원이 아닌 관료제 시스템, 특히 인사권의 장악을 통해 박진재와 그 세력의 손발을 묶고자 하였다. 이는 고려 사회에서 중앙 지배층의 위상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직 획득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실제로 수많은 인물이 관직을 얻고자 최충헌과 박진재의 문객이 되었다.

최충헌은 차례로 인사권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해 나갔다. 신종 2년(1199) 6월, 최충헌은 병부상서로서 지이부사를 겸하여 문신과 무신의 인사를 총괄하였으며, 신종 4년 12월에는 이부상서·병부상서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신종 5년 3월에는 이부원외랑 노관(盧琯)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문무 관인의 인사 업무를 처리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최충헌이 사실상 모든 인사권을 독점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최충헌의 행보와 반대로 박진재는 인사권에 개입할 수 있는 관료제 상의 통로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진재의 문객들은 관직을 획득하고 승진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최충헌의 문객들은 조정 내 영향력을 점차 확대하였을 것이다. 그러자 중앙 정치에서의 영향력은 최충헌이 박진재를 압도하기 시작하였다. 신종 5년(1202) 8월에는 최충헌의 집에서 경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사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신종 7년 1월에는 국왕이 위독해지자 차기 국왕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이 논의도 최충헌의 집에서 최충헌과 그 측근인 최선(崔詵)과 기홍수(奇洪壽) 간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최충헌과 박진재 사이에 팽팽하던 힘의 균형이 점차 무너졌으며, 박진재와 그 세력이 느끼는 불안감과 불만은 점차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희종 3년(1207) 5월, 최충헌과 박진재 간의 갈등이 폭발하였다. 박진재는 자신이 거느린 문객이 최충헌의 문객과 비교해서 결코 적지 않음에도 관직을 얻은 문객의 수가 적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 최충헌을 공격할 마음을 먹었고, 최충헌이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소문을 내었다. 최충헌은 이러한 동향을 파악하자마자 박진재를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박진재가 도착하자 최충헌은 기습적으로 그를 포박하여 유배를 보냈고, 아울러 그의 문객 중 날쌔고 용감한 자들도 유배를 보내버렸다.

최충헌은 박진재를 제거할 때 군사력 동원이 아닌 인사권 장악이라는 전략을 선택하였다. 이로써 최충헌은 박진재 세력의 구성원들이 관직을 얻지 못하도록 함과 동시에 중앙 지배층 내에서의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 결과 박진재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에 최충헌은 비교적 손쉽게 박진재와 그 세력을 중앙 정계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최충헌은 중앙 지배층이 관직을 통해 지위를 획득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고려 지배층 사회의 매커니즘을 분명히 이해하고, 이를 잘 활용했던 것이다.

박진재까지 제거됨으로써 중앙 정계에서 최충헌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인물과 세력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최충헌은 명실상부한 고려의 집권자가 되었다.
 

그림 2. 최충헌 묘지명,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소장(이미지 출처: 서희종)

 

4. 최씨 정권의 장기 지속을 위한 백년대계(百年大計)

최충헌은 최충수, 박진재를 차례로 제거하고 권력의 최정점에 올라섰다. 이제 최충헌 앞에는 붙잡은 권력을 유지해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었다. 최충헌은 인사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도방(都房)이나 교정도감(敎定都監) 같은 기구를 이용해 신변에 대한 위험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자 출세하고자 했던 당시 지배층은 최충헌과 대립각을 세우기보다 그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최충헌은 자신의 권력을 안정화하였다. 하지만 최충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가문의 권력으로 전환하여 영속(永續)시키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후계자를 선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최충헌은 자신의 후계자로 최우(崔瑀)를 선택하였고, 그에게 권력을 안정적으로 넘겨주기 위해 여러 조치를 시행하였다.

우선, 최충헌은 최우에게 사적인 무력 집단을 갖추도록 지원해주었다. 늦어도 고종 3년(1216)에는 최충헌과 구별되는 최우만의 사병이 활동하는 모습이 확인된다. 최충헌이 자신을 제외한 인물의 사적인 무력 집단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최우는 최충헌의 특별한 배려 하에서 사병을 운영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최충헌은 최우가 국왕을 포함한 중앙 지배층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 과정을 통해 최우는 지배층 사회 내에서 위상 및 영향력을 높일 수 있었다.

아울러 최충헌은 최우를 정숙첨(鄭叔瞻)의 딸과 혼인시켰다. 정숙첨은 조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하던 다수의 인물과 혈연 및 혼인 관계로 엮여 있던 인물이었다. 이를 통해 최우는 관료제 속에서 활동하는 여러 인물을 자신의 처족으로 확보하였다. 향후 최우가 정권을 세습한 이후 최우의 조력자로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리라고 기대된 인물들이다. 반면에, 최충헌은 최우와 권력 승계를 놓고 경쟁할 위험성이 있는 아들들인 최향(崔珦)과 최성(崔珹)을 왕실 여성과 혼인시켰다. 왕실과의 통혼은 최충헌 가문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었지만, 이와 함께 최향, 최성에게 정치적 실권을 행사할 수 없는 왕실 구성원을 처족으로 붙여준다는 의미도 있었다. 이를 통해 최충헌은 자신이 사망한 이후에 발생할지도 모를 아들들 간의 권력 투쟁에서 최우가 우위에 설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놓고자 하였다.

최우에게 권력을 안정적으로 승계시키려는 최충헌의 포석들 덕분에 최우는 지배층 사회 내에서 최충헌의 후계자라는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시간이 흘러 고종 6년(1219) 9월, 최충헌은 자신의 집에서 71세의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 최우는 최충헌의 뒤를 이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최충헌은 죽기 직전에 다시 한번 자신의 정치적 안목을 드러냈다. 죽음을 직감한 최충헌은 최우에게 은밀히 집안의 분쟁이 발생할까 걱정되니 다시는 자신의 집으로 오지 말라고 지시한다. 그는 자신이 사경을 헤매거나 사망한다면 자신의 집이 후계자로 인정받은 최우에게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최충헌의 병이 위독해지자, 그의 최측근인 최준문(崔俊文) 등은 최향을 최충헌의 후계자로 만들고자 최우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이미 최충헌의 지시를 들은 최우는 이들의 음모에 당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이들의 반발을 뿌리치고 집정자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하였다.


그림 3. 최충헌 묘지명 탁본, 국립제주박물관 소장(이미지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http://www.emuseum.go.kr/main)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최충헌은 단순히 무력만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지 않았다. 그는 뛰어난 정치적 안목을 활용하여 당시의 정치·사회적 구조를 꿰뚫어 보고 각 상황에서 요구되는 행동을 잔인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취하였다. 이를 통해 최충헌은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더 나아가 자신의 후손에게까지 권력을 물려주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의 정치, 사회 구조 속에 매몰된 개인이 아니라, 이러한 구조 속에서 각 개인이 어떻게 자신만의 역량을 발휘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역사 속 사건, 역사 속 인물을 흥미롭게 읽어내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

김효섭, 「무신집권기 최충헌 가계의 통혼과 그 정치적‧사회적 기능」, 『震檀學報』 134, 진단학회, 2020.
김효섭, 「최충헌 정권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무신집권기 정치세력의 특징」, 『한국학논총』 55, 2021.
나만수, 「高麗 武人執權期의 國王과 文班」, 『震檀學報』 63, 진단학회, 1987.
나만수, 「高麗 明宗代 重房政治와 國王」, 『國史館論叢』 31, 국사편찬위원회, 1992.
박재우, 「고려 최씨정권의 권력행사와 왕권의 위상」, 『한국중세사연구』 46, 한국중세사학회,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