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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⑥] 대경성생활기_염복규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23,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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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3월(통권 27호)

[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 

 

대경성생활기

 

<大京城生活記>, <<조선일보>>, 1924.11.5.~11.27.

 

염복규(서울시립대학교)

 

* 지난 연재 보기


 

1.

1924년 11월 <<조선일보>>에는 18회에 걸쳐 <대경성생활기>라는 연재물이 게재되었다. 이 연재물은 경성의 변화하는 경관을 ‘인상비평’하거나 관변의 입장에서 경성의 발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경성 주민(조선인)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식민지권력의 도시 정책을 비판적으로 논구한 거의 최초의 연재물이라는 점에서 일단 의의가 있다. 그러면 연재물의 각회차가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먼저 정리해두자. 이 연재물은 제목만 보면 거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결론인 18회를 제외하면 모두 통계를 제시하고 그에 대한 해석을 하는 방식이다. 다루고 있는 항목은 기본적인 경성의 인구와 직업 구성(1~4회), 의식주 소비(5~7회), 결혼․출생․사망(8, 9회), 교통(10회), 도서관 이용(11회), 사회사업(12~14회), 청소와 위생(15회), 묘지와 화장(16회), 경찰(17회) 등이다. 통계의 출처를 별도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대개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서 많이 가져왔을 것이며, 기타 <<경성상업회의소월보>> 등 관변에서 생산한 통계라고 짐작된다. 18회의 말미를 보면 “이 대경성생활기에 인용한 통계숫자는 그 대개가 관청측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근대 체제가 성립한 이래 숫자를 이용한 통계는 세계의 많은 현상을 축정하고 이해하는 유효한 도구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권력은 통계를 생산하고 제시함으로써 ‘발전’을 증명하고 자기 정당성을 주장했다. 식민지권력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일제는 병합 초기부터 정기적으로 여러 통계를 생산, 공포했다. 이를 통해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했음은 물론이다. 이를테면 병합후 총독부가 주관한 최초의 대박람회인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출품의 상당한 부분은 통계표와 그래프이다. 이는 실물이 부족한 1910년대의 빈약한 물산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조선통치 5년의 ‘업적’을 ‘실증적’으로 과시하려는 총독부의 목적이 강하게 투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림 1. 조선물산공진회에 출품된 총독부의 ‘교육 도표’ (朝鮮總督府, <<朝鮮物産共進會報告書>>, 1916.) 다양한 형식의 표, 그래프, 지도 등이 보인다.
 

그런데 식민지권력의 통계 생산과 공포는 하나의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었다. 통계는 통치의 목적에 기여하려면 최대한 정확해야 한다. 객관성과 과학성이 확보되어야 권위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식민지권력의 통계에는 조선인의 삶의 다양한 측면이 담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통계는 식민지권력의 도구에서 그것을 비판하는 무기로 전화될 수도 있었다. 권력은 통계의 생산을 독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의 해석을 독점할 수는 없었다.

 

2.

그러면 이 연재물은 식민지권력이 생산한 통계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리하여 그로부터 1920년대 중반 식민지수도 경성의 생활상을 어떻게 그렸을까? 몇 가지만 살펴보자.
 

이렇게 그들이 서울을 야금야금 차지하여 들어와 벌써 삼분의일(조선인의 1/3이라는 의미)이 훨씬 넘게 되었으니 멀지 아니하여 서울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그 친구들일 것이며 우리는 보따리 싸질머지고 서백리아나 만주 벌판으로 쫓겨날 밖에 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니 실로 우리의 생존상 중대한 문제이다. (1회)


1회는 인구 총수이다. 1924년 기사이므로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게재된 1923년말 현재 통계를 이용하고 있다. 해석의 요지는 경성의 일본인 인구가 급증하고 조선인은 급감한다는 것이다. “서백리아나 만주 벌판으로 쫓겨”난다는 대목은 1910년대부터 시작된 조선인의 간도, 연해주 이주의 실상을 표현한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할 만큼 민족별 인구 증감이 있었던 것일까?

1923년 경성 총인구수는 약 28만여명으로 조선인 207,496명, 일본인 76,188명이다. 기타 외국인을 제외하면 민족별 인구 비율은 73.1 대 26.9이다. 그런데 경성부 행정구역이 확정된 1914년의 경우 조선인 대 일본인 인구는 187,176명, 59,075명으로 76 대 24이다. 이렇게 보면 일본인 인구 비율이 10여년간 급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구 증가 추세를 보면 좀 다른데 1914~23년 조선인은 10.9% 증가한 반면 일본인은 29.0% 증가했다. 증가 추세에서는 일본인 우위가 확연함을 알 수 있다. 이런 추세는 조선인의 이른바 ‘이촌향도’가 증가하면서 다소 완화되지만 기본적으로 지속되었다. 일례로 1931년의 경우 경성의 조선인 대 일본인 인구는 261,232명, 100,323명으로 1923~31년 조선인은 25.9%, 일본인은 31.7% 증가했다. 이런 추세가 근본적으로 역전되는 것은 1936년 행정구역을 외곽으로 크게 확장하면서부터이다. 이 때부터 경성의 일본인 인구 비율은 20% 미만으로 내려가 8.15때까지 유지되었다. 일본인 = 도심부 장악, 조선인 = 외곽화라는 기본적인 구도가 지속되었던 셈이다.
 

놀고 먹는 패들은 일본 사람이 2,067인과 외국 사람 130인을 제한 나머지 1만3,637인이 게으르기로 유명한 우리 조선 양반들이다. 물론 우리의 처지와 환경이 직업을 얻기에 매우 곤란한 처지에 있는 것도 사실이나 그러나 우리 조선 사람의 독특한 ‘게으름’도 큰 원인일 것이다. 우리도 잘살아 보자면 일 잘하는 중국 사람을 배워야 우리집 살림이 풍성풍성하여질 것이다. “일하지 아니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하는 말은 “일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어라” 하는 말이다. 조선 사람아! 그대는 죽음(死)과 노동 둘 중에서 하나만 택하라. 경성과 같이 생활이 빡빡한 곳에서 1만3천여명이 놀고 먹는다!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랴. (2회)

 

도시에서 노동하는 노동자 중에서 가장 고상하고 하이칼라 잘하는 문화적 직업이 하나 있으니 그는 다른 직업이 아니라 자동차 운전수이다. 그들은 돈 많고 세력 많은 양반들을 태워가지고 아침 저녁으로 뿡뿡거리며 먼지 이는 장안대로를 풍우 같이 몰고 다닌다. 얼른 보면 매우 힘 안드는 직업 같으나 그들의 말을 들으면 실상은 매우 괴로운 직업이라는데 이 자동차 운전수가 경성 시내에 381명이 있다 한다. 그 중에 151명이 일본인 운전수요 나머지 230명이 조선인 운전수이라는데 (4회)


2회에서는 직업별 인구 구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일제시기 인구 통계에서 어느 시기나 보이는 바이지만 조선인의 ‘무업자’ 비율이 대단히 높다. 그런데 이에 대한 시선은 ‘게으름’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다. 이 점에서 기사의 필자는 이분법적으로 말하자면 식민지권력과 시선을 같이 하고 있는 셈이다. 또 “중국 사람을 배워야” 한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일제시기 언론에서 중국인에 대한 시선은 늘 인종적 편견에 입각한 비아냥과 더불어 그들이 우리의 부를 빼앗아가고 있다는 경계심이다. 이중적 시선이 여기에서도 여실하다.

한편 특기할 직업군, 이른바 “고상하고 하이칼라 잘하는 문화적 직업”의 사례로 운전수를 들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일제시기 자동차나 운전수 등의 통계는 크게 부실한 편이다. 정확성 여부를 떠나 1923년 현재 경성의 운전수가 381명이라는 진술 자체도 소중한 정보라고 하겠다.
 

대경성의 큰살림으로 부스러지는 돈을 알아보니 그 돈이 또한 적지 아니하다. 시내 네군데 공설시장에서 1년 동안 일용품을 팔은 금액을 보니 명치정공설시장 282,667원, 花園町공설시장 302,806원, 용산공설시장 127,468원, 종로공설시장 62,893원 이라 한다. 종로공설시장의 판 돈이 제일 적고 화원정공설시장의 판 돈이 제일 많은 것은 화원정 근처에 사는 나막신 친구들의 생활이 넉넉함과 종로 일대 조선 사람들의 생활이 그만 못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7회)


의식주의 소비 통계를 다룬 5~7회의 말미에는 당시 경성의 공설시장 현황이 등장한다. 1919년 총독부는 도시 지역의 물가 안정과 원활한 소비재 공급 등을 목적으로 공설시장 제도를 실시했다. 경성의 경우 그 해에 종로와 명치정(명동) 공설시장, 이듬해에 京町(용산구 문배동)과 花園町(중구 예관동) 공설시장을 개설했다. 그런데 용산 주민을 위한 경정 공설시장은 위치가 좋지 않다고 하여 1922년 남영동 쪽으로 이축, 용산 공설시장으로 다시 문을 열였다. 위에서 보듯이 공설시장의 판매액은 화원정과 명치정이 가장 많으며, 그 다음이 용산, 그리고 종로는 다른 곳에 비해 현저히 낮다. 이 기사는 이 점을 일본인과 조선인의 생활상 격차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다소 상투적이지만 당연히 일리가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활해볼 여지도 있다.

공설시장의 수요는 생활상의 격차와 다소 별개로 원천적으로 일본인에게 있었다. 조선인은 이미 이용하는 기존 시장이 있었으며, 공설시장에서 주로 유통되는 물산 자체가 일본인의 기호에 맞는 식료품 등이었기 때문이다. 위치상 명치정과 화원정은 경성 일본인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본정통을 끼고 있다. 그리고 용산공설시장은 제2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신용산의 三坂通(후암동)과 연결된다. 따라서 종로공설시장의 판매액이 낮은 것을 반드시 생활상의 격차와 연결하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조선인은 공설시장이 아니라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 등을 훨씬 더 많이 이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판매액의 부진 때문인지 종로공설시장은 수년 뒤 폐지되었다.

현재 한강대로변 4호선 숙대입구역 이면에는 남영아케이드라는 낡은 건물이 있다. 바로 1922년 이축한 용산공설시장이다. 이제 백년이 된 이 건물은 우연히 살아남아서 용산 일대 식민의 역사를 증언해준다. 아케이드라는 명칭처럼 긴 통로를 따라 양쪽으로 상점이 들어선 형태이다. 200평 이상의 규모로 8.15 이후에도 한 때 수십개의 점포가 성업했다고 하나, 현재는 쇠락하여 재생과 철거의 기로에 서있는 상태이다.


그림 2. 용산공설시장의 현재 모습(2020.9. 답사)
 
 

근대문명과 교통기관과는 실로 떨어지지 못할 관계가 있는 것이니 교통기관이 잘 발달된 나라가 곧 문명한 나라요 문명한 나라일수록 교통기관이 잘 발달되는 법이라. 작년에 아라사 한모퉁이에서 일어난 새로운 사상이 금년이면 아세아에 널리 퍼지게 되며 아침에 독일서 발명한 기계가 저녁이면 아메리카에 설치케 되는 것은 모두 신□한 교통기관의 덕택이다. 일본의 명치유신 이후 50년간의 급속한 문명이 실로 구라파와의 신속한 교통으로 말미암은 것이오. 남북 양극 지방의 문화 정도가 낮은 것은 그 지방과 외계와의 접촉, 즉 교통이 업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교통 즉 문명이오 문명 즉 교통이라 해도 과한 말은 아닐 것이다. (중략) 이 15,815대의 교통기관을 조선사람의 것과 일본사람의 것을 구별하여본 즉 조선사람의 것이 5,918대요 일본사람의 것이 8,360대이오 그 나머지가 외국인의 것과 법인의 것이다. 모든 방면으로 패자의 위치에 있는 조선사람이 일본사람보다 교통기관을 적게 소유한 것은 오히려 당연 이상의 당연이거니와 (중략) 여기에 한마디 논자의 주의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은 교통기관과 우리 민중과의 관계이다. 적어도 현재의 제도에 있어서는 교통기관이 많은 것이 반드시 민중의 행복이 아니다. 교통기관의 이용에서 제외를 당한 도회의 민중은 힘없고 피곤한 다리를 끌고 걸어가면서 특수한 일부 권력있는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뿜고 달아나는 ‘가스린’의 내음새가 오직 그들의 코속으로 들어갈 뿐이오 (중략) 아! 특수계급에게 빼앗긴 교통기관을 민중에게로 돌릴 날이 언제인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을 위하여 있는 교통기관을 우리에게로 찾아올 날이여 이 날이 언제나 돌아오려나. (10회)


10회의 주제는 교통이다. 이 연재물의 기본적 태도, 식민지권력과 ‘가진 자’에 대한 비판과 조선인 (민중) 독자의 계몽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기사이다. 이 점은 대체로 경성 시내에서 운행하는 자동차 대수가 200여대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1920년대의 현실에서 “자동차의 뿜고 달아나는 ‘가스린’의 내음새가 오직 그들의 코속으로 들어갈 뿐”이라는 명백한 과장법의 표현에서도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한편 주된 내용과는 관계없이 새로운 사상 하면 “아라사”, 새로운 기술 하면 “독일”을 지목하는 것이 인상적이면서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경성 안에는 도서관이 세개가 있다. 만철 경성철도국에서 경영하는 만철경성도서관이오 또 하나는 방금 폐관 중에 있는 이범승씨 경영의 경성도서관이오 나머지 하나는 경성부청에서 경영하는 경성부립도서관이다. 대경성 안에 겨우 이 세곳의 도서관이 있었는데 그나마 유일한 조선 사람의 경영이던 경성도서관은 유지 곤란한 지경에 빠져 한달 반 전에 폐관하여 버리고 말았더니 근일 소문에 도리어 한심한 소문이 들리게까지 되었는데 어떻게 낙착이 될런지 알 수 없다. 조선인의 서울에 조선인의 손으로 도서관 하나 경영 못한다는 것은 적어도 민족의 수치이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11회)


11회는 “문명과 인연이 깊은 도서관 이야기”이다. 이 중 눈에 띄는 것은 이범승이 운영하다가 유지가 곤란해졌다는 경성도서관이다. 경성도서관은 원래 1920년 11월 북촌의 가회동, 삼청동 일대 취운정이라는 곳에서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윤익선(1871~1946) 등이 설립했다. 위 기사에 나오는 만철경성도서관(1920.7.)에 이어 경성에서 두번째로 설립된 도서관이었으며, 최초의 사립도서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도서관은 재정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폐관하고 말았다.

이를 계승한 것이 이범승(1887~1976)이 설립한 경성도서관(1922.9.)이다. 이범승은 묘한 인물이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나고야의 제8고, 교토제대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관리의 길을 가지 않고 잠시 만철 사원으로 근무하다가 사립도서관을 설립한 것이다. 대학 재학시부터 조선에 도서관을 설립하려고 노력했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1922~26년 사비와 총독부, 경성부의 지원을 받아 3층 석조건물을 신축하는 등 의욕적으로 도서관을 운영했지만 역시 재정난을 견디지 못하고 1926년 도서관을 경성부에 이관했다. 이후 총독부 고등관으로 특채되어 1938년까지 관리 생활을 했으며 8.15 이후에는 미군정에 의해 경성부윤에 임명되기도 했다.

위 기사에서 경성도서관의 “폐관”이라고 한 것은 휴관인 듯 하다.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은 재정난으로 계속 휴관과 재개관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경성부에 이관된 후에는 1922년 개관한 경성부립도서관의 종로분관이 되었다. 오늘날 서울특별시교육청 남산도서관(남산)과 종로도서관(사직동)이 각각 경성부립도서관 본관과 종로분관의 후신이다.


그림 3. 이범승이 신축한 경성도서관 전경과 현재 사직동 종로도서관에 있는 이범승의 흉상
 
 

총독부 제생원 양육부 140명, 경성보육원 35명, 구세군 보육원 홈 45명, 천주교회 영아원 150명, 화광교원 학원부 247명, 鎌倉보육원 지부 53명, 합계 670명 (중략) 겸창보육원 경성지부에서는 고아를 직접 보통학교나 소학교에 입학시키어 공부케 하는 일변 나이가 좀 차게 되면 농업과 가축 기르는 법과 인쇄기술 등을 가르쳐 그러한 일에 종사케 한다 한다. (12회)


12회에는 경성의 고아원 현황이 나온다. 6개 고아원에 670명 수용이라는 데에서 크게 실효성 있는 운영이 아니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총독부 제생원, 경성보육원 등은 관립이며 기타 기독교, 천주교, 일본 불교(화광교원) 계통이 하나씩 있다. 그리고 가마쿠라(鎌倉)보육원 경성지부가 보인다.

‘지부’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가마쿠라보육원은 일본 가나가와현에 본원을 두고 있었으며, 1913년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라는 인물이 삼판통에 경성지부를 설립했다. 소다는 젊은 시절 타이완에서 방황하다가 술에 취해 객사할 뻔 했는데 조선인의 도움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1905년 서울 YMCA 영어 교사로 부임한 후 보육원을 설립하여 8.15 때까지 운영했다. 그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가마쿠라보육원은 월남하여 영락교회를 설립한 한경직 목사가 영락보린원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운영했다. 소다는 1961년 한경직 목사의 초청으로 다시 한국에 와 1년여 영락보린원에 머물다가 사망했다.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그의 유해가 묻혀 있다. 사망 직전 일본인 최초로 서울시 명예시민이 되기도 했다.
 

그림 4. 현재 용산구 후암동의 영락어린이집(가마쿠라보육원 자리)과 소다 가이치의 명예시민증 수여를 보도한 <<경향신문>> 1962.3.29. 기사
 
 

명치43년 8월 29일에 일본이라는 나라와 한국이라는 두 나라는 합방이라는 이름 아래 조선 민족의 조선 통치권이 일본 민족의 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때 사실은 하여간 이 합방이라는 중대 사실문제에 대하여 조선 민족은 큰 불평을 가지고 여러 가지 형식으로 이 불평을 표현시키었다. 이에 일본의 위정자는 이 불평을 표면적으로 없이 하고자 고압적 수단을 써내려왔다. 이리하여 10여년 동안 여러 가지 경험을 가진 조선의 경찰은 금일에 있어서 의연히 경찰만능의 위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중략) 경찰은 항상 조선 사람을 위험시 한다. 이제 그 증거로 여기에 예를 하나 들 것은 경기도 경찰부에서 민간에 허용한 총기 통계이다. 이제 민유 총기에 허가한 것을 보건대 군용총 조선인 5, 일본인 1,673, 권총 68, 1,300, 엽총 792, 4,792, 기타 총 1, 128 이다. 이 놀라울만한 숫자의 차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17회)


본론의 마지막회인 17회는 경찰의 현황이다. 상당히 직설적으로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 과정과 “경찰만능” 통치를 비판하고 있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3.1운동을 전후한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의 변화는 대대적인 경찰의 증원을 결과했다. 어떤 점에서 “경찰만능” 통치는 오히려 1920년대에 와서 더 강력해진 측면이 있었다. 또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차이를 보이는 민유 총기 허가 건수는 말 그대로 통계가 보여주는 차별의 실상이라고 할 만 하다.

이 기사에서는 경기도 경찰부 직할 339명, 산하 6 경찰서, 각각 창덕궁서 56명, 본정서 247명, 종로서 271명, 동대문서 144명, 서대문서 114명, 용산서 145명 등 경성의 경찰 병력 현황을 제시한다. 본정경찰서와 종로경찰서가 경성 경찰력의 핵심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종로경찰서는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에도 곧잘 등장하는 이른바 독립운동 탄압의 본거지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리고 본정경찰서는 두말할 필요 없이 일본인 중심지의 치안을 전담하는 곳이다. 종로경찰서는 현재 종각 네거리 SC제일은행 자리에 있었으며, 본정경찰서는 현재 서울 중부경찰서 자리이다. 종로경찰서 자리는 하필 조선시대 의금부 터이기도 하다.


그림 5. 1920년대 종로경찰서와 본정경찰서 전경

 

3.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예와 지금이 다르며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격변 또 격변하여 간다. 이 격변하여 간다는 말은 500년 옛 도읍터 빈 궁궐에 가을풀이 우거짐을 슬퍼하는 말이 아니요, 도포 입고 장죽 물고 과거 보고 벼슬하던 옛시절이 그리워 하는 말이 아니라 여러가지 방면에서 여러가지 의미로 변하고 또 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든 변화 속에는 우리의 슬퍼할 변화도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구태어 옛날 시절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옛날 시절은 옛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장차 올 새로운 서울, 새로운 조선의 새로운 도회 新京城만은 살아있는 우리가 생각할 바이다. (중략) 누가 서울을 ‘눈물의 서울’이라 하느냐. 누가 서울을 ‘쓸쓸한 망국의 도읍터’라 하느냐. 아니다. 서울은 움직인다. 괴로워할지언정 살려고 움직인다. ‘서울’이라는 땅에서 사는 이 식구들은 사나이, 아낙네, 어른, 아이 할것 없이 모두가 잘살아 보려고 힘쓰고 노력한다. (18회)


17회에 걸쳐 이 연재물이 보여주는 경성 (조선인)의 실상은 당연히 긍정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앞에서 썼듯이 식민지권력이 생산한 통계는 이런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인 18회의 논조는 의외로 희망적이다. 의례적인 결론일 수도 있겠으나, 분명 과거와의 단절, 새로운 의지의 북돋음을 표나게 내세우는 태도가 보인다. 한, 둘의 사례로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되겠지만 이보다 2년 후 <<동아일보>>의 <옥상에서 본 경성의 팔방> 같은 연재물이 보여주는 ‘복고적’ 어조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대경성생활기>를 연재한 1924년 11월은 <<조선일보>>의 역사에서 한 전환점이었다. 원래 친일 경제인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가 창간한 <<조선일보>>는 처음부터 운영의 난맥상을 겪으며 논조도 좌충우돌했다. 그러던 중 1924년 9월 <<동아일보>> ‘개혁운동’에 실패한 경영진과 기자들이 판권을 인수하고 대거 넘어오면서 이른바 ‘혁신 조선일보’로 거듭나 수년 후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기관지’격으로 나아갔다. 그로부터 1930년대 다시 방응모가 인수하여 개인 기업화 하기 전까지는 실로 <<조선일보>>의 가장 빛나던 한 시절이라고 할 만 하다. 조선에서는 거의 최초로 식민지권력의 통계를 해부하고, 그를 통해 조선인 경성의 실상을 파헤치고자 시도한 이 연재물은 그 첫머리에 위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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