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나의 학위논문: 조선은 어떤 나라였는가 - 양안의 재해석을 통해 본 조선후기 전세 정책의 특징_김소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14,237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웹진 '역사랑' 2022년 4월(통권 28호)

[나의 학위논문] 

 

양안의 재해석을 통해 본 조선후기 전세 정책의 특징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1.02.)


 

김소라(중세2분과)


 

연구배경

누구는 조선이 저력 있는 국가였다고 했다.
누구는 조선의 삼정(三政)이 문란해 망했다고 했다.
누구는 19세기 조선의 상업 발달을, 누구는 19세기 조선의 위기를 논했다.


조선시대사 연구는 여타 시대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풍부한 사료가 남아 있는 덕분에 연구 성과 역시 두텁게 축적되어 왔다. 2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조선 사회에 대한 탐구는 연구목적과 방향에 따라 다양한 결론을 도출해 냈다. 그런데 대다수 연구는 종내에 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한 긍정 혹은 부정으로 수렴되어가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경제사 분야는 ‘자본주의 맹아론’과 ‘19세기 위기론’으로 연구가 크게 양분되었다.

20세기의 선학들이 이러한 해석을 제시하고 입장을 정리한데는 당대의 시대적 배경과 요청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022년 현재를 살아가는 필자가 선학들의 시대정신을 오롯이 공감해내기란 쉽지 않았다. 조선시대사를 전공하고 있으니 연구대상으로서 조선이라는 국가에 애정을 품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엄연히 외부자인 오늘의 내가 과연 조선 사회가 ‘성공’ 또는 ‘실패’했다고 규정할 능력과 자격이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일국의 흥망성쇠를 논하는 다소 결과론적인 분석 대신, 수백 년에 걸쳐 구축된 조선 사회의 구조를 조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양전(量田)을 연구하게 된 것은 경제사 분야의 기존 쟁점에서 벗어난 새로운, 동시에 본질적인 조선 사회 관찰에 가장 적격인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림1. 1720년 경자양안
 

디지털인문학

조선의 주요 세원(稅源)은 토지와 인구였다. 그러나 3년마다 호적을 작성해 활용한 것과 달리 토지 장부인 양안(量案)은 법전에 ‘20년마다 양전할 것’이라 명시되어 있었음에도 거의 생산되지 않았다. 100년, 200년 전에 만든 양안의 기록이 전결세(田結稅) 산출 기준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기왕의 양전 연구는 각 시기의 양안을 개별적으로 분석하여 통계치를 단순 비교하는 방식으로 사회 변화상을 추론하곤 했다. 세기를 넘어서는 자료를 시계열적으로, 더구나 장부별이 아닌 필지(筆地)별로 기록을 비교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무모하고 발칙한 생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조선의 전정(田政)이 어떻게 수십 년 전의 장부를 토대로 운영될 수 있었는지, 그러다가도 불쑥 대대적인 개량(改量) 작업을 단행하게 된 시기의 동인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지 않고서는 ‘삼정의 문란’을 논할 수 없다. 이에 10여 년 전, 필자를 포함한 국사학-컴퓨터공학 공동연구팀은 토지 장부들을 필지별로 대조하는 것을 돕는 소프트웨어 JigsawMap을 개발하게 되었다.


그림 2. JigsawMap 화면
 

학위논문은 JigsawMap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1720년의 경자양안, 19세기 읍양안, 대한제국기의 광무양안, 식민지기 토지대장 등 장기간에 걸쳐 작성된 토지세 관련 장부들을 시계열적으로 분석하였다. 연구대상지역을 선정한 뒤, 구역 내 필지 하나하나와 관련된 기록들을 레이어로 층층이 쌓아나갔다. 지적도나 그 흔한 약도 한 장 부기되지 않은 조선의 토지 장부들로부터 오로지 텍스트 정보만을 활용해 특정 필지의 위치를 찾아내야 했다. JigsawMap을 통해 텍스트 정보의 시각화가 가능해졌고, 같은 땅에 대해 시기별로 어떻게 조사 내용이 달라졌으며 수취 강도가 변해갔는지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균(均)

조선시대 부세제도의 성격을 논할 때 균부(均賦), 균세(均稅)라는 표현이 자주 활용되곤 한다. 그렇기에 ‘조선후기 전세 정책의 특징’이라는 제목을 내건 본 논문의 결론에서도 ‘균부균세’가 강조되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존의 해석과 별다른 것 없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그러나 선행연구에서 ‘균부균세’가 다소 선언적, 규정적 수식어로 활용되어 온 것과 달리 본고에서는 조선이 500여 년 동안 부세제 운영에서 ‘균’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시기별로 어떠한 방안을 강구해 왔으며 그것이 어떻게 변주되어 갔는지 구체적으로 추적하였다. 그 결과 세종대 공법(貢法)부터 대한제국기 광무양전까지의 전세 제도를 ‘균부균세’라는 키워드로 설명하는 동시에, 각각이 지향했던 ‘균평(均平)’한 사회의 모습이 어떻게 달랐는지 포착해 낼 수 있었다.

조선의 전결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부수(結負數) 산정 방식이다. 그간의 연구들은 결부수가 특정 필지의 면적과 등급을 파악해 기계적으로 산출해 낸 값이라 전제하고 통계에 활용해 왔다. 그러나 분석 결과는 이러한 전제가 안일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일차적으로 결부수는 공식에 의해 산출되었으나, 해당 필지를 경작하는 이의 직역(職役)이나 마을 내 부세 부담의 조율 방식 등에 따라 그 수치가 인위적으로 가감되는 일이 빈번하였다. 더욱이 애초에 결부를 산정할 때 활용되는 면적과 등급 정보 역시 이미 해당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충분히 조정된 값이었다. 경기, 충청, 경상 세 도를 비교해보면 경기<경상<충청 순으로 결부 부담이 높아지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도별로 다르게 부과되는 부역(賦役), 공물(貢物) 등을 감안하며 전결세(田結稅) 기준액을 가감하는, 총량제적 관점에서의 조정이 가해진 까닭이었다. 조선의 ‘균’은 전국 만백성이 동일한 기준에 의해 산정된 세액을 납부하게 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국가에 내는 각종 부담의 총량을 엇비슷하게 맞춰주기 위해 상이한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달성되었다.

조금 더 깊게 살펴보면 어떻게 ‘다양한 기준의 기준’을 세울 것인가에 대한 시대별 해결책이 달라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일단 토지 등급을 실상에 맞게 매겨둔 다음 면적 파악률을 적당히 조정하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반면 양란 이후 등급의 중요도는 점차 희미해져서 대지(垈地)는 1등급, 논은 2~4등급, 밭은 4~6등급을 받는 식으로 지목(地目)에 따라 다소 무심하게 등급이 매겨졌다. 동시에 조선후기로 갈수록 면적값 조정을 통해 결부수를 조절하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지목별 면적 파악률이 확연한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이다. 여러 장부를 시계열적으로 분석해 보니 논의 면적 파악률은 갈수록 높아지고 밭은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실제 토지 비옥도와 무관하게 논은 상대적으로 높은 등급을, 밭에는 낮은 등급을 매기는 방침과 보조를 맞추며 발생한 결부수 조정 방식이었다.

시기별로 전세 기준액인 결부수를 산정해내는 방법도, 토지제도 자체도 달라졌다. 그럼에도 조선은 수백 년 동안 균부균세를 부세제도의 목표로 삼고 더 나은 실현 방향을 모색해 나갔다. 한편으로는 ‘무엇이 균평한 상태인가’에 대한 대답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 듯하다. 다음의 두 그림을 비교해보자.


그림 3. 경주군 부내면 교리 결부 부담 변화


두 그림은 한 마을 내의 필지에 매겨진 결부 부담이 시기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왼쪽의 19세기 상황을 보면 우선 하얀색 필지들이 다수 분포되어 있는데, 이는 해당 토지들이 공식적인 전세 부담을 전혀 지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위치상 농사를 지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 공간은 많지 않다. 엄밀히 따지자면 ‘은루(隱漏)’된 땅들이었던 셈이다.

반면 광무양전의 결과가 반영된 오른쪽 그림에서는 하얀색 필지, 즉 결부가 매겨지지 않은 필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채색의 밝기를 비교해보면 왼편에 비해 훨씬 이웃 필지 간 명도 차가 적은 편이다. 내 땅과 이웃 땅에 부과되는 결부 부담이 비슷한 수준으로 재조정된 것이다. 이는 대한제국이 생각하는 균부균세란 중앙 정부의 감시망에서 벗어나는 영역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동일 구역 내 전결세 부담을 고르게 하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하여 왼편, 19세기의 조선은 극심한 불평등을 감내해야 했던 부조리의 시대였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다만 조선후기에는 이와 같은 상황이 균평한 것이라 인식했을 따름이다. 인접한 필지 간 결부 산정 수준에 큰 차이가 있었던 사실이나 공적 전세 장부에서 여러 필지가 누락되었던 것은 부정이나 농간의 증거가 아닌, 내부적 협의에 따른 결과였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장부에 누락된 필지를 다수 소유하고 있던 이들은 대체로 장부에 기록한 자신의 다른 필지에서 이웃의 수배에 달하는 결부를 부담하였다. 신역(身役), 공납(貢納) 등 다종다양한 부세 부담을 통합적으로 살펴본다면 왼편이 보여준 알록달록함은 사실상 오른편의 차분한 전결세 부담 분배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양편 모두 합리적이고 균평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라는 사실이다.
 

남은 이야기

논문의 제목은 ‘전세 정책의 특징’이지만, 논문 전반에 걸쳐 다양한 방면의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노력하였다. 조선시대의 방위(方位)‧방향 감각이나 경계(經界)와 경계(境界)의 차이, 들판과 자정(字丁)이라는 비공식적 행정구역의 존재 가능성 등에 대한 소박한 견해들을 담아두었다. 양안에 담긴 숫자의 이면에는 당대를 현재로 살아간 이들의 치열한 셈법이 고스란히 숨어있다. 그들의 구상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기에 앞서, 왜 이러한 생각을 했고 왜 저러한 결정을 했는지 뒤늦게나마 같은 자리를 펴고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