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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⑩] 악인전 : 매국적(賣國賊) 선우순과 창귀(倀鬼) 선우갑 형제_정종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3,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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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10월(통권 22호)
[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 악인전: 매국적(賣國賊) 선우순과 창귀(倀鬼) 선우갑 형제정종현(인하대 한국어문학과 부교수) 1. 임시정부의 ‘칠가살(七可殺)’이 겨냥한 형제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도쿄의 조선유학생들은 분주했다. 그들은 이광수가 쓰고 일어와 영어로 번역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국 대사관과 일본 정부 대신들, 국회의원, 조선총독부, 신문사와 잡지사 등에 부쳤다. 이어서 오후 2시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600여명의 조선유학생들이 모였다. 최팔용의 사회로 백관수가 독립선언서를,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했다. 곧바로 경시청 고등과 형사들이 들이닥쳐 주동자들을 콕 찍어서 체포했다. 그 유명한 도쿄 2·8독립 선언 당일의 풍경이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이 사건 주역들의 면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느낌이 있다. 그럼에도 여기서 당시 상황을 묘사한 까닭은 독립 선언 주역들 틈새에서 특별한 활약(?)을 했던 한 조선인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선우갑(鮮于甲, 1893∼?). 일본 경시청 고등과 경부보였던 그는 도쿄유학생 감시를 맡아 암약한 밀정이었다. 일본 형사들은 선우갑의 손가락이 지목하는 유학생들을 차례로 포박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1920년에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가지 대상(七可殺)”으로 (1) 적의 수괴 (2) 매국적(賣國賊) (3) 창귀(倀鬼) (4) 친일부호 (5) 총독부관리 (6) 불량배 (7) 모반자를 공표했다.주1) 여기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형제가 있었다. (2) “독립을 반대하고 적의 국기 하(下)에 재(在)하기를 주장하는 흉적”인 형 ‘선우순’, (3) “독립운동의 기밀을 적에게 밀고하거나 지사를 체포하며 동포를 구타”하는 ‘창귀(밀정, 형사)’인 동생 선우갑이 바로 그 형제였다. 그림 1. 상해임시정부가 처단 대상으로 공표한 ‘칠가살’(독립신문, 1920년 2월 5일자)
그들 형제는 어쩌다 이런 악한이 되었을까? 문학은 밀정에게서도 삶의 복잡성과 개연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박경리의 대하장편소설 《토지》에 김두수라는 밀정이 나온다. 몰락양반 김평산은 재산을 탐해 ‘최참판댁’ 하녀 귀녀와 당주 최치수를 살해한다. 그 음모가 드러나 김평산이 처형당하고 그 아내 함안댁은 수치심에 자살한다. 그 아들인 김거복(김두수)은 부모의 죽음에 대한 원한과 공동체에 대한 비뚤어진 원망으로 밀정이 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악명 높은 친일파 박춘금(1891-1973)의 삶에서도 공동체에 대한 원한을 감지할 때가 있다. 신분이 비천했던 소년 박춘금은 대구감영 급사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직공, 광부, 노무자 등 밑바닥 삶을 전전했다. 폭력배가 된 그는 흑룡회 계열의 야쿠자와 인연을 맺는다. 이후 조선노동자 구호를 표방하며 상애회를 조직하지만, 오히려 기업가 편에서 조선노동자를 통제하고 갈취했다. 관동대지진 때에는 조선인 노동봉사대를 결성하여 시체 처리를 맡았다. 일설에 의하면 박춘금은 관동대지진의 혼란 중에 일본 ‘천황’이 사는 황거 앞에서 빗자루를 들고 지진 먼지를 쓸었다고 한다. 이처럼 기민한 처세에서 느낄 수 있는 성공에 대한 강한 의지는 그를 1932년과 1937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당선된 최초의 조선인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도 지원병으로 내보냈다. 그에게 일본은 조선 왕조에서 천대받던 최하층민이 권력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평등한 근대 국가로 여겨졌을 것이다. 김두수와 박춘금 같은 부류가 반민족적 악인이 된 계기를 살피려는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속담처럼, ‘어둠의 자식들’인 밀정과 악명높은 친일파들도 그 행위에 대한 나름의 합리성을 주장한다. 이들의 삶의 궤적을 종합적으로 살피고 제대로 비판하는 것이,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도 조선 민중의 행복과 독립을 위해 삶을 바친 영웅들의 비범함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이제부터 한 악인 형제의 삶을 살펴보자. 2. 사이토 총독의 고급 정탐, 선우순 1924년 잡지 《개벽》 12월호에는 〈함흥과 원산의 인물백태〉라는 기사가 한편 실려 있다. 함흥과 원산 출신 명사들을 차례로 설명하다가 한 친일 인사를 소개할 순서에 이르렀다. 기자는 “친일자 중에서도 친일자이니까 평양의 선우순 같이 불문에 부(付)하고”주2)라며 그 설명을 생략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이처럼 선우순은 당대 대중들에게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 친일파의 대명사였다. 그의 삶은 어떠했기에 저널리즘과 대중에게 이런 지독한 미움을 받았을까? 선우순은 1891년 3월 24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08년에 안흥의숙을 졸업하고주3), 1910년 11월에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1909년에는 서북·관서·해서 지역 인사들이 만든 애국계몽단체인 서북학회에서 활동했다. 당시 열아홉 살의 청년이었던 그는 박은식이 주필로 있던 《서북학회월보》에 6회에 걸쳐 〈국가론의 개요〉를 연재했다.주4)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비롯해 근대 국가에 관한 당시의 다양한 이론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1931년에 출간된 《조선신사록》에는 선우순이 1907년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해 1910년 3월에 퇴사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청년 선우순은 서북 지방의 쟁쟁한 선각자들과 함께 대한제국을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려는 애국계몽운동의 대의에 동참하고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를 퇴사한 1910년 3월 무렵부터 선우순은 일본인이 창간한 《평양신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선우순의 친일화는 아무래도 이 무렵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12년 6월에는 매일신보사 평양지국 주임이 되었다.주5) 이 무렵 그는 식민지 선교를 목표로 일본조합기독교회가 1911년 평양에 세운 기성(箕城)교회에 출입했다. 이때 일본조합기독교회의 조선 전도부 관계자의 도움으로 도시샤대학 기독교신학과에 유학한다. 1915년 4월 졸업하고 돌아온 그는 기성(箕城)교회의 전도사가 되었다.주6) 그는 자유주의 신학에 기초한 다카하시 타카조 목사의 강연록을 국한문판 『耶穌傳硏究』주7)로 번역하는 등 조합교회 전도에 앞장섰다. 그림 2. 1914년 10월 기성교회당(왼쪽) 완공 - 다카하시 목사와 선우순 전도사. 오른쪽은 용악동교회(《朝鮮傳道寫眞帖》(1916), 同志社大学 신학도서관 소장)
그가 ‘직업적 친일분자’가 되어 본격적이고 노골적인 친일 활동을 시작한 것은 3·1운동 직후부터이다. 선우순은 1919년 4월 3·1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일본조합교회 주도로 전개된 ‘대시국특별운동’ 서선(西鮮) 방면 책임자로 활동했다. ‘배역유세단(排逆遊說團)’을 만들어 전국을 돌면서 만세를 부르지 말도록 종용하였고, 중추원의 지방유력자 모임에서 ‘조선독립불능론’을 강연했다. 이어서 국민협회와 함께 1920년대의 대표적 친일단체였던 대동동지회를 창설했다. 대동동지회는 평남지사 시노다 지사쿠(條田治策)의 비호 아래 1920년 10월 26일 독립사상이 강한 평안남북도에서 친일세력을 부양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선우순이 회장을 맡은 대동동지회는 평양에 본부를 두고 경성(서울)에 지부를 설치했으며, ‘내선융화’와 ‘공존공영’을 위한 사상 선전 활동에 주력했다. 대동동지회는 공존공영의 논리에 부합하는 친일분자를 육성하기 위한 일본유학 사업과 교육기관 설립, 그리고 각 지방의 순회 강연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주8) 3·1운동 이후 사이토 조선총독은 조선인의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으로 친일 세력을 만드는 작업에 치중했다. 그는 직업적 친일분자를 육성해 이용하고자 했다. 사이토는 다양한 친일분자들을 면담했고 그들에게 기밀비를 뿌렸다.주9) 1919년 8월부터 1926년 12월까지 선우순은 사이토 총독을 119회 면회하였다. 이는 22일마다 1회 꼴로 조선인 중에서 최다 면회자였다. 귀족 가운데 제일 면회가 잦았던 송병준도 58회로 선우순의 총독 면회 횟수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는 공개적인 친일파였으며, 사이토 총독이 기르는 고급 정탐이었다. 총독과의 면담에서 그는 조선 지식인과 종교계 동향을 설명하고, <조선의 최근 상황과 대응책朝鮮ノ最近ト對應策>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조선민족운동에 대응하기 위해서 그는 “고등정탐의 능란함을 활용하여 주모자 등의 내정을 파악해 미연에 방지”하고 “각 지방 도·부·군의 유력자를 이용하여 지방의 인민에게 망동자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충분히 권유”주10)하는 등의 사상 선전을 제안했다. 선우순은 ‘내선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1927년 한 글에서 그는 “내선인은 마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혹은 웨일스와 같이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서 대륙방면으로 발전하고 세계적으로 웅비하는 방법은 조선을 독립시켜 소위 3천리 강산과 2천만 인구로써 나가기보다는 일본과 하나가 되어 넓은 면적과 7천만 인구로 나가는 방법이 확실히 유리할 것”주11)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친일의 대가로 중추원 주임관 대우 참의와 평양부협의원 등을 지냈다.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청년 지사에서 ‘직업적 친일분자’가 된 선우순에게도 나름의 핑계가 있을 것이다. 그는 불가능한 독립의 기대로 민중에게 고통을 주느니 강한 일본과 하나가 되어 ‘공존공영’의 길을 걷는 것이 조선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 측에도 유럽이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식민지에 대해 취했던 폭압적인 방식이 아니라 여러 지역이 한 몸이 된 영국과 같은 형태의 ‘내선일체’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그들의 이해와 동정을 구했다. 이러한 논리는 1920년대의 자치론과 참정권 논의를 거쳐 1930-40년대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친일 담론의 회로였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 모두가 조선 민중의 복리와 행복을 내세웠다. 민중의 행복을 위한 불가피한 친일이라는 논리가 일말의 진정성이 있다면, 적어도 현실에서 고통 받는 조선 민중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느껴져야 한다. 하지만 선우순의 삶에서는 조선 민중의 행복과 복리를 앞세운 주장과는 정반대로 민중에 대한 패악질만이 확인될 뿐이다. 1922년 2∼3월에 걸쳐 신문들은 평양발 사기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보도를 종합하면 이러하다. 대동동지회 회장 선우순이 위세를 이용해서 ‘독립단’의 안주(安州) 지단장 홍이도(洪彛道) 외 여러 명을 가출옥시켜주겠다며 금품을 뜯어냈다가 사기죄로 피소되었다. 일본인 검사는 그를 기소하려 했지만, 조선총독부의 비호로 결국 불기소 처분되었다.주12) 이 사건이 일어난 두해 뒤 그는 ‘인력거 삭전 청구소송’으로 다시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게 된다.주13) 선우순은 4개월여 동안 박만성의 인력거를 자가용처럼 타고서는 삼백여원의 삯을 지불하지 않았다. 삯을 치르라고 재촉하자 백오십원만 주고는 시치미를 떼버린다. 박만성은 어쩔 수 없이 소송을 걸었고 궐석재판에서 승소하였지만, 선우순은 다시 ‘고장(故障)의 신립(申立)’을 제기하여 소송을 원점으로 돌렸다. ‘고장의 신립’이란 궐석재판의 피고가 이의를 제기하면 승소 이전으로 돌아가 재판이 원점에서 재개되는 제도였다. 법을 잘 모르는 민중을 괴롭혔던 민사소송의 독소 조항이었다. 박만성은 하루 벌어 호구를 하는 인력거꾼이었다. 여러 달 재판에 끌려 다니느라 벌이도 못하고 소송비용으로 고통받았다. 문득,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가 떠오른다. 이 소설은 만석꾼 부자 윤직원 영감이 실랑이 끝에 인력거 삯을 5전 에누리하고 더 못 깎아서 분해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윤직원 영감의 추태 정도는 애교로 보일만큼 법을 악용해 괴롭힌 선우순은 말 그대로 악한이었다. 사십대 중반의 때 이른 그의 죽음은 인과응보의 뜻을 새삼 곱씹게 한다. 3. 동아시아를 넘나든 밀정 선우갑의 해악 ‘난형난제’라는 말이 있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출중한 형제를 일컫는다. 이 말을 반대의 경우로도 쓸 수 있다면, 선우순과 그 동생 선우갑은 친일과 악행에서 난형난제라 할 만하다. 선우갑은 선우순의 두 살 터울 아래 동생으로 1893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장 배경과 학력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가 일본의 고등계 형사와 밀정이 된 데에는 형 선우순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렇지만, 선우갑과 선우순의 활동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선우순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로는 평양을 중심으로 조직을 만들어 전국적인 친일파로 명성(?)을 쌓았다. 그가 주도한 대동동지회는 그 본부를 평양에 두었고, 경성(서울)에 그 지부를 두었다. 간부 중에는 서북학회와 신민회 등에서 애국지사로 활동하다 친일파가 된 평안도의 인사들도 있었다. 독립 운동 진영에서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서북파가 있었다면, 친일파 중에서도 기호파 집단과 경쟁심을 갖고 있는 일종의 서북계 친일파가 존재했던 셈이다. 평양에 거점을 둔 정주(定住)형 친일파인 선우순과 달리 선우갑은 일본, 상해, 북경, 미국 등을 종횡했던 이동형 밀정이었다. 2·8독립선언 사건이 일어난 8개월여 뒤 《신한민보》는 “일본 동경 경시청 형사로 우리 유학생을 고생시키던 선우갑이란 놈은 비밀히 상해로 건너가 일본 여관에 숙박하면서 무슨 일인지 계획한다더라”주14)고 전하고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 김구는 당시 선우갑을 잡았다 놓친 경위를 《백범일지》에 다음처럼 기록했다. 경무국장 시절 고등정탐꾼 선우갑(鮮于甲)을 유인하여 포박·신문한 일이 있었다. 그는 죽을죄를 지었음을 시인하고 스스로 사형 집행을 원하였지만, 나는 뉘우치는 것을 보고 “살려줄 터이니 큰 공을 세워 속죄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가 소원이라 하기로 결박을 풀어 보내주었더니, 그는 상해에서 정탐한 문건을 임시정부에 바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나는 시간을 약속하고, 그를 만나기 위해 김보연·손두환 등을 왜놈의 승전여관(勝田旅館)으로 보냈다. 과연 그는 왜놈에게 고발하지 않았고, 내가 전화로 호출하면 시간을 어기지 않고 즉시 대기하였다. 그러다가 4일 후 몰래 도망하여 본국에 돌아가서, 임시정부의 덕을 칭송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주15) 당시 상하이에는 밀정이 들끓었다. 《백범일지》 곳곳에는 밀정들의 집요한 침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심지어 밀정을 잡는 경무국의 경호원 중에도 밀정이 있었다. 김구는 밀정의 공작에 의해 이운한이라는 자가 권총을 난사한 ‘남목청 사건’주16)으로 가슴에 총을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밀정 색출과 처단이 중심 임무였던 경무국장 김구의 손에 잡힌 선우갑은 죽음을 자청하는 등 반성의 몸짓을 연기하다 기회를 틈타 상하이를 탈출한 것이다. 그림 3. 〈무수한 한국지사를 원수에게 찾아준 선우갑〉, 《신한민보》 1920년 7월 29일자
그림 4. 《백범일지》 원본, 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김구가 들었다는 “임시정부의 덕을 칭송”한다는 풍문은 헛소문이었던 듯하다. 선우갑은 1920년 4월경 재미조선인들의 독립운동 상황을 정탐하라는 조선총독부와 일본경시청의 지시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일본 외무성은 샌프란시스코 일본 총영사에게 공문을 보내 선우갑의 신변 보호와 각종 편의를 지시했다. 조선총독부는 기밀비 2,000원을 지원했다. 선우갑은 임정의 대통령 이승만, 내무차장 현순 등에 대해 정탐하다가 1920년 10월 경 조선으로 돌아왔다. 1925년 9월 초순 무렵에 그는 다시 베이징에 파견되었다. 당시 문건에 따르면, 그곳에서 선우갑은 중국 정계의 주요 인물들에게 ‘동양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아시아주의 운동의 중책’을 설명하며 신문 등을 만들고 ‘재만주 불령선인과 지나(중국)의 무산운동의 연계를 파괴’하는 활동을 했다.주17) 이어서 1926년 6월에는 관동청 안동현 헌병대의 중국어 통역에 임명되었다. 통역의 직함을 달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헌병대를 배경으로 밀정 활동을 한 것이었다. 밀정 선우갑이 독립운동 진영에 끼친 해악의 구체적인 실상은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칠가살’에 그 이름이 오르고 《신한민보》 등의 신문에 그의 동정이 보도될 만큼 이미 그는 알려진 밀정이다. 독립운동 단체에 직접 잠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각 지역에서 암약하던 노출되지 않은 밀정들을 활용하는 여러 공작을 맡았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총독부와 경시청 그리고 외무성 및 일본군 관련 자료를 발굴 대조하여 그 진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가 끼친 해악은 밀정 활동에만 그치지 않았다. 선우갑은 기생 출신인 문명하(文明河)와 살림을 차리고 혼인신고 후 평양에서 살다가 안동현 헌병대 근무지로 함께 이주했다. 이후 그는 평양을 오가다 다시 기생 김명옥에게 빠져 문명하를 홀대했다. 이에 문명하는 선우갑에게 이혼과 부양료 소송을 제기했다. 문명하는 헌병대의 비호를 받는 선우갑과의 이혼소송에서 승소하기 위해서 부부로 살면서 알게 된 선우갑의 형사상의 범죄상을 검사국에 고발했다. 그 고발에 따르면, 선우갑은 1926-7년에 사기도박으로 2,300여원의 돈을 편취했고, 중국 다롄과 함경도 함흥, 강원도 강릉에서 아편을 사다가 안동현, 평양 등지에서 중국인과 조선인들에게 팔았다. 이외에도 안동현에서 비단 150여필을 밀수하여 평양 포목상에 넘겼다.주18) 선우갑은 작은 권력을 탐한 밀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치부(致富)를 위해 민중들을 아편 중독에 빠지게 한 말 그대로의 창귀(倀鬼)였다. 알려지지 않은 그의 말로가 제발 편치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4. 우리 안의 밀정들 2019년 KBS 탐사보도부는 <밀정> 1·2부를 제작 방영했다. 방송은 1년여 동안 일본 외무성과 방위성의 기밀문서, 각종서신, 중국 당국이 생산한 공문서 등 5만장을 입수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895명의 밀정혐의자를 특정했다. 그 결과는 우리를 경악케 했다. 안중근의 동지 우덕순을 비롯 김좌진의 비서와 김원봉의 동지 등 독립운동가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주19) 이들 밀정은 ‘우리’ 안에서 독립운동가의 탈을 쓰고 동지를 팔고 조직을 붕괴시켰다. 그림 5. ‘상하이에 있는 배일 조선인 간부 및 결사자 200여명 사진’, 밀정이 넘긴 자료를 다시 조선군참모장이 육군차관에게 보고,
《밀정, 우리 안의 적》에서 재인용
밀정은 암적 존재였다. 단 한 명의 밀정만 침투해도 조직 안의 불신과 분열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었다. 선우순이 사이토 총독의 기밀비를 가지고 꾸민 여러 음모와 정탐 활동에 의해 직접 희생된 혁명가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선우갑도 2·8독립선언의 주역들을 파악하여 일제에 넘겼다. 이외에도 상해와 북경, 미국과 안동현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가들에게 끼친 밝혀지지 않은 해악이 틀림없이 더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형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선우순·선우갑 형제의 악행은 먼 과거의 일로 치부하고 끝낼 일일까? 선우순은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나와서 도시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자이다. 해박한 법률 지식을 자랑하고, 사랑을 설교하는 전도사였다. 정의와 사랑을 설파하는 자가 독립운동가의 가족에게 가출옥을 미끼로 금전을 편취했고, 법률 지식을 활용한 소송으로 인력거꾼을 괴롭혔다. 선우갑도 이혼 소송에서 패소하자 아내 문명하를 도운 힘없는 증인을 위증죄 소송으로 괴롭혔다.주20)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이 아닌가? 입만 열면 국민을 내세우면서 민중의 돈을 편취하고 있는 오늘날 저 광장의 가짜 목회자들, 절박한 생존의 벼랑 끝에서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 소송으로 월급과 재산을 가압류하여 자살로 내몰았던 법기술자들. 그들이 버젓하게 활보하는 지금-여기의 현실은 과연 선우순·선우갑 형제의 악행이 과거의 일인지 의구심이 들게 한다. 국민을 내세우며 사실은 공동체를 해치는 그들이야말로 ‘우리 안의 밀정’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안의 밀정’을 어떻게 해야 할까? 1921년 대동강 반월도에서 선우갑의 갑질에 맞섰던 평양 부민들의 모습에서 어떤 교훈을 시사 받을 수 있다.주21) 예로부터 평양서는 여름이면 더위를 피하기 위해 대동강 반월도에서 어죽을 먹고 목욕도 하며 유쾌히 노는 피서 풍속이 있었다. 많은 평양 부민들이 일요일을 맞이하여 놀던 중에, 기생을 태우고 배놀음(船遊)을 하던 선우갑이 옷을 벗고 목욕하는 한 청년의 뺨을 풍기문란이라며 세차게 후려갈겼다. 뺨을 맞은 청년이 선우갑이 경관이라는 서슬에 질려 항의도 못하고 돌아선 참이다. 이를 지켜보던 ‘협객 김정식’은 “여보 당신이 사람이오 짐승이오 아무리 경관이기로 무리하게 당신을 구타함에야 잠잠히 맞을 까닭이 있소”라고 청년을 꾸짖고 함께 선우갑에게 따졌다. 그는 평양의 피서 풍속을 훼방한 건 선우갑이라 지적하고, 폭행에 대해 사과를 요구했다. 선우갑은 모란봉 파출소에서 정복 순사를 데려와 자신을 비난한 김정식 등 몇몇 사람을 잡아갔다. 김정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항거했으며 피서지에서 상황을 지켜본 4-5백명의 분개한 군중들이 파출소 앞을 가득 채웠다. 독이 오른 선우갑은 다시 평양경찰본서로 “불령선인들이 잔뜩 모여 위기가 임박”했다고 연락한다. 소요가 일어난 줄 안 경관대가 출동했지만, 김정식은 그들을 향해 선우갑이 공연히 사람을 구타하여 타일렀더니 감옥에 보낸다는 둥 협박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런 풍파 끝에 김정식 등이 풀려나면서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평양 반월도의 이 에피소드에서 지금까지도 유효한 깨우침을 하나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비록 힘없는 약한 개인일지라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부당한 권력의 폭력에 당당히 맞서야 하며, 약한 이들의 연대야말로 부정한 권력에 맞서는 진정한 힘의 원천이라는 사실이다. 권력의 서슬에 주눅 들어서 자신을 짓밟는 권력에 굴복하려는 청년에게 던진 ‘협객 김정식’의 질문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여보 당신은 사람이오 짐승이오” 미주 주1) 〈칠가살〉, 《독립신문》 1920년 2월 5일자. 주2) 〈함흥과 원산의 인물백태〉, 《개벽》 54호, 1924. 12. 주3) 안흥의숙은 측량을 가르친 학교로 선우순은 제1회 63명의 졸업생 중 우등생이었다. 〈안흥의숙 졸업식〉, 《대한매일신보》 1908년 12월 6일자. 주4) 〈국가론의 개요〉는 《서북학회월보》 8호(1909.01), 9호(1909.02), 11호(1909.04), 12호(1909.05), 13호(1909.06), 14호(1909.07)에 게재되었다. 주5) 〈평양지국개설〉, 《매일신보》 1912년 6월 7일자. 주6) 평양 기성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는 옥성득, 〈평양 조합교회의 성장과 쇠퇴〉, 《기독교사상》728호, 2019. 8을 참조. 본문의 기성교회와 선우순 사진은 173쪽에서 재인용함. 주7) 高橋應藏, 선우순 번역, 《耶穌傳硏究》, 기독월보사, 1915. 주8) 대동동지회의 성격과 기관지 《공영》의 친일 논리에 대해서는 박종린, 〈《공영》을 통해 본 대동동지회의 활동과 친일논리〉, 《역사와 현실》 69, 2008을 참조할 것. 주9) 1919년에 공식적인 경찰예산이 1천 7백만엔인데, 이 중 기밀비가 4백만엔에 이른다. 이는 당시 총독부의 교육예산과 맞먹는 수치이다. 기밀비는 매년 공식적인 경찰예산에서 1/8∼1/10을 차지하였다. 김민철, 〈총독 관저를 드나든 조선인들〉, 한국역사연구회, 《우린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역사비평사, 1998. 주10)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인명편(2)》, 민족문제연구소, 2009, 287쪽. 주11) 선우순, 〈內鮮一體論について〉, 《朝鮮及朝鮮民族》1, 朝鮮思想通信社, 208쪽. 주12) 〈석방시세가 천원인가〉, 《동아일보》 1922년 2월 12일자. 〈선우순 사건, 결국 불기소〉, 《매일신보》 1922년 2월 19일자. 주13) 〈大東同志會長이 人力車軍에게 被訴〉, 《동아일보》 1924년 2월 28일자. 주14) 〈정탐 선우갑이 상해로 가〉, 《신한민보》 1919년 10월 18일자. 주15)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17, 304-305쪽. 주16) 1938년 5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통합 논의를 위해 조선혁명당 당사 남목청에 모였다. 조선혁명당원이었던 이운한이 권총을 난사하여 현익철이 숨지고 김구, 유동열, 이청천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다. 김구는 이 사건의 배후로 밀정 박창세를 지목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재석·이세중·강민아 지음, 《밀정, 우리 안의 적》, 지식너머, 2020, 211∼218쪽 참조. 주17) 〈검찰사무에 관한 기록 1: 선우갑의 행동에 관한 건_1925_10_09〉, 《국내항일운동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주18) 〈구악을 열거 검사국에 고발〉, 《동아일보》 1927년 11월 28일자. 주19) 이에 대해서는 이재석·이세중·강민아 지음, 《밀정, 우리 안의 적》, 지식너머, 2020. 주20) 〈패소한 선우갑 증인 걸어 고소〉, 《동아일보》 1928년 12월 14일자. 선우갑과 문명하의 이혼소송은 1심 문명하 패소, 2심 문명하 승소하며 이혼 및 위자료 천원, 매월 30원씩의 부양료 지급이 선고되었다. 분개한 선우갑은 재판에 결정적인 증언을 한 문명하의 의형제 손경근을 위증죄로 제소했다. 주21) 〈대동강반월도에서 삼백민중의 대소(大騷)〉, 《조선일보》 1921년 7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