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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조선후기 유교 젠더 규범과 양반 여성들의 대응 : 타협과 불응 사이에서_하여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2.07.06 BoardLang.text_hits 13,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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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7월(통권 31호)

[나의 학위논문] 

 

조선후기 유교 젠더 규범과 양반 여성들의 대응
: 타협과 불응 사이에서


부산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2022.02.)


 

하여주(중세2분과)


 

연구배경

21세기 현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한 유교 젠더 규범이란 무엇인가?
이 개념은 조선 유교 사회에 젠더, 젠더 규범 등의 다양한 용어를 적용하였던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고 보다 명확한 정립을 위해 본 논문에서 처음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유교 규범에는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性인 젠더가 작동되었다. 조선 양반 사회에서 남성은 學하여 도덕적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반면 여성은 남성의 보조자여야만 했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 하였을까? 마냥 순응하기만 하였을까? 나는 지금까지 양반 여성의 유교 내면화를 통해 주체성이 발현되었다고 강조해오던 선학들의 논의를 보다 세밀하게 보고 싶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논문은 유교 젠더 규범의 확산 과정을 살피고 그에 대응한 양반 여성들의 삶을 다양한 방면에서 고찰하였다.

 

유교 젠더 규범의 보급과 확산

유교 젠더 규범은 15-16세기의 유교식 법제도와 의례의 도입, 『소학』연구와 여성 교육 활용, 여성 몸 담론 형성을 통하여 확산되고 정착되었다.
유교식 법제도인 내외법은 여성에게 신체적 통제를 가하였다. 또 재가한 양반 여성의 자손이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하여 문관직 진출을 막은 법은 양반 여성의 재가를 금기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교 의례 확산으로 여성은 며느리로서 더욱 많은 역할을 요구받았다. 성리학의 핵심을 담은 『소학』은 양반 여성 교육에 활용되고 여성 교훈서의 토대 자료가 되었다. 또한 음양론을 기반으로 하여 여성은 수동적인 몸과 편벽된 성품을 가졌다고 정의한 『동의보감』의 본격적인 보급은 조선후기에 유교 젠더 규범이 확산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17-18세기에 양반 남성에 의해 본격적으로 양산된 여성 교훈서는 유교 젠더 규범 확산의 물적 증거였다. 그들은 양반 여성을 유교 젠더 규범에 따르게 하려고 나름의 설득 전략을 세웠다. 17세기 전반부터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한 여성 교훈서는 18세기부터 확대 생산되었으며 생활용품에도 적용되어 유교 젠더 규범은 여성의 일상생활에 밀착되었다.

그 내용은 시간이 흐를수록 여성 층위에 적합한 내용으로 구성되었고 남성 독자까지 포섭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또한 출가외인으로의 변화를 강조하고 투기나 감정의 표현, 경제적 능력이 시가에 영향을 끼친다며 시가 흥망에 책임을 지우는 작업에 주력하였다. 가정 경제에서는 절약이나 절제를 요구하며 집안의 가사를 맡되 직접 노동할 것을 강조하였다.

 

양반여성의 대응 : 타협과 이용

이에 양반 여성들은 확산된 유교 젠더 규범에 타협하면서 한편으로는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교 젠더 규범과 그 상위의 윤리적 실천 가치인 효 이념을 통해 어머니는 가와 결합된 家母, 혹은 일가의 어머니로서 그 권위를 보장받았다. 또한 여성들은 출가외인임과 동시에 친가 일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효 이념을 이용하였다.

가계 경영자로서의 양반 여성의 모습은 절약이나 노동에만 한정하였던 유교 젠더 규범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병자호란을 겪은 조애중은 가정 경제를 주도적으로 관리하고 경영하면서도 친정, 시가를 비롯하여 남편의 사회적 연망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피란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였다.

 

양반여성의 대응 : 불응과 균열내기

한편으로 양반 여성들은 유교 젠더 규범에 불응하고 균열을 내기도 하였다. 먼저 17세기 전반 시집살이 문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당시 시집살이를 하였던 두 여성을 살펴보자. 진주 하씨는 시가 사람들과 갈등을 경험하였지만 남편과의 별거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딸 곽정례는 친정에서 너무 멀리 위치한 시가에서의 생활이 순탄치 않은 가운데에서도 친가 사람들과 유대감을 쌓으며 삶의 원동력을 얻었다.

담배의 급격한 유행은 양반 여성에게도 유효하였다. 가부장적 흡연 문화의 확산과 흡연 예절의 정착으로 담배는 남성의 전유물이 되어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양반 여성들은 담배를 기호품으로 여기며 ‘예’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흡연을 즐겼다.

 

마무리와 다음 이야기

유교 젠더 규범으로 인하여 양반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 혹은 보조자로서 ‘2등 시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양반 여성들이 펼친 삶의 전략은 오히려 유교 젠더 규범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균열을 내기까지 하였다. 이를 통해 내가 내린 소박한 결론은 유교 젠더 규범의 심화가 역설을 불러왔으며 양반 여성 나름의 주도면밀한 대응이 분명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유교 젠더 규범에 과잉 노출된 집단은 양반층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이들은 유교 젠더 규범 유튜브 채널을 시청하는 구독자이거나 관련 광고를 무방비로 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조선 사회의 ‘유교화’는 연령과 성별을 불문하고 전신분층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교 사회 조선에서 형성된 젠더 규범은 현재에도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 함께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