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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비평] 영화 〈자산어보〉와 과거를 소비하는 현대인의 시선_기경량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25,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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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12월(통권 24호)

[미디어 비평] 

 

영화 〈자산어보〉와 과거를 소비하는 현대인의 시선


 

기경량(가톨릭대 국사학과)

 

*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팟캐스트 듣기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 〈자산어보〉

영화 〈자산어보〉는 2021년 3월 31일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사극 영화이다. 주연 배우로는 설경구와 변요한이 캐스팅되어 각각 흑산도로 귀양을 오게 된 ‘서학쟁이’ 정약전과 성리학 이상의 실현과 입신양명을 꿈꾸는 젊은이 창대 역을 맡았다. 〈자산어보〉는 흑백 영화로 제작되었다. 상업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부담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영화는 답답할 것 같다는 선입견과 달리 아름답고 우아한 영상미를 보여 준다. 넓게 수평선이 펼쳐진 섬의 자연 풍광은 마치 수묵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부여한다. 조선이라는 영화의 시대 배경과도 잘 어울리는 편이다.

영화의 제목은 19세기 초 정약전이 저술한 책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 책의 명칭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玆山漁譜》를 ‘자산어보’로 읽는가, ‘현산어보’로 읽는가의 논쟁이다. 영화에서도 나레이션 형태로 나오지만, 정약전은 책 서문에서 “흑산이라는 이름이 어둡고 처량하여 매우 두려운 느낌을 주었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편지를 쓸 때 항상 흑산(黑山)을 ‘玆山’으로 쓰곤 했다. ‘玆’는 ‘흑(黑)’과 같은 뜻이다”라고 밝혔다. 문제는 해당 글자의 음이 ‘자’도 되고 ‘현’도 된다는 점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 토론회가 열린 적도 있었고, 논문도 여러 편 나왔다. 최근에는 역시 ‘자산어보’로 읽는 게 타당해 보인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듯하다. 이준익 감독도 영화 제작 과정에서 이러한 논쟁이 있음을 인지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은 〈자산어보〉라는 제목을 선택하였다.

 

《자산어보》의 저자인 정약전은 어떤 사람

정약전은 조선 후기의 관료이자 학자이다. 일반인에게 그렇게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어서, ‘정약용의 형’이라는 식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동생의 지명도가 워낙 높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다.

정약전은 1758년(영조34) 경기도 광주 마현 출생이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이고 어머니는 해남 윤씨인데, 형형한 눈빛의 자화상으로 유명한 문인 화가 윤두서의 손녀이다. 윤씨는 정재원의 둘째 부인으로, 정약전·정약종·정약용 삼형제와 딸 하나를 낳았다. 이중 정약전과 정약용은 4살 차이로, 유독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정약전은 1783년(정조 7) 진사가 되고, 1790년 순조의 탄생을 경하하기 위해 열린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동생 정약용은 그보다 1년 앞서 이미 벼슬살이를 시작한 터였다. 동생보다 늦게 출사를 했기 때문에 관직 생활 중의 서열은 오히려 동생보다 낮았다. 그래도 정조의 배려 하에 청요직이라 할 수 있는 병조 좌랑(정6품) 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정약전 형제는 1784년 배다른 맏형인 정약현의 부인이 죽어 장례를 치를 때 사돈(정약현의 처남)인 이벽을 만나 천주교 교리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이후 교인들의 비밀 회합에 참여하는 등 한때 천주교에 깊이 발을 디뎠지만, 어느 시점부터인가 거리를 두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정부는 천주교라는 낯선 종교의 확산에 부정적이었다. 당시 정조에게 올라온 상소문을 보면 신앙을 바탕으로 민간에 확산되다가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번진 황건적, 백련교도 같은 사례와 비교하는 경우도 있었다. 1791년에는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이라는 인물이 북경의 천주교 교구에서 내려온 지침에 따라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교적 예법을 사회 질서의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 사회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윤지충은 강상의 죄를 지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결국 사형당하였다. 그는 정약전 형제들과 외사촌지간이었던 터라, 이 사건은 관직에 있던 정약전과 정약용에게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급기야 정조 사후인 1801년(순조 1)부터는 천주교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천주교와 연루된 많은 이가 체포되어 처벌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유박해이다. 정약전 형제들도 체포되어 국문을 받게 되었다. 셋째인 정약종은 천주교를 가장 신실하게 믿고 있었기에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고수하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일찍부터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다는 점이 참작되어 사형 대신 유배형이 결정되었다. 실제로 정약종의 집에서 압류된 문서 중에는 ‘이 사실을 동생인 정약용은 알지 못하게 하라’는 식의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황사영 백서(로마교황청민속박물관 소장).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유리원판사진
 

이 와중에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북경에 있는 프랑스 주교에게 서한을 작성하여 보내려다 발각되는 일이 발생했다. 서한에는 억압받는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미 유배지에 있던 정약전과 정약용은 한양으로 재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백서 사건과 연관된 특별한 혐의는 없었지만 정약전은 나주의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지가 전환되었다. 이후 정약전은 끝내 유배에서 풀려나지 못한 채, 1816년(순조 16) 흑산도 인근 섬인 우이도에서 사망하였다. 《자산어보》는 그가 유배 기간 중 흑산도의 해양 생물들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조사·정리하여 저술한 책이다.

 

죽음 앞에 선 지식인의 선택

영화 〈자산어보〉는 천주교가 탄압을 받고 정약전 형제들이 문초를 받아 귀양길에 오르는 과정 등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 정보를 극 초반에 압축적이면서도 요령 있게 잘 연출하고 있다. 이때 문초를 받는 정약전 삼형제의 태도를 각각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점은 흥미롭다.

정약종은 천주교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숨기는 바 없이 당당하게 밝히고 순교를 받아들인다. 정약용은 자신의 목숨이 걸린 상황임에도 형제간의 의리를 내세워 형의 혐의에 대해 증언을 거부하고 스스로에 대한 변호의 말을 아낀다. 반면 정약전은 오히려 천주교는 자신의 원수라고 일갈하며 혐의를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정약종의 강직함, 정약용의 고아한 인품과 더불어, 세상에 용납되지 않는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안으로 갈무리하여 숨기고 살고자 하는 정약전의 태도가 명료하게 드러나는 셈이다. 그럼에도 세 사람은 갈등 없이 서로의 선택과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정약전 삼형제가 문초를 받는 영화의 초반 장면은 생과 사를 가르는 시련에 직면한 지식인들의 고뇌와 선택을 품위 있게 드러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영화 〈자산어보〉에 이처럼 성공적인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역사 인물을 재현할 때의 영화적 욕망

앞서 언급했듯이 정약전은 동생인 정약용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그럼에도 이준익 감독은 정약용이 아니라 정약전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 이에 대해 나름의 이유와 당위를 제시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영화 전반에 걸쳐 정약전이 정약용 못지않은 인물이라는 점, 혹은 그 이상의 인물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강박이 묻어 나온다.

영화 초반 정약전이 과거에 급제하여 정조를 독대하는 장면에서는 아예 대놓고 정조의 입을 빌려 ‘네가 동생보다 낫다’고 언급한다. 또 정약전의 제자인 창대와 흑산도를 수 차례 방문한 정약용의 제자를 비교하며 창대의 그릇과 실력이 우위에 있음을 보여 주려 한다. 창대가 강진에 있는 정약용을 찾아간 자리에서 시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특히 노골적이다. 창대는 뛰어난 시작(詩作) 능력을 보이며 신분 때문에 시종일관 자신을 깔보는 태도를 취하던 정약용 제자의 콧대를 보기 좋게 눌러 버린다. 정약용은 이 장면에서도 존경할 만한 인품을 지닌 훌륭한 인물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결국 정약전이 정약용보다 더 나은 제자를 길러낸 셈이니 양자를 간접적으로 비교하고 평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에서 여러 차례 노출되는 이러한 장면은 다소 유치한 감이 있다. 자신의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다루는 인물이 그만한 가치를 지닌 사람이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가치를 대중에 잘 알려진 ‘위인’과의 비교를 통해 증명하려 하는 게 그리 좋은 방법인지 모르겠다.

 

과거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현대인의 시각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정작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따로 있다.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을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은 어떤 것인가. 창대와의 말다툼 끝에 정약전의 입을 통해 밝혀진다.

정약전은 자신이 바라는 세상이 ‘양반도 상놈도 없고, 적자도 서자도 없고, 주인도 노비도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그런 세상이다’라고 토해낸다.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성리학적 가치관과 사회 질서를 송두리째 부정한 것이다. 이는 정약전이 동생 정약용과 달리 저서를 거의 남기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힘이 센’ 주자의 성리학에 지배되고 있는 조선에서는 용납될 수 없고,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의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영화 〈자산어보〉 상의 해석일 뿐 실제로 정약전이 그러한 사상을 가졌다고 여길 만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 결국 이 해석은 영화에서 정약전을 정약용에 못지않거나, 혹은 뛰어넘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음에도 실제로 그의 사상이 담긴 저서가 거의 없는 점에 대해 감독이 제시하는 이유이자 변명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처럼 정약전을 시대의 한계마저 뛰어넘은 현자로 묘사하면서, 흡사 민주주의적 사고를 지닌 현대인이 강림한 듯 묘사하는 것은 불편한 면이 있다. 전통 시대에 대한 현대인의 우월 의식, 그리고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에 대한 멸시의 태도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영화 〈자산어보〉에서 묘사되는 정약전의 사상은 너무도 타당하다. 그야말로 ‘정답’이다. 그러한 사상을 지닌 선각자를 품지 못하고 일생 동안 섬에 가두어 괴롭힌 조선은 그만큼이나 무능하고 한심한 나라인 셈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정약전과 다투고 섬을 나갔던 창대의 실패와 좌절 역시 여기에 기인한다. 창대는 바깥 세상에서 자신이 신봉하였던 성리학의 위선과 타락상을 목도한다. 창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조선의 세상은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적인 곳처럼 보인다. 그는 결국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고 이미 죽은 스승의 그늘, ‘흑산도’ 아닌 ‘자산도’로 되돌아온다.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정약전과 시대와의 불화, 그로 인해 초래된 슬픈 결말은 조선과 성리학에 대해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부정적 고정 관념에 기생하고 있다.

과거 사람들이 껴안고 살았던 여러 문제에 대해 지금의 관점에서 해결책을 제시하고 훈계하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후대 사람들의 오만이기도 하다. 정약전을 시대와 분리하여 현대인의 화신 같은 존재로 만들고 그가 살았던 시대에 손가락질을 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 편의적인 접근이다. 역사를 활용해 시대극을 만들 때는 해당 시기의 인물을 오롯이 그 시대에 속한 존재로서 표현하는 것이 그가 겪었을 고뇌와 직면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된다. 좋은 이야기라면 과거의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얼마든지 보편적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