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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122호) 시론] 한국 고대사 연구의 미래를 위하여_권오영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1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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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2월(통권 26호)

[『역사와 현실』(122호) 시론] 

 

한국 고대사 연구의 미래를 위하여

 

권오영(서울대학교)


 

1. 한국 고대사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

전문적인 역사 연구자가 아닌 일반 대중이 한국사에 대하여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고대사와 현대사이다. 현대사는 현재의 나, 그리고 우리 사회가 어떤 지점에 서 있는지 알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학습 대상이 된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 박정희 정권의 공과, 베트남전에서 민간인 학살 문제 등 수많은 주제를 둘러싸고 자신과 진영의 이념적 지향에 따라 갈등하고 비판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고대사에 열광하는 대중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위대한 고대사의 확인, 그리고 잃어버린(?) 광대한 영토에 대한 확증이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분들은 물론이고, 전문 연구자 중에서도 이런 분들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학계의 원로라고 불리는 분들 중에도 민족이라는 주사 한 방에 이성을 상실하고 “위대한 한민족의 용틀임”에 뛰어드는 경우도 자주 목격된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고대사에 열정을 지닌 분들은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을주1) ‘악의 무리’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식민사학의 추종자인 이병도의 제자와 그 제자, 다시 그 제자들이 한국 역사학계의 기득권 세력이 되어 국민에게 식민사학이란 독극물을 주입하고 있다는 주장이 무한 반복되면서 애초 무관심하던 분들조차 이런 주장에 솔깃하게 된다.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조선총독부의 사관을 체화하여 일본의 지원금을 받아가면서 학계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주장이 과거 한때 역사 연구자라는 같은 배를 탔던 인물에 의해 무한 반복되면서 수많은 대중이 전염되고 있다.

한국 고대사 중에서도 고조선, 백제, 가야 전공자들이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 형태는 각종 매체에서의 악성 댓글, 학술대회장에서의 폭언, 협박 등 다양하다. 연구자들은 자신의 학설을 자백하는 순간 숫병아리처럼 감별될 운명에 처하게 되고, 대부분의 경우는 식민사학자라는 주홍글씨를 달게 된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일대라는 주장을 하거나, 단군의 개국 시점에 회의를 품거나,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자백’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삼국의 건국 시점에 대한 『삼국사기』의 연대관에 회의를 품어도 안 된다. 그토록 비난받던 김부식의 역사관이 이때만큼은 털끝 하나 건드리면 안 되는 절대 진리로 탈바꿈한다. 영산강유역에 분포하는 전방후원형의 고분이 일본에서 기원하여 한반도로 유입되었음을 인정하거나, 출토된 유물 중 일부가 “메이드 인 재팬”임을 인정하는 순간 그 연구자의 운명도 끝이다. 최근에는 임나라는 용어를 사용하거나 『일본서기』를 사료로 이용하는 것이 스스로 식민사학자임을 커밍아웃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해괴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고대사를 전문 분야로 택하지 않은 한국사 연구자는 최소한 이런 진흙탕에서는 한걸음 벗어나 있는 셈이니 어찌 보면 행운인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학의 신화화, 판타지화를 막아내고 인종주의와 쇼비니즘적 해석의 광풍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야말로 과학적, 실천적 역사학의 최첨병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우리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은 과연 그 역할을 다 하고 있는가? 한국역사연구회가 그동안 발간한 한국 고대사 관련 대중서, 시민강좌, 각종 기고문을 볼 때 분명히 연구자들은 나름 노력하였다. 그런데 최선을 다 하였는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항변이 따를 수 있다. 전문 연구자의 역할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역사대중화 작업만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올 법하다. 이것도 맞는 소리이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친구이고 고객이고 감시자인 대중들이 빛의 속도로 우리에게 등을 돌리는 현실에 눈 감고 있는 것은 사실 아닌가?

등재지에 한 편의 글을 더 게재하고 취업이나 승진에 주력하는 것이 분명히 생산적일 것이다. 골치 아픈 고조선이나 한일관계사는 접어두고 기존 연구성과만 부지런히 소화해도 꽤 쓸만한 논문을 작성할 수 있는 신라사, 혹은 이른바 까임방지권이 보장된 고구려사나 발해사로 달려가는 것이 우리의 뒷모습은 아닐까?

제아무리 서슬이 퍼런 국수주의자라 하더라도 광개토왕의 영토 확장사를 연구하는 연구자에게 시비를 걸 수는 없을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의 극복이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연구 인생의 전부를 바친 소수의 가야사 연구자들이 도매금으로 식민사학자로 몰리고,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 특별전이 난도질을 당해도 대부분의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강 건너 불구경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필자 역시 이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글은 누구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변명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필자를 포함한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느끼고 함께 돌파구를 찾자는 취지에서 작성한 것이다.

 

2. 고대사 연구의 대혁신이 필요한 시기
 
1) 고고학 자료에 대한 적극적 활용

한국사의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고대사 관련 학술대회가 자주 열린다. 그 배경에는 우리 고장의 역사를 현창하고자 하는 지자체, 지방 거점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국립 박물관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활동이 있다. 한편에서는 가야사 복원이 국정과제로 선정되면서 대규모 조사가 이루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마한특별법이 제정되어 그동안 소외되었던 영산강유역 고대 유적이 빛을 보고 있다.

그동안 진행된 학술대회 발표자의 인적 구성을 보면 문헌을 위주로 연구하는 연구자와 고고학적 물질자료를 위주로 연구하는 연구자가 1:1의 비율로 참여하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발표자와 토론자들은 관련된 문헌자료와 고고학적 자료를 무기로 풍성한 말잔치를 벌이지만, 끝나고 나면 남는 것이 없고 허탈해진다. 가장 큰 이유는 문헌 위주 연구자와 물질 위주 연구자 사이에 공통분모를 마련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가장 자주 들리는 말이 “저는 문헌사 연구자라서 고고학 자료는 모르지만 …”과 “저는 고고학 연구자라서 문헌은 모르지만 …” 이다.

역사연구에서 고고학과의 협동 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된 것은 1985년 제28회 전국역사학대회(공통주제: 역사학과 고고학)일 것이다.주2) “서양 고대사 서술에 있어서 고고학의 공헌(허승일)”, “중국의 고고학 성과와 고대사 연구(이성규)”, “한국고대사 서술에 있어서 고고학의 역할과 문제점(신형식)”, “역사학과 고고학(최몽룡)” 등 4편의 글이 발표되었다. 이 중 3편은 역사학자가, 1편은 고고학자가 맡은 것이다. 지금은 학계 원로가 된 연구자들이 36년 전에 이미 “역사 연구에서 고고학의 성과 활용”이란 화두를 잡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긴 시간이 흐른 현재, 일년에 적게는 1,500건, 많을 경우에는 2,000건씩 발굴조사가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새로 공개되는 정보의 양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문제는 이를 한국 고대사 연구자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 국가 형성사, 가야사, 한일관계사 연구는 문헌 자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고고학적 조사 성과에 의지하는 바가 매우 크다. 예를 들어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된 전방후원형 고분의 정체, 남해안에 점점이 분포하는 왜계 유물의 의미는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의 뜨거운 주제로 부각되었다. 이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마한과 백제에 대한 고고학적 이해를 기초로, 가야고고학, 일본 고분시대 고고학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삼국지』・『진서』・『일본서기』・『양직공도』등에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기사만으로 역사상을 정립하여야 하는 한국 고대사 연구자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새로운 발굴자료가 나올 때마다 학술대회가 개최되지만 정작 한국 고대사 연구자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갈수록 축소되고 위상은 저하되고 있다.

2019~2020년 사이에 생산된 한국 고대사 관련 논문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 결과가 발표되었다.주3)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생산한 연구 성과는 국가별로 볼 때, 신라와 통일신라, 후삼국을 포함한 것이 전체의 50%에 육박한다. 주제별로 보면 정치, 제도, 대외교류를 포함한 정치사 연구가 64%나 된다. 신라의 정치제도 및 대외교류사 연구가 여전히 한국 고대사 연구의 메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문헌, 문자자료를 이용한 전통적 연구가 아닌, 고고, 미술, 건축 등 물질자료를 통한 연구가 증가하는 현상도 보인다. 전자의 비중이 53.6%, 후자의 비중이 38.2%에 달하다고 한다. 이러한 통계치는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물질자료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시작해서는 아니고, 물질자료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고고학, 미술사학, 건축학 연구자들의 활동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문헌 위주 연구가 물질자료 연구에 의해 도전받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림 1.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남원소경(전주일보, 2019년 7월 3일자 기사에서)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중앙의 정치제도사를 넘어서서 지역사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꾸준히 강조되었다. 그러나 삼국~남북국시대에 각 지역 단위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문자자료는 매우 제한적이다. 『삼국사기』본기는 왕을 중심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자연히 왕도, 즉 중앙의 사건, 인물이 중심이 될 뿐, 지역은 중앙에 편제될 때만 잠깐 등장하고 마는 객체에 불과하다.

그런데 고고학 자료의 출현은 지역에 관계 없이 평등하다. 신라의 왕성이었던 경주에서만 자료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방으로 편제되는 대구, 경산, 성주 등 각 지역에서도 다양한 유적, 유물이 출토된다. 거대 도시화가 진행된 서울 강남에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수백 기의 백제 고분이 화성에서, 천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 역시 한국 고대사 연구자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고고학적 자료를 이용한 요리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목간이 출토되거나 토기, 기와에 문자 자료가 발견된 경우는 환호하지만, 유적의 전반적인 양상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논지 전개는 맥락을 놓치곤 한다. 비록 문자자료는 출토되지 않았지만 통일신라 남원소경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유적(그림 1)이 조사되고 있는 지금(2021년 12월 27일), 여기에 관심을 표명한 한국 고대사 연구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목간을 제외하면 새로운 문자 자료가 발견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반면 고고학 자료는 무지막지하게 쏟아질 것이다. 이런 자료를 소화하지 못하는 한국 고대사 연구자의 운신의 폭은 더욱 좁아질 것이다. 박성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문헌사’의 역할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한다.주4) 미래전망에서 미스터 둠(Mr. Doom)의 성향인 필자는 매우 비관적이다.

 

2) 융복합 연구는 선택이 아닌 필수


인문학에 속하는 여러 학문 분야에 비교할 때 역사학은 분명히 특이한 학문이다.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도표를 작성하고, 가설을 세우는 등의 작업을 해 본 적이 없음을 자랑하는 어느 인문학자의 강연을 들을 때면, 확실히 역사학은 인문학의 영역에만 가둘 수 없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실제로 역사학은 다른 학문 분야와 융복합적 연구를 진행하면서 생각지도 못하던 결과를 내곤 한다. 두가지 사례만 들어 보자.

(1) 인골에 대한 학제간 연구


익산 미륵사지 서탑은 1999년 해체가 시작되어 2018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하던 금제 사리봉영기가 출토되었고, 그 내용에 따라 이 탑의 발원자가 사택적덕의 따님인 왕후로 밝혀졌다. 13세기에 작성된 『삼국유사』무왕조 이후 미륵사지를 조영한 두 명의 주역이 무왕과 선화공주라는 사실이 700년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정설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이 기록한 일등급 사료에 의해 선화공주의 위상은 묘연해지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무왕과 선화공주가 묻혀 있다는 쌍릉이 주목되었다. 우선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던 대왕묘 발굴조사가 2017년에 시작되었다(그림 2). 1917년 일본인 학자 야츠이 세이츠(谷井濟一)의 난폭한 조사 이후 정확히 100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입구를 열자 현실 내부 중앙에 안치된 관대 위에 놓인 나무 상자가 보였다. 상자 안에는 인골이 소복이 담겨 있었다. 조사단은 뚜껑을 닫고 밀봉한 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분석을 의뢰하였다.



그림 2. 익산 쌍릉 대왕묘의 내부
 


법의학, 체질인류학, 유전학, 생화학, 임산공학, 물리학, 암석학, 고고학, 역사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학제간 연구를 진행한 결과 이 뼛조각들은 여러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것이며, 신장이 161∼170cm 정도로서 상당히 큰 편이고 육십 대 이상의 남성, 생전에 낙상한 결과 골반 뼈에 골절이 생겨 후유증을 앓은 사실, 늙어서 DISH(광범위 특발성 뼈과다증: Diffuse Idiopathic Skeletal Hyperostosis) 라는 병에 걸려 척추에 극심한 통증을 안고 살았다는 점을 밝혀냈다. DISH란 병은 인대가 골화(뼈처럼 되는 현상)되는 희귀질환으로서 50세 이상의 남성에게서 발병할 가능성이 높으며, 원인이 분명치 않으나 어패류를 장기간 다량 섭취한 결과로 생길 수 있다고 한다. 법의학자들은 종전 연구에서 어금니를 여성의 것으로 본 주장에 반대하고 연령이 많은 점은 분명하지만 성별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연대측정을 맡은 물리학 팀은 정강이뼈에서 떼어낸 시료를 분석하여 이 인골의 주인공이 숨을 거둔 시점은 620∼659년 사이일 가능성이 68%라는 결과를 발표하였다. 임산공학전문가는 유골함의 수종이 1917년 야츠이가 조사 종료 후 돌문을 닫을 때 사용한 나무쐐기와 같은 수종임을 밝혀냈다. 일제 강점기의 발굴단이 흩어져 있던 인골을 수습하고 부랴부랴 제작한 나무 함에 넣어 두었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인골의 주인공이 노년에 DISH로 고생한 사실과 사택왕후의 기원이 담긴 금제 사리봉안기에서 유독 대왕의 건강을 기원한 사실이 서로 무관하지 않음을 설명하였다.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의 규모는 왕릉급임이 분명하고, 그 연대는 7세기 전반 무렵으로 비정된다고 하였다.

결국 7세기 전반에 사망한, 평균 이상으로 큰 신장의 노년 남성, 고급스런 음식을 장기간 섭취한 결과 발생한 질병으로 인해 극심한 통증으로 장기간 투병한 병력, 익산이란 신도시에 묻힌 백제의 왕은 무왕을 빼고는 다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마침내 2018년 7월 18일, 이 인골은 백제 무왕의 것으로 공식 발표되었다. 제대로 수습된 유물도 거의 없고, 피장자의 신원을 밝혀줄 문자 하나 없는 무덤, 고대의 것인지 최근 것인지조차 알 수 없던 인골은 법의학, 체질인류학, 지구과학 등 다양한 분야와 협업한 결과 문헌으로는 도저히 밝힐 수 없었던 정체를 드러냈다.주5)

2021년 2월 19일에 진행된 한국고대사학계의 동계합동토론회의 공동 주제는 “한국 고대의 질병과 의약”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주제 선정이었다고 판단되지만 참신하면서 시의적절한 주제라고 판단되었다. “한국 고대 질병 연구의 궤적과 과제”라는 기조 강연에 이어 총 6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시청자들의 관심을 확 끈 주제는 단연 2개, 즉 “한국 고대 기생충과 질병”, “한국 고인골에 남은 질병의 흔적”이었다.주6) 2개의 주제 모두 발표자는 3인씩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발표자 중에 한국 고대사 연구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한국고대사학회의 좋은 기획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 연구에 한 발이라도 걸친 한국 고대사 연구자가 전무하였던 것이다.

인골을 통하여 고대인의 성별과 신체적 특징, 연령을 추정하는 초보적인 연구는 이미 과거의 이야기이다. 생시에 앓았던 질병, 직업, 영양상태, 식료의 종류, 거주하던 지역, 친족관계에 대한 연구가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주7)

속히 한국 고대사 연구자도 이 흐름에 동승하여야 한다. 한민족의 기원을 선진문헌에 나오는 단편적인 기사, “예”, “맥”, “한”의 이동이라는 낡은 틀로 설명하던 단계는 끝내야 한다. 고인골과 DNA 연구를 통해 인류의 진화와 이동, 민족의 형성을 설명하는 세계적인 흐름에서 우리만 낙오될 수는 없다. 비록 우리는 학창 시절에 이런 연구를 접한 적도 없고, 구체적인 내용의 학습에 어려움을 겪겠지만 우리들의 후배, 학생들이 우리의 전철을 밟게 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몰랐지만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라는 자세를 갖지 못하면 한국 고대사 학계는 고립되고 우리 세대 연구자들은 훗날 후배 연구자에 의해 “시대의 흐름을 역행한 우물안 개구리”로 매도될 것이다.

(2) 지구과학, 토목공학과의 협업

고구려 장수왕이 파견한 승려 도침의 꼬임에 의해 백제 개로왕이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고를 탕진하고 결국 475년에 파국을 맞게 되는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구절이 “烝土築城”이다. 직역하면 “흙을 쪄서 성을 쌓았다”가 되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의 해석은 제각각이었다. 판축을 의미한다는 설, 많은 흙으로 쌓았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정곡을 찌르지는 못하였다.



그림 3. 증토축성의 통만성
 


그런데 개로왕의 비극이 일어나기 불과 몇 십년 전인 413년 대하의 혁련발발이 통만성을 축조할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진서』에 완전히 같은 표현 “烝土築城”이 등장한다. 통만성(그림 3)은 황하 상류인 섬서성 유림에 소재하는데 발굴조사 결과 석회를 넣어서 판축하였음이 밝혀졌다.

고고학자인 심광주는 한 발 더 나아가 석회 사용과 증토의 상관관계를 밝혀내고자 하였다.주8) 석회는 탄산칼슘(CaCO3)으로서 자연에서는 석회암이나 조개껍질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에 825도 이상의 고열을 가하여 이산화탄소(CO2)를 날려버리면 순수한 CaO, 즉 생석회가 남게 된다. 생석회를 물에 풀어 맑은 물 상태의 석회수 수용액을 취하고 물을 증발시키면 비로소 백색 가루인 소석회가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화학반응에 의해 엄청난 열이 발생하게 되는데 고대인들은 이 발열반응을 증토라고 표현한 것이다. 즉 증토축성이란 석회를 이용한 토목공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백제가 5세기에 이미 일종의 콘크리트 공법을 터득하였던 셈이 되며, 석회의 생산도 이루어졌음을 의미하게 된다. 문헌에 단 4개의 글자로 표현된 ‘증토축성’은 고고학, 토목공학, 화학의 협동 연구를 통해 그 정체를 드러내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학문분야가 결합한 학제간, 융복합 연구를 통하여 역사학자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주제가 해결된 경우는 매우 많다. 역사학자가 지구과학, 공학, 의학 등 모든 분야를 섭렵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융복합과 통섭의 마인드를 갖추고 관련 분야의 연구자들을 모아서 역할을 분담하고 의견을 조율하면서 연구를 추진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아니면 고고하게 ‘인문학’의 담장 속에서 안주할 것인지 선택의 문제이다.

 

3) 시급한 비교사적 시각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의 연구 대상은 고조선, 부여, 옥저, 동예,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이다. 여기에 탐라, 영산강유역을 포함시켜도 대세는 마찬가지이다. 『삼국지』동이전에 입전되어 있는 삼한을 연구하려면 동시기에 수십 개의 정치체가 분립되어 있으며, 협력과 상쟁을 거듭하던, 그러면서 수장의 권력이 강화되고 있던 왜와 비교하여야 한다. 하지만 야심차게 일본고대사 연구를 시작한 초심자는 크게 당황하게 된다. 한국과 일본의 시대구분 차이 때문이다. 『삼국지』에서 왜의 여왕 히미코(卑彌呼)가 활동하던 시대는 야요이(彌生)시대, 5세기에 남조에 사신을 보내던 다섯 명의 왕(倭五王)은 고훈(古墳)시대 사람이다. 일본에서 고대라는 시대는 우리의 남북국시대부터 고려 전기에 해당되는 7세기 이후부터 헤이안(平安)시대를 지칭한다. 그러니 고훈시대는 아직 고대사회에 진입하기 전단계로 간주된다.

근초고왕의 칠지도, 가야의 대외관계를 연구하기 위하여 일본 고대사 책을 펼쳐도 다루는 시간대의 차이로 인해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야요이시대와 고훈시대를 공부하여야 하지만, 이 두 개의 시대는 철저하게 고고학적 개념에서 만들어진 시대라서 생소하게 다가온다. 일본에서도 문헌을 위주로 연구하는 고대사 연구자들은 야요이시대와 고훈시대 연구의 전면에 나서지 못한다. 이 분야는 거의 고고학자들의 활동무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고고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한국 고대사 연구자가 일본 고고학 연구에 뛰어들고 일가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조선 연구자가 동시기 흉노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조선과 동시기에 유라시아 동부에서 활동하면서 한과 화전 양면의 교섭을 진행하던 우순, 월지, 민월, 남월에 대한 연구를 병행할 때 비로소 고조선의 실상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문헌자료는 부족하고 고고학적 자료는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위만조선 연구의 돌파구는 거의 같은 시기에 유사한 형태로 국가를 성립한 남월국에 대한 이해에 있다고 판단한다.주9) 한군현에 대한 연구 역시 한 무제가 남월 고지에 세운 영남9군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중국 군현에 인접하여 이이제이책을 뿌리치고 마침내 고대 국가를 성립시킨 백제사는 유사한 경험을 가진 베트남 중부의 임읍(林邑, Champa)을 통해서 보완할 수 있다(그림 4). 바다에 접한 복수의 정치체가 느슨하게 결합된 형태의 가야는 메콩강 하류역에서 성장한 부남(扶南, Punan)과 좋은 비교 대상이 된다.



그림 4. 참파 조각을 모아 놓은 베트남 다낭의 참(Cham) 조각 박물관
 


우리는 한국 고대사를 구성하는 여러 국가들의 발전 과정이 동일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삼국지』동이전에 등장하는 많은 정치체들의 발전 수준을 읍루를 최저점에 두고 부여, 고구려를 최상위에 두면서 나머지를 그 중간 어딘가에 배치하는 데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원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간 부여와, 해양성을 강한 특징으로 삼은 구야국의 성격이 같을 리 없다. 부여와 고구려, 발해는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 거란과 비교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한국 고대사 연구자가 중국사와 일본사(일본고고학)는 물론이고 만주일대와 북아시아에서 명멸한 종족과 국가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주10) 자연스럽게 ‘한국 고대사 연구자’는 ‘동부 유라시아 연구자’, 혹은 ‘아시아 고대사 연구자’로 변신하게 된다.

 

 

3. 미래의 고대사 연구는 어떻게 진행될까?

 

1) 가속화될 과학기술과의 접맥


1971년도에 무령왕릉이 발견된 이후 50년에 걸친 시간이 지나면서, 무령왕릉과 출토 유물, 그리고 무령왕의 시대에 대한 학계의 이해는 매우 깊어졌다. 그런데 내막을 들여다보면 출토 유물을 다루는 미술사 연구는 그나마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나, 고대사와 고고학적 연구 성과는 퇴조하고 있음이 보인다. 반면 유물의 제작기술, 재질 분석, 보존처리 방안을 다루는 과학적인 연구가 크게 늘어났고, CT 등 첨단 장비를 활용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마이크로한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령왕릉 연구의 주도권이 역사학자와 고고학자의 손을 진작 벗어나서 미술사학자의 손을 거쳐 이제는 완전히 보존과학자에게 넘어갔다.”라고 진단된다. 문제는 보존과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한국 고대사학계로 환류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문분야 간 벽 낮추기가 성공하지 못하였던 셈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새로운 과학적 연구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자세가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에게 부족하였던 것이다.

오래전에 전자공학을 전공하는 교수와의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진공관이 개발되었을 때 유학한 교수는 귀국 후 평생 진공관만 강의하고, 트렌지스터가 개발되었을 때 유학 다녀온 교수는 평생 트렌지스터만 강의한다고 한다. 시대는 이미 바뀌어 집적회로(IC)의 시대에 접어든지 오래되었지만, 같은 학과에서 교수의 세대에 따라 진공관, 트렌지스터, 반도체 강의가 각각 진행된다는 약간은 과장된, 자조적인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자신이 젊었을 때 공부하던 내용과 방법론을 평생 버리지 못하므로,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방법론과 정보에 어두워지게 되고, 자신이 아는 것만 가리친다는 것이다.

수십 년 전의 고색창연한 연구 주제와 문제의식, 연구방법론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분야가 한국 고대사이다. 피피티를 제작할 줄 몰라서 학술발표장에서 인쇄물을 읽으면서 발표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은 학문 분야도 한국 고대사이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역사학의 “본령”을 침범하고 변질시키는 위협적인 면도 있겠지만 “본령”이란 것도 절대 불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수학, 과학, 공학을 멀리했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역사 연구자 집단의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어느덧 우리 주변에서도 메타버스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역사학계에서도 디지털 인문학과 빅데이터를 다루기 시작하였다. 이미 가상현실(VR)을 통해 신라 황룡사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실행 중이고, 2020년 5월 국립중앙박물관은 디지털 실감 영상관을 개관하였다. 국립광주박물관도 2020년 신안선 특별전에서 관람객이 14세기로 시간 이동하여 신안선의 선원이 되어보고, 직접 수중발굴에 참여하는 체험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현재 개관 중인 국립공주박물관의 무령왕릉 특별전의 백미는 왕릉의 축조에서 왕 부부의 매장에 이르는 과정을 가상현실로 보여주는 체험관이다.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시스템을 이용한 전시는 아직 미흡한 점이 많고, 가성비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디지털 문화컨텐츠 관련 사업은 앞으로 크게 확대될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양질의 컨텐츠, 그리고 엄격한 고증이다. 황남대총을 만드는 과정을 실감나게 보여주려면 디지털 기술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고분의 축조 공정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황남대총 축조에 뛰어들어 인부나 하급 기술자의 역할을 체험하는 메타버스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5세기 신라 사회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 부분은 고대사 연구자 없이는 불가능하다.

 


2) 한반도를 넘어서서 인류 공동의 가치 추구

한국 고대사 연구자가 비교사적 시각을 심화시키면 그의 연구자로서의 정체성도 변할 수 있다. ‘한국’이라는 수식어와 작별하여 고대사 연구자, 혹은 고대 연구자로 변신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고대사 연구가 한국사 전체 틀 속에서 진행되어야 함은 당연하지만, 한반도와 만주일대에서 청동기문화가 발전할 때 한국이란 실체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만주와 한반도가 중국과 한국이라는 국가 단위로 나뉜 것도 아니었다.

옥저와 동예는 한국사이고 인접한 읍루는 한국사에서 배제하여야 한다는 논리는 현재의 국민국가 단위를 의식하여서 나오는 주장이다. 읍루를 도려내는 과감함은 발해의 종족구성을 설명할 때 곤경에 처하게 된다. 한국사의 한 부분이어야 하는 발해 국가의 인적 구성에서 읍루의 후예로 보이는 말갈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사실은 한국 고대사 연구자를 괴롭힌다. 영원히 풀 수 없을 대조영의 종족적 실체가 발해사 연구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대조영이 순수한주11) 고구려계 주민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대안으로 제기된 것이 “이른 시점부터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고구려화된 말갈인”이란 추정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발해 국가의 묘제와 토기를 고구려계와 말갈계로 이분하여 설명하면서 왕족인 대씨집단은 슬그머니 전형적인 고구려계 묘제와 토기를 사용한 것으로 설명되고, 이러한 현상이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증명하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과연 묘제와 토기의 종류 차이가 이것을 사용한 인물이 고구려계인지 말갈계인지를 명확히 변별해줄 수 있을까?

발해 이전에 고구려 역시 거란족, 말갈족, 돌궐족 등을 품은 다민족국가였다. 부여는 길림시를 중심으로 삼았지만, 외곽으로 갈수록 다른 종족들, 특히 서쪽 방면에서는 선비족과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그 결과 라마동, 노하심, 서차구 고분군의 피장자를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는 것이다.

발해가 멸망한 후에 거란의 포로가 된 주민의 수는 수십 만에 달한다. 이들은 요의 동경(현재의 요령성 요양)을 비롯한 거점에 집단적으로 사민되어 요의 국민이 되었고, 훗날 일부는 다시 여진(금)에 편입되었다. 이때의 발해 유민을 고구려계, 말갈계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고려 현종대에 벌어진 거란과의 전쟁은 소배압과 소손녕, 강감찬과 귀주대첩 정도의 이미지를 떠올릴 뿐, 적국인 거란(요) 주민 가운데에 발해계가 포함되어 있었음은 의식되지 않는다.

 

그림 5. 투바공화국 칭게테이 쿠르간 한국-러시아 합동 조사단(오세윤 작가 촬영)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과거에 존재하였던 수많은 정치체를 한국사와 관련된 부류, 관련되지 않은 부류로 양분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고구려, 발해는 결과적으로 한국사의 일부가 되었지만 그 국가가 존재할 때부터 그런 운명이 주어졌던 것은 아니다. 읍루, 오환, 선비, 돌궐, 거란, 여진의 역사를 도려내면 거대한 사각지대가 만들어진다. 이들을 배제하고 진행되는 고구려와 발해 연구가 온전할 리 없다.

한가지 방안이 있다. 고대사 연구에서만큼이라도 ‘한국’이라는 수식어에 구애받지 않고 유라시아 동부에서 명멸한 정치체에 대한 종합적이고 자유로운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학계와 시민 대중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현재의 민족, 국가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고대를 바라볼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의 확인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양보해도 시베리아 남부에서 발전한 스키타이 문화(그림 5)를 한국인 연구자가 연구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천산산맥의 세미레치에 지역에 분포하는 사카, 우순, 훈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금기시될 이유도 없다. 몽골의 흉노 유적을 조사하는 것도 더욱 권장되어야 한다. 이런 연구가 축적되어야 고조선 연구가 새로운 궤도에 올라설 수 있다. 돌궐과 거란 연구가 고구려, 발해 연구에 커다란 도움을 줄 것이고, 임읍과 부남에 대한 연구가 백제와 가야 연구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 줄 것이다. 동남아시아 고대에 대한 연구는 비교사적 시각의 제공으로 그치지 않고 바다를 통한 해상 실크로드가 중국 동해안에서 멈추지 않고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이어졌음을 증명해 줄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한국 고대사 연구자’가 ‘고대사 연구자’로 변신하여 고고학자, 미술사학자, 자연과학자들과 함께 북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동남아시아를 누비고, 디지털 헤리티지 전문가들과 함께 캄보디아의 앙코르 톰의 문화유산을 활용한 메타버스 제작에 참여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미주>

주1) 이 글의 앞부분에서 굳이 “한국 고대사”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하는 이유는 뒤에서 밝힐 것이다.
주2) 한국고고학연구회(주관), 1985, 『역사학과 고고학』, 제28회 전국역사학대회 발표요지
주3) 박성현, 2021, 「한국역사학계의 회고와 전망, 고대. 고대사학에서 고대학으로」, 『역사학보』 251, 역사학회
주4) 박성현, 2021, 앞의 논문, 48쪽
주5) 이 인골이 무왕의 것으로 판명되는 상세한 과정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이 참조된다. 이성준 외 5명, 2018, 「익산 쌍릉과 출토 인골의 성격에 대한 연구」, 『한국고고학보』 109, 한국고고학회
주6) 이러한 판단은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종합토론 과정에서 좌장을 맡은 노중국 교수는 이 2개의 주제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주7) 김대욱 외 3명, 2020, 『고인골, 고대압독사람들(압독국 문화유산 연구‧활용 프로젝트)』, 영남대학교박물관 ; 박순영 편저, 2020, 『뼈로 읽은 과거 사회 –옛사람 뼈를 이용한 과거 생활상 복원 방법』,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주8) 심광주, 2010, 「한성백제의 증토축성에 대한 연구」, 『향토서울』 76, 서울역사편찬원
주9) 권오영, 2014, 「한국고대사 연구를 위한 베트남 자료의 활용」, 『한국고대사 연구의 시각과 방법』, 사계절
주10) 한국사 연구자가 동서양사 연구자와 함께 비교사적 연구를 진행하여야 함은 이미 지적되었다. 여호규, 2021, 「한국역사학계의 회고와 전망, 총설. 한국사 연구의 신경향과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제언」, 『역사학보』 251, 역사학회, 24~25쪽
주11) ‘순수한’이란 표현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 국가의 내부 종족 구성도 단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압록강 중류역 출신의 핵심적인 집단은 오히려 숫적으로 소수이고, 부여고지, 요동일대, 두만강 및 동해안, 한반도 중부지역 출신을 합한 수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여기에 거란, 말갈, 돌궐, 소그드계 고구려인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