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역사와 현실: 시론
[『역사와 현실』(124호) 시론] 역사 만들기, 지자체와 법_하일식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2.08.07 BoardLang.text_hits 9,773 |
|
웹진 '역사랑' 2022년 8월(통권 32호) [『역사와 현실』(124호) 시론] 역사 만들기, 지자체와 법하일식(연세대학교 사학과) 통상 낡은 것처럼 보이고 실제 낡은 것이라 주장하는 이른바 ‘전통들(traditions)’은 실상 그 기원을 따져보면 극히 최근의 것일 따름이며, 종종 발명된 것이다. 1. 지방자치단체의 명소 찾기 앞의 인용문은 『만들어진 전통』에 들어 있는 홈스 봄의 「전통들을 발견해내기」라는 글에서 가져왔다.1) 이 책은 홈스 봄을 비롯한 몇 연구자의 글을 묶은 것으로, 홈스 봄의 글은 그 서장에 해당한다. 1983년에 출간되었으나 한국에 번역 소개된 때는 1990년대 중반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매끄러운 번역이 나온 것이 2004년이다. 책의 내용은 스코틀랜드・영국・아프리카・인도 등의 구체적 사례들을 분석한 것이다. 그래서 국내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 아닌데도 크게 주목받았다. 한국사 연구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국사의 구체적 지식이 흥미를 끌어서라기보다는 ‘만들어진 전통’, ‘기억의 창조’ 등의 선명한 표현에 공감도가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2000년대 한국 현실이 그런 공감도를 가질 만한 상황이었다. 1991년부터 시행된 지방자치제로 광역시와 도(道)의 장, 구・시・군의 장을 비롯한 지역의원들이 주민투표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지역경제 활성화와 문화관광 진흥을 내걸고 다양한 지역 사업을 개발했다. 많은 경우에 다음 선거를 위한 ‘치적 쌓기’・‘홍보용’이기도 했다. 전통시장 되살리기를 위해 지역 특산물을 ‘발굴’한다거나, 문화관광을 위해 역사에서 지역 특성을 찾아내고자 했다. 지역 명소를 부각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기존의 문화유산을 정비・활용하는 일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지역 연고가 있는 역사상 인물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위인으로 내세울 만한 인물의 고향이나 묘소가 있는 지역은 현창(顯彰)할 소재를 쉽게 찾았다. 그러지 못한 경우는 자기 고장과 직접・간접으로 연고를 가진 역사 인물을 찾아내는데 몰두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며 거쳤던 수백 키로미터의 길을 ‘복원’하여 행사를 여는 것도 그 하나이다. 조선후기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도 좋은 소재였다. 전북 남원시는 일찍부터 『춘향전』의 성춘향과 이몽룡을 내세웠는데, 워낙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 탓에 대중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남원시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흥부전』의 지명을 더듬어서 아영면 성리를 ‘흥부마을’로 ‘지정’하고 홍보하여 오늘에 이른다.2) 전근대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한 지역에서는 근현대 인물로 눈을 돌렸다. 문학가나 독립운동가들이 관심을 받았다. 기억의 저편에 묻혀 있던 인물을 찾아내어 알리는 일은 일정하게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렇게 내세운 인물의 친일행적이 뒤늦게 밝혀지거나, 때로는 독립운동 행적이란 것이 검증되지 않은 허위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자기 고장의 특색 내세우기는 픽션과 논픽션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픽션을 소재로 한 명소 만들기의 대표적 사례가 만화 캐릭터 ‘아기공룡 둘리’를 내세워 ‘둘리뮤지엄’을 만든 서울 도봉구일 것이다. 그 자체 픽션인 만큼, 논란 소지가 오히려 적은 경우이다. 그런데 픽션을 사실처럼 더 적극적으로 꾸린 경우도 있다. 경남 함양군에서는 조선후기의 판소리 ‘가루지기타령’・‘변강쇠타령’의 배경이 된 곳이 자기 고장이라고 지목했다. 그리고 ‘변강쇠・옹녀 공원’을 조성하고3) ‘옹녀묘’까지 꾸며 안내판을 설치했다. 이후 근처를 지나던 관광객이 들르는 곳이 되었다.4) 이렇듯 1990년대 이후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지역 명소 발굴이 유행처럼 적극 이루어졌다. ‘춘향=남원’ 같은 경우는 픽션에 근거했지만 작품 속의 지역이 분명하고 오랜 관념이 이어진 사례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꾸며진 곳들은 문학과 역사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드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도 지자체들이 이를 ‘역사’처럼 내세우는 것이 문제이다. 학문적 엄격성을 기준으로 보면, 그 자체 역사적 사실로 판정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많다. 사실 자체가 개연성이 낮거나 논쟁 중인 것들도 많다. 이런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상황은 역사 연구자에게 무거운 걱정거리가 된다. 학문적 틀을 넘는 지자체의 의욕이 이를 사실처럼 확정지으면, 이후 대중에게 그대로 수용된다. 인기를 끈 TV드라마 내용이 쉽사리 역사처럼 인식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역사를 가르칠 때면 “사극은 픽션의 영역이며 사실은 이러하다.” 라든가 “논쟁적이며 개연성만 있을 뿐”이이라고 길게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2. 지역축제, 역사와 전통 만들기 10여 년 전, 강원도 고성 화진포 앞바다의 금구도가 바라보이는 곳에 설치된 안내판을 본 적이 있다. 안내판의 제목은 ‘광개토왕릉’이었다. 제법 긴 설명문 끝에 “앞으로 우리 군에서는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관계 전문가의 고증을 통해 사실이 확인되면 원형 복원할 계획으로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성군에서 설치한 것이다.5) 이 안내판이 긴 설명의 근거로 든 이른바 ‘자료’들은 여기서 언급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광개토왕릉을 화진포 앞바다에 갖다놓을 만큼, 지자체가 역사를 두고 벌이는 황당무계한 일들이 있다고만 지적해둔다. 구・시・군 등의 기초자치단체에는 의회가 감시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정책과 행정을 이끌어가는 실질적 주도권은 단체장에게 있다.6) 인사권을 쥔 단체장의 권한이 실제 행정에서 발휘하는 힘은 매우 강하다. 역사와 관련된 정책들이 단체장 개인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생기는 이유이다. 이제 지자체의 ‘역사 만들기’에 관하여 두어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하나는 전남 영암군의 ‘왕인 현창’ 사업이고, 다른 하나는 경남 김해시의 ‘허황후 역사화’이다. 왕인에 관한 기록은 한국 문헌에는 없고,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만 나온다. 백제인으로 『논어』와 『천자문』을 갖고 왜국에 건너가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간단히 언급된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어디 출신인지, 왜국에 갔다가 돌아왔는지 등도 추적할 수 없다. 그런데 영암군은 왕인 동상을 세우고 공원을 꾸몄다. 생가 터, 책을 보관했다는 책굴(冊窟), 공부하던 서당, 동료들과 담소하던 장소까지 지목해놓았다. 연대 미상의 마애불을 ‘왕인석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역사학에서 인정하는 ‘사실’과 무관하다. 왕인 영암출생설은 일제강점기의 개인 기록들에 보이기 시작하여 차츰 확산되면서 ‘사실화 과정’을 밟았다. 1970년대에 이선근(李瑄根)을 회장으로 한 ‘왕인박사현창협회’가 만들어져 활동하면서 관련 장소가 전라남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97년부터 영암군 주도로 매년 왕인문화축제를 열고 있다.7) 흥미로운 것은 왕인이 일본에서도 ‘역사 만들기’의 대상이 된 점이다. 오사카부(大阪府) 히라카타시(枚方市) 후지사카촌(藤阪村)에 있는 한 무덤이 17세기부터 왕인묘로 지목되었다. 그리고 사적으로 지정・정비되면서 현창되기 시작했는데, 정확한 근거와 고증을 거친 경우는 아니었다. 1980년대 이후 왕인 현창사업을 이끌던 일본의 민간단체는 영암군과 교류하기도 했다.8) 일제강점기의 왕인 현창사업은 의도하여 기획한 것은 아닐지라도, 큰 틀에서 보면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일본에 체재 중이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은 왕인신사(神社) 설립에 분주하던 인사를 만났을 때 “일선융화(日鮮融和)와 사상선도(思想善導)를 위해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9)고 했었다. 영암의 왕인 현창사업은 명소와 지역 위인 만들기, 그리고 축제를 통한 지역 공감대 형성, 관광객 유치와 맥이 닿는다. 지자제 시행 이후 각 지역별로 축제가 열리기 시작했고, 정부에서도 이를 지원하고 콘텐츠 개발을 장려하고 있었다. 왕인문화축제도 그 하나였다. 해방 이후 일본의 왕인 현창사업도 다르지 않다. 현지의 민간단체는 한일우호라는 취지 아래 한국 관광객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인 묘역에 무궁화를 심기로 하고, 한국에서 묘목을 받아와서 심기도 했다.10) 한일간의 차이라면 한국은 지자체가 직접 사업을 주도한 반면, 일본은 민간단체가 주도하면서 관청은 지원하는데 그친다는 점이다. 사극 ‘선덕여왕’이 방영될 때, 많은 시청자들이 그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지적과 우려가 있었다. 가끔 질문을 받고 좀 길게 설명한 적도 있다. 그런데 드라마는 몇 년 뒤에 대중의 기억에서 잊혀지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찾는 ‘왕인박사 유적지’와 스토리는 오래 간다는 점이 다르다. 경남 김해시도 짚어볼 사례이다. 수로왕・허황후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다. 역사서에 담긴 인물인 것이다. 수로왕은 실존인물이다. 그러나 허황후는 아유타국 공주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예언같은 말을 따라 먼 바닷길을 왔다는 것까지, 사실로 받아들이려면 거쳐야 할 실증의 관문이 많다. 김해시는 일찍부터 수로왕과 허황후의 혼인이라든가 행차 등이 포함된 지역 행사를 치러왔다. 수년 전부터는 몇 개의 축제를 합쳐서 ‘가야문화축제’로 치르고 있다. 여느 지자체의 행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검증되지 않은 허황후와 아유타국 이야기를 사실화한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금관가야 건국설화 속의 인물인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김해시는 여기서 더 나아가 허황후 설화를 활용하여 가야에 불교가 일찍부터 수용되었다며 이를 ‘확인’하려는 의욕(?)을 보였다. 지역민 일부와 불교계 일각이 이에 힘을 실었다. 그리하여 가야불교를 찾겠다는 사람들이 문화재청 허가도 없이 산자락의 절터를 시굴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허황후가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에 대한 집착도 있지만, 학문적 기준으로 보면 비약이라 할 것이다. 석질이 한반도에서 찾기 어려운 것이라 해서 인도에서 허황후가 가져왔다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불교와 관련된 석탑재로 간주할 것은 더욱 아니다. 남부지방에 우리 고유의 석탑이 세워지는 5~6백 년 전에 이런 석탑재를 갖고 왔다는 것은 시간이 전도(轉倒)된 생각에 다름 아니다. 인도의 탑과 한국의 탑은 모양새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최근 들어 학계 일각에서 가야불교 조기전래설과 허황후 설화의 사실을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생기고 있는 것으로 안다. 불교가 바닷길을 통해 가야 지역에 일찍부터 수용되었을 개연성은 있다. 그러나 그 개연성을 사실 또는 추정의 범주에서나마 논의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학계 일각에 보이는 경향이 신중하고 엄밀한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지자체와 지역민 사이에서 반복된 주장에 익숙해진 결과가 아니었으면 한다. 가야사는 2021년에 지자체와 지역 단체, 문화재청 사이에서 벌어진 ‘소동’의 중심이기도 했다. 가야 문화유산을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인데, 여기에 유사역사 주창자가 끼어들어 지자체와 지역민을 부추긴 결과이기도 했다. 가야 유적과 문헌상의 지명을 갖추어 유네스코에 등재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문(己汶)을 전북 남원으로 비정한 것이 소동의 핵심이었다. 지역 일각에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을 자기 고장으로 비정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했다. 반면에 일각에서는 이를 수용하며 향후 사업에 참여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난맥상이라는 낱말이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 빚어진 주요 원인으로 문재인 정부가 ‘가야역사문화권 조사연구 및 정비’를 국정과제로 선정하여 추진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국정과제 수행에는 재정지원이 따르므로 여러 지자체가 다투어 나섰다. 그 과정에서 지역 정서를 선동하는 주장이 끼어들어 지자체는 갈팡질팡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역사 문제에 개입한 것 자체가 근원적 문제였다. 가야사를 둘러싼 소동의 간접적 배경에는 전라북도, 특히 장수와 남원의 고분, 성곽, 봉수, 제철유적 등을 조사한 주장이 있었다. ‘전북가야’, ‘장수가야’, ‘운봉가야’ 등의 학문외적 낱말들이 오래 전부터 언론에 오르내렸다. 문화재청 마저 ‘장수가야’라는 낱말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이 모두가 학계의 검증을 거치지 못한 경우이다. 전북 지역의 고분에서 드러나는 유물은 대개 대가야와 연관된 것이 많다. 그러나 대가야의 문화적 영향인지, 정치적 복속의 결과물인지 깊이 검토하기 전에 독자적 정치체임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봉수는 집권국가의 신경계통에 해당하지만, 장수의 정치체가 좁은 지역에서 그토록 많은 봉수를 두고 어떻게 운영했는지도 고려하지 않았다.11) 제철유적도 소규모일 뿐 아니라 고대의 것인지조차 검증되지 않았다. 엄정한 학문적 기준으로 해명된 것이 적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방적 주장이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확산되고, 지자체의 욕구가 결합되면 우려할 만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최근의 가야사 난맥상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지자체는 단체장이 추구하는 방향에서 연구자를 향해 부탁, 호소, 압박을 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연구자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엄정한 학문적 기준을 지켜야 한다. 많은 연구자가 그동안 그렇게 처신해왔는가 성찰해볼 일이다. 3. 문화유산과 역사, 그리고 법률 행정기관의 정책이 역사 연구와 문화유산 해석에 영향을 미치지만, 법률도 부정적 제약을 가하거나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다. 최근 개정 공포된 문화유산 관련 법들이 그에 해당한다. 이는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우려를 함께 지니고 있다. 2022년 2월 18일에 개정된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다. 첫 번째는 인골이나 미이라를 처리할 근거를 마련한 점이다. 고분이나 주거지 등에서 출토된 토기나 껴묻거리들은 문화재 관련 법에 따라 처리된다. 그러나 인골은 장묘 관련 법의 적용 대상이었다. 따라서 고분 출토 인골도 도로공사 중에 발견된 무연고 묘지의 인골처럼 법 절차에 따라 화장하는 것이 ‘원칙’이었다.12) 지금껏 발굴을 통해 확보한 고인골을 보관하고 연구하는 일은 사실상 법의 테두리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고고학계는 이러한 법의 허점을 일찍부터 알고서 문화재 당국과 국회에 여러 차례 보완을 요청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계속 미루어지다가 2022년에 들어서야 법이 개정된 것이다. 인골은 고대인의 체질과 질병, 유전학적 특성 등을 비롯하여 생활사를 밝히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근 관심이 높아져 과학적 분석도 적극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여 매장문화재법이 현실에 맞게 개정된 것이다. 다만 개정된 법은 인골이 출토되면 문화재청장에게 신고하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쳐 보관・연구하도록 단서를 달았다.13) 연고자가 있는 미이라는 연고자의 동의를 받아야 함은 물론이다. 문화재청이 인골이나 미이라를 조사・연구・보존하는 전문기관을 지정하고 비용도 지원할 수 있도록 한 점도 긍정적이다. 매장문화재법의 개정으로 지표조사 주체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지금까지는 일정 규모 이상의 토목공사를 시행하는 회사가 공사에 앞서 관련 조사기관에 의뢰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개정된 법으로 국가 또는 지자체도 지표조사를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표조사 자체를 전문 조사기관이 맡아 수행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는 토목공사가 임박해서 지표조사를 서두르고, 중간에 중요한 유적의 존재가 확인되어 발굴 필요성이 생기면 공사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행정기관에서 중장기 개발계획을 수립하기 전에, 또는 계획 수립 과정에서 지표조사를 시행할 수 있다. 사후에 돌출변수가 생길 여지를 줄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개정 내용은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역사문화권정비법’)14)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법은 2020년 6월에 처음 제정되었다가, 보완을 거쳐 2022년 1월 18일에 일부 개정 공포되었다. 6월 시행이니 이제 법의 효력이 발생된 셈이다. 「역사문화권정비법」을 제정한 목적은 다음과 같이 천명된다. 제1조(목적) 이 법은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문화권과 그 문화권별 문화유산을 연구・조사하고 발굴・복원하여 그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고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전문(前文)에 해당하는 만큼 조금 추상적이다. 그러나 법 내용에서 ‘역사문화권정비사업’을 “지역의 문화 발전 및 지역경제 활성화 등 지역 발전에 기여하는 사업”으로 정의하여 법률을 만든 취지를 짐작할 수 있다. 문화유산을 활용하기 위해 조사・연구로부터 보존・정비 및 육성까지, 일련의 사이클이 지역 발전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추구하는 방향이다. 「역사문화권정비법」은 전국을 다음 8개 권역으로 나누었다. 가. 고구려역사문화권 : 서울, 경기, 충북지역 등 처음 제정될 때는 6개 권역이었으나, 개정되면서 예맥문화권과 중원문화권이 추가되어 8개 권역이 되었다. 그리고 제정 당시보다 각 문화권의 지역 범위도 확대되었다.15) 제외된 지역의 요구가 있었고, 좁은 범위의 규정에 따르는 부작용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법에 따르면 문화재청은 5년 단위로 역사문화권 정비를 위한 ‘기본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문화권정비위원회를 두어 관련된 여러 사항을 심의하게 되어 있다. 국가 또는 지자체는 계획을 세워 ‘정비구역’을 지정하고 시행계획을 세워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정부의 지원도 가능해진다. 해당 지역 내의 여러 사정, 그리고 몇 단계의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므로 정부 지원이 가능한 단계까지 이르면 제법 합리적인 사업이 이루어질 것이다. 다만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지자체들의 무리한 의욕과 치적 내세우기 사업이 끼어들면, 이를 온전히 걸러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여전히 남는다. 많은 지자체들이 지금까지 보여온 행태를 떠올리면 당연한 우려라고 생각한다. 어떤 법률도 현실을 완벽하고 바람직하게 반영할 수는 없다. 이를 감안해도 학문적으로 보면 고대 역사 공간을 이렇게 범주화한 한계는 분명해 보인다. 이 법은 주로 ‘고대’를 강조하고 있다. 왜 이런 내용의 법률이 제정되었는지? 그 배경과 계기에 관해 추적할 시간과 기회를 미처 갖지 못했다. 다만 이 법으로 인하여, 지자체들이 시간이 누적된 역사와 문화유산에서 고려・조선과 유기적 연관에 소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편, 7세기 중반 이후 200년 넘는 신라통일기 동안 생성된 문화유산은 전국에 걸친다. 그러나 이 법이 분류한 역사문화권의 범주에만 주목한 경상도 이외 지역의 지자체는 신라통일기 문화유산에 관한 관심을 덜 기울일 여지도 있다. 또 어떤 문화권으로 지정된 문화유산이 일부 지자체만의 독점적・배타적 전유물인 듯이 홍보되고 이해되는 경향이 생겨날 수 있다는 걱정도 하게 된다.16) 어떤 문화도 인접하거나 멀리 떨어진 다른 문화와 교류・접촉하며 영향을 주고받지 않고서 단독으로 고립하여 발전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여러 부정적 가능성을 떠올리게 된다. 그동안 일부 지자체가 보여준 모습은 「역사문화권정비법」 시행을 놓고 여러 우려를 낳을 만하다. 지자체가 홍보한 정책들 가운데 ‘지역문화 발전과 지역경제 활성화’란 목적을 실제 달성한 경우는 흔치 않다. 그래서 「역사문화권정비법」이 개발이나 홍보를 위한 지자체의 토목사업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문화재청의 심의위원회에는 고고와 역사를 비롯한 건축・도시・환경 등의 여러 전문가가 참여하여 불합리한 요소들을 걸러낼 것이다. 문화재청에서도 역사문화권의 공간적・시간적 범위를 학문적으로 음미하면서도 융통성 있게 설명하는 큰 규모 기초 연구를 진행중인 것으로 안다.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한다. 한국사회에서 역사를 두고 벌어지는 여러 양상들, 문화유산에 관련된 행태들, 그리고 앞으로 ‘생겨날 수도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풍경에 대해 짚어보았다. 특히 지자체의 ‘역사 만들기’에 중점을 두고 그동안의 몇 사례가 갖는 문제들을 거론했다. 지금 우리 현실은 연구자가 연구실 안에 갇혀서 ‘고답적(高踏的)’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실천은 개인의 가치관과 판단에 따라 행해질 것이지만, 학문적 실천은 연구자로서 누구든 피해갈 수 없는 영역이다. 그래서 연구자의 태도와 지향을 놓고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싶다. 현실 사회에서 연구자의 역할은 연구실에만 국한되지 않고 점차 넓어지는 추세이다. 연구자가 여러 방면에서 더 적극적 역할을 요구받는 상황인 것이다. 앞으로 이런 요구는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기록을 살피고 고고자료를 탐색・분석하는 작업 자체로서는 소임을 다할 수 없는 상황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미주> 1) 에릭 홈스봄 외 지음, 박지향・장문석 옮김, 2004 『만들어진 전통』, 휴머니스트, 19쪽 2) 아영면 성리는 『삼국사기』 열전에서 원광으로부터 ‘세속오계’를 받은 귀산과 추항이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한 阿莫城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기록상 명확한 유적이 있는 곳인데도 남원시는 문학 속의 흥부에 먼저 주목했다. 3) 이 사업은 처음에 막대한 예산을 내세웠다가 비판이 일자 축소했다(「1000억 변강쇠・옹녀 공원, 139억 규모 축소 ‘사업실효성 의문’」 『서부경남신문』 2019년 12월 9일). 이런 예산 액수는 중앙정부로부터 받아내겠다고 내세우는 주민 홍보용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4) 변강쇠・옹녀공원은 일찍이 남원시에서도 산내면 대정리 일대에 조성하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남원에 ‘변강쇠・옹녀 공원’ 조성」 『연합뉴스』 1999년 6월 8일). 이렇게 지자체 간에 같은 소재를 놓고 경쟁하던 난맥상이 생기던 시기가 있었고, 이에 편승한 사람이 같은 주제의 용역비를 양쪽에서 받아 구설에 오른 경우도 있었다. 5) 최근의 여행 블로그를 찾아보면 이 안내판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6) 대개의 지역은 단체장과 기초의원의 성향이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고, 기초의원들의 역사에 대한 소양도 단체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7) 이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병인, 2000 「王仁의 ‘지역 영웅화’ 과정에 대한 문헌사적 검토」 『韓國史硏究』 115, 한국사연구회 ; 김병인, 2006 「<왕인문화축제>와 ‘왕인’, 그리고 콘텐츠화 기능성」 『인문콘텐츠』 8, 인문콘텐츠학회 참고. 8) 일본의 왕인 현창사업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스나구찌 다이스케, 2008 「확인되지 않은 과거에 대한 현대인들의 기억 만들기 - 韓日 양국의 王仁顯彰 事例를 中心으로 -」, 연세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석사학위논문 참고. 스나구찌는 왕인묘가 있는 지역 출신이다. 9) 스나구찌, 2008 위의 논문, 12쪽 10) 스나구찌, 2008 앞의 논문, 26쪽 11) 장수의 봉수를 주제로 한 토론회에서 주보돈 교수가 “그렇게 좁은 지역에 촘촘한 봉수가 있었다면, 서로 얼굴 보면서 전화통화하는 셈”이라고 지적한 적도 있었다. 12) 그래서 간혹 발굴 후에 다시 묻거나 화장 처리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13) 인골은 늘 범죄와 연관됨 직하므로 전문가가 연대와 출토장소의 성격을 판단하도록 엄격한 단서를 붙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합리적 조항인 것이다. 14) ‘역사문화권정비법’은 법제처의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제공하는 법령에 공식 약칭으로 제시되어 있다. 15) 신라역사문화권을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신라와 통일 신라 시대의 유적・유물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으로 정의한 것, 마한역사문화권의 범위를 전북, 충청으로 확대한 것 등이 그렇다. 16) 나는 문화재청의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초기 TF 자문회의에 참여했다. 당시 이런 점을 들며 “예상 가능한 부작용을 최소화할 방안”을 논의했지만, 법률이 정한 정의를 넘어서는 언급은 법률 자체를 무시하게 된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법 조항에 들어 있는 분류와 정의를 놓고 “이는 다소간 편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