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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포항(浦項) 중성리(中城里) 신라비(新羅碑)> 연구의 쟁점과 논의_이현섭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12,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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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5월(통권 29호)

[나의 논문] 

 

<浦項 中城里 新羅碑> 연구의 쟁점과 논의

 

『사학지』 61, 단국사학회 (2021. 12.)


 

이현섭(고대사분과)


 

들어가며

자료가 한정적인 한국 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금석문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존재이다. 현전하는 문헌 자료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고대의 역사상을 살필 단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이하 중성리비) 역시 우리가 신라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로 손꼽힌다. 이 비석은 2009년 포항시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다양한 시각과 방법론으로 분석되었다.

중성리비에는 흥해지역에서 무엇인가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왕경인과 지방인들이 두루 관련된 분쟁이 발생하였고, 이를 중앙정부가 개입하여 해결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시적인 맥락을 제외하면 ‘비석의 건립연대’, ‘열거된 인물집단의 성격’, ‘동사의 해석’, ‘분쟁의 대상과 구체적인 내용’과 같은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중성리비가 동시대 다른 금석문에 비해 문장의 체계성이 떨어지고, 당대 신라사회를 바라보는 연구자들 간 이해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함과 동시에 중성리비에 대한 합리적 해석을 도출하려면, 우선 기존 연구성과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하에 본 논문은 비문의 해석을 둘러싼 쟁점을 ‘비문의 판독과 건립연대’, ‘동사의 해석’, ‘분쟁의 내용’과 같이 크게 3가지로 분류하여 논지를 전개하였다. 아울러 기존 견해들을 표로 작성하여 시각화하였다. 여기에서는 지면상의 이유로 주요 쟁점들에 대해서만 간단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비문의 건립연대는 언제인가?

중성리비 판독문(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19, 『포항중성리신라비』) 본 논문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판독안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논란이 있는 글자는 음영표기를 하였다.
 

우선 1행의 글자들은 비석의 건립연대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辛巳’라는 간지와 비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干支’를 칭하고 있으므로, 건립연대를 441년(눌지마립간 25) 혹은 501년(지증왕 2년) 둘 중 하나일 것이라는 점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는 모두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441년설은 중성리비의 문장에 문법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인명과 部名 표기가 「포항 냉수리 신라비」(이하 냉수리비)와는 다르다는 점 등을 입론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제시된 근거들이 대체적으로 정황적인 근거에 입각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501년설의 경우 2행에 등장하는 ‘斯德智阿干支’가 냉수리비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일인이라는 점과 비문의 성격 및 구성이 냉수리비와 비슷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나아가 1행 5자를 ‘只’로 판독하고 1행의 인명을 智證王과 연결하기도 한다. 이 역시 ‘斯德智阿干支’가 냉수리비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일하다는 명확한 근거가 없고 1행 5자를 ‘只’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이처럼 양측의 주장에 한계점이 드러나므로, 비석의 건립연대는 고고학 자료 및 당대의 시대상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추가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분쟁의 주체는 누구이고 그 대상은 무엇인가?

비석의 건립연대와 더불어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분쟁의 주체와 대상이다. 이는 사건의 판결 내용을 담고 있는 9행부터 11행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宮’은 분쟁의 주체와 대상을 구분함에 있어 핵심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집’, ‘가문’,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조직 혹은 수조권’ 등으로 이해할 경우, ‘豆智沙干支宮’과 ‘日夫智宮’은 분쟁의 피고로 설정된다. 이때 분쟁의 원고는 ‘牟旦伐(인명)’, ‘牟旦伐喙(부명)’, ‘牟旦伐喙作民沙干支’ 등으로 파악되며, 분쟁의 대상에 대해서는 ‘金鑛’, ‘作民’, ‘토지’, ‘수조권’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宮을 ‘食邑’, ‘토지’, ‘莊舍’ 등 왕족이나 6부인이 소유한 지방의 재산 등으로 파악할 경우 분쟁의 대상을 宮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견해 역시 분쟁의 피고와 원고를 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豆智沙干支’과 ‘日夫智’를 분쟁의 원고로 본다면 피고를 ‘牟旦伐喙(부명)’로 이해하고, ‘牟旦伐喙(부명)’를 원고로 설정한 뒤 피고를 ‘于居伐, 蘇豆古利村, 那音支村, 珍伐의 유력자들’ 혹은 ‘喙(評), 沙喙, 夲彼喙’ 등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 이와 같은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豆智沙干支宮과 日夫智宮이 6세기 금석문의 인명표기 방식처럼 ‘부명-인명-관등-宮’과 같이 표기되지 않은 이유와 ‘宮’의 구체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판단된다.

‘白口’의 의미와 ‘敎’의 범위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10행에서 확인되는 ‘白口’라는 동사는 기존 6세기 금석문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없어 논란이 발생하였다. 지금까지 대략적이나마 합의된 사항은 ‘白口’의 주어가 使人 果西牟利라는 사실과 그 내용이 경고성 문구인 ‘若後世更噵人者与重罪’라는 것이다. ‘白口’는 그 대상의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白을 강조한 해석’, ‘口를 강조한 해석’, ‘白과 口를 구분한 해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白을 강조한 해석’은 使人 果西牟利가 중앙정부에 사건의 사후 처리에 대해 보고하거나 판결 결과를 豆智沙干支宮과 日夫智宮에게 보고한 것으로 이해한 견해이다. ‘口를 강조한 해석’은 현지인에게 비문의 내용을 설명하였다거나 승소자가 지역사회에 경고한 것, 판결 결과를 준수하기 위한 패소자의 맹세, 혹은 결과에 대한 항의 등으로 그 내용의 성격을 이해하였다. ‘白과 口를 구분한 해석’은 중앙정부에 사건 처리 결과를 보고한 내용과 하늘에 맹세를 하는 과정이 별도였다고 이해하는 견해이다. 특히 하늘에 맹세하였다는 견해는 냉수리비와 「울진 봉평리 신라비」(이하 봉평리비) 그리고 「경주 남산신성비」 등에서 나타난 주술적 행위 혹은 맹세 행위를 주목한 것이다.

또한 ‘白口’는 敎의 범주와 직결된 동사라고 할 수 있다. 냉수리비와 봉평리비에서는 敎와 別敎가 별도로 분리되어 있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중성리비에서는 別敎라는 글자가 확인되지 않기에 敎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이해하여야 하는지 논란이 있었다. 기존 견해는 ‘敎와 別敎를 별도로 설정한 견해’, ‘양자를 구분하지 않는 견해’, ‘敎를 범주화하지 않는 견해’로 나뉜다. 첫 번째 견해는 ‘若後世更噵人者与重罪’를 別敎에 포함하는 견해이며, 두 번째 견해는 이를 敎의 범주에 포함시키거나 敎의 내용으로 보지 않는다. 세 번째 견해는 비문의 성격을 사건의 처리 과정으로 이해하고 敎라는 글자를 ‘지시’ 혹은 ‘명령’으로 해석한 것이다. 敎의 범주는 그간 연구들에서 그다지 활발하게 논의된 부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는 비문의 성격과 전반적인 맥락을 이해함에 있어 향후 필히 검토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나가며

본 논문은 필자가 처음으로 학술지에 투고한 글이라는 점에서 개인적인 의의가 있다. 처음 자료조사를 시작할 때 걱정이 가장 먼저 앞섰다. 학부생 신분으로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한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큰 오류를 범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저서 등의 기존 연구성과들을 정리하면서 점차 사그라들었다. 특히 논문 작성을 위해 비석을 세 차례 정도 실견하였는데, 공부하면 할수록 비문이 매번 새롭게 느껴져서 흥미로웠다. 또한 논문을 작성하면서 보완‧수정작업이 굉장히 중요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작성한 원고를 읽을 때마다 수정하여야 할 부분들이 끊임없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원고의 마감 날짜를 맞추는 일도 굉장히 어려운 일임을 느꼈다. 걱정으로 시작한 논문이지만, 논문을 투고한 뒤에는 앞서 언급한 경험들이 향후 필자의 공부에 큰 자산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본 논문이 학술적으로 큰 한계점이 있음은 분명하다. 우선 연구사 정리에 집중한 나머지 필자의 독자적인 해석과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 동시대 신라의 시대상을 체계적으로 녹여내지 못하였다는 것도 한계점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필자의 배움이 짧은 관계로 기존 견해를 잘못 이해한 부분 역시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많은 양해를 부탁드린다. 이처럼 본 논문은 기존 연구의 내용들을 기계적으로 나열함에 그쳤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다. 부족한 부분은 추후 공부를 지속하여 보완해나가고자 한다. 동시에 중성리비와 관련된 쟁점들에 대해서 필자의 독창적인 견해를 추후 제시할 수 있도록 다짐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