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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 참관기] 뒤늦은 한국역사연구회 저작비평회 참관기, 그리고 이참에 돌아보는 2021년 저작비평회_정대훈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1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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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3월(통권 27호)

[학술회의 참관기] 

 

뒤늦은 한국역사연구회 저작비평회 참관기, 그리고 이참에 돌아보는 2021년 저작비평회

 

- 김선호, 『조선인민군: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 한양대학교 출판부, 2020. -


 

정대훈(현대사분과)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공설운동장에 약 7만 명의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사람들은 사뭇 기대감에 들뜬 모습이었다.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던 김일성 장군이 이날 드디어 군중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보천보 전투 소식이 전해진 8년 전부터 평양시민들 사이에서 김일성 장군은 유명인사였다.

보천보 전투 소식이 전해진 것은 1937년의 일이다.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다 목 터져라 만세를 불렀던 만세운동도 벌써 십 수 년 전의 일이었다. 만세운동의 기억이야 여전히 생생했지만 보통의 식민지 사람들에게 저항이란 꿈도 못 꿀 일이 된지 오래였다. 그러던 와중에 그 험한 만주 땅에서 김일성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신출귀몰한 전술로 일본군에 맞섰다는 이야기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사람들에게 큰 희망이었다.

그런 김일성 장군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니 사람들의 기대감은 하늘을 찔렀다. 이름만 듣던 김일성 장군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누구는 허연 수염을 배꼽까지 기른 노장군이 등장하리라 생각했고 또 다른 누구는 장대한 기골을 가진 천하장사가 나타나리라 믿었다.


말로만 듣던 김일성 장군이 드디어 내 눈앞에!!!
 

그런데 막상 김일성이 연단에 올라서자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확인한 김일성의 모습이 사람들의 기대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기품 넘치는 노장군도 아니었고, 장대한 기골의 호걸도 아니었다. 연단에 올라서 연설을 시작한 김일성은 이제 갓 서른이나 되었을까 싶은 젊은이였다.

뭐야... 김일성 장군이라매...


웅성거림은 곧 실망으로 번졌다. 심지어는 저 사람이 진짜 김일성 장군이 아닐 거라는 이야기(‘김일성 가짜설’)까지 돌기 시작했다. 소련군을 등에 업고 화려하게 정치지도자로 등장하겠다던 김일성의 계획은 첫날부터 어그러졌다. 아니, 어그러진 정도가 아니었다. 김일성은 화려한 정치지도자는커녕 자기 존재조차 의심받는 지경이었다.

 
그리고 20여 년이 흐른 후.
 

북한 내에서 김일성은 확고한 리더십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유일체제’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김일성 1인에게 권능이 집중된 체제였다. 그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존재조차 의심받던 새파란 젊은이가 ‘유일체제’의 권력자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20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북한 유일체제 형성 과정은 북한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의문 중 하나다. 그래서 그간 많은 연구자들이 그에 대해 각자의 답변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에 관해 역사학자 김선호가 700쪽이 넘는 대작, 『조선인민군: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을 통해 또 하나의 흥미로운 견해를 제출했다. 그 내용을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하지만 이 방대한 대작에 담긴 의미가 겨우 이런 짤 하나에 다 담길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부당한 짓이다. 이 책에는 이런 단순무식한 요약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풍성한 지식과 통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북한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라고 추천사를 쓰고 나면 내 역할은 끝일까.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라고 한참 ‘썰’을 푼 후 나는 문득 마음이 무거워졌다. 겨우 이런 정도의 추천사가 독자로 하여금 이 책을 집어들게 할 정도의 강력한 유혹이 될 수 있을지, 그리고 내 추천사가 과연 이 방대한 저작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고민은 독자들도 똑같이 하는 고민이다. 추천을 받아서 책을 읽기는 했지만 내가 과연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혹시라도 저자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내가 놓친 것은 아닌지, 이런 궁금증은 또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는 것인지, 책을 덮고 난 독자의 마음 역시 무겁기는 마찬가지다. 분명히 독서는 ‘저자와 독자의 대화’라고 배웠는데, 독자는 대체 누구랑 대화를 하란 말이냐.


대화가 필요해.


나는 한국역사연구회가 2021년에 진행했던 저작비평회가 그런 점에서 무척 가치 있는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저자에게는 애정을 가지고 자기 책을 읽어주는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되었고, 독자에게는 저자의 메시지를 직접 듣고 그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오간 내용들이 생산적이었던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온라인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장점으로 살려 SNS를 통해 인접 분야 전공자와 비연구자 독자의 참여까지 유도할 수 있었다.

나날이 위축되어 가는 독서시장의 크기를 감안하면, 저자와 독자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는 이런 기회는 더 많아져야 마땅하다.


진짜 잘 했다니깐요.
 

다시 본론인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우리가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혹은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이 책의 통찰은 무엇일까. 우리가 이 책을 북한 유일체제의 기원과 형성과정이라는 관점에서만 읽는다면 이 책은 아마도 북한유일체제의 불가피성 혹은 유일체제의 역사적 인과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 책을 현재의 권력관계를 정당화하는 텍스트로 읽을 수도 있다. 지금의 권력관계가 만들어지는 역사적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일견 그것의 역사적 필연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작비평회에서 저자는 이 책에서 정말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다양성’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야 북한체제가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 중심의 유일체제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기실 북한의 초기 역사는 다양한 가능성이 경합하는 장이었다는 것이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저자의 진짜 의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 과정에서 끝내는 역사의 뒤편으로 흩어져버린 ‘가능성들’을 다시 잡아내어 우리 앞에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는 저자가 말하는 ‘가능성들’이 아마도 지금의 권력관계와는 다른 관계를 가능케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역사학이란 현재의 권력관계가 만들어진 과정을 통해 시간적인 인과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현실순응적 학문이 아니라, 시간 속에 흩어져 사라진 ‘가능성들’을 발굴해내고 그로부터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현실전복적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것이 한국역사연구회가 내걸고 있는 ‘과학적·실천적 역사학’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그리고 또한 그것이 우리가 더 많은 독자를 찾아 나서야 하는 까닭이지 않을까.
 

북한의 당·정권기관·군대의 창설을 주도한 주체는 노동당과 김일성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해방 이후에는 북한의 정치공간에 다당성(多黨性)과 다양성이 있었고, 그것이 노동당이나 김일성으로 획일화되지 않았다. (...) 북한에서 정치적 다양성과 통일전선의 특징이 축소되고 여러 정치세력의 집단지도체제가 김일성의 유일지도체제로 변화한 시점은 한국전쟁 종전 이후였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 북한체제의 상황과 변화는 현대 북한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중요하며, 그런 점에서 향후 북한사 연구의 핵심적인 연구과제다.

 

사실 현대 북한은 3대에 걸쳐 확립되고 변화한 유일체제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 유일체제가 확립되지 않은 시기를 연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현대 북한이 계층적·계급적으로 위계화되고 경직된 체제라면, 한국전쟁 이전 북한은 계층적·계급적으로 열려 있고 상대적으로 유연한 체제였다. (...) 북한사 연구의 핵심 중 하나는 다양하고 유연한 체제가 위계적이고 경직된 체제로 변화한 이유와 시점이다. 반대로 말하면 현대 북한의 위계화되고 경직된 체제가 미래에 다양하고 유연한 체제로 변화할 수 있는 열쇠도 여기에 있다. (6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