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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저작비평회] 오노 야스테루 저 『한국 ‘건국’의 기원을 찾다 : 3·1 독립운동과 내셔널리즘의 변천 (게이오기주쿠대학출판회, 2021)을 읽고_최우석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2.09.05 BoardLang.text_hits 3,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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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9월(통권 33호)

[제6회 저작비평회] 

 

오노 야스테루 저 『한국 ‘건국’의 기원을 찾다 : 3·1 독립운동과 내셔널리즘의 변천』(게이오기주쿠대학출판회, 2021)을 읽고


 

최우석(근대사분과, 독립기념관)


 

이어보기 : 발표(오노 야스테루)
이어보기 : 토론(홍종욱)
이어보기 : 질의응답


 

이번 서평회를 준비하면서 제 개인적인 소회로부터 시작할까 한다. 2008년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한 후, 3·1운동으로 연구주제를 잡고 연구를 진행하면서 언제나 연구 업적을 눈여겨 따라가고 있는 연구자가 오노 야스테루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온라인으로나마 선생님의 책에 대한 약정토론을 맞게 된 것에 참으로 영광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한국 ‘건국’의 기원을 찾다를 서평 준비를 위해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제 생각을 다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 독립운동사를 일국사적 관점이 아니라 ‘글로벌’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에는 십분 동의하며, 그러한 흉내를 내고자 발표했던 제 원고도 많이 생각났다(최우석, 「식민지 조선인의 제1차 세계대전 인식과 3·1운동」, 사림 70, 수선사학회, 2019). 선생님의 글들을 빨리 따라갔다면 좀 더 깊이 있게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또 한편에서는 아예 쓰다 말았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이 책에서 단연 돋보이는 장은 ‘제1장 제1차 세계대전: 공화제인가 제정인가’와 ‘제2장 민족자결: 전략으로서의 민주주의’다. 1910년대 독립운동가들이 인식했던 세계 정세와 그에 조응하여 구성해나갔던 전략 혹은 지향들을 촘촘히 분석해나갔다. 기존에 1장과 2장에 언급된 사건, 단체, 문건들에 대한 연구들이 분명 존재했지만 그것들은 ‘한국사’ 혹은 ‘한국 독립운동사’라는 단위 속에 갇혀 실증의 범위는 매우 협소했고 이 운동들이 세계와 어떻게 접속하고 있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지침서가 없었다.

그리고 또한 가장 감탄했던 것은 제2 인터내셔널을 매개로 한 독립운동에 대한 주목이었다. 한국학계에서는 조소앙에 대한 연구가 다년간 이루어져 왔지만, 그가 1910년대 접촉했던 ‘만국사회당(萬國社會黨)’의 실체가 무엇인지 주목하거나 그것에 접속했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검토한 연구가 없었다. 본인도 이를 2018년 말이 돼서야 제2 인터내셔널이란 사실을 깨닫고 연구대상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바 있었으나 앞서 나가는 선생님의 연구 성과에 다시 크게 배움을 얻어간다.

오노 선생님의 본 저작은 3·1운동 100주년을 넘어서면서 일본에서 나온 거의 유일한 3·1운동에 대한 단독 저서로 알고 있다. 그런데 본 저작은 단순히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일본에 소개하고 전달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3·1운동 100주년이 한국에서 왜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켰는지 현대의 역사전쟁 맥락과 아울러 한국의 내셔널리즘 변천과정까지를 함께 시야에 두고 살펴서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도 반드시 소개되어야 할(가능하다면 번역을 직접 하고픈) 책이다.

이 같은 큰 줄기의 감상과 별개로 토론자로서 해야 할 의무가 있기에 조금은 큰 문제제기와 작은 역사적 사실 지적들, 혹은 책에 아쉬웠던 점을 이야기할까 한다.

우선 독립운동 이후의 생성될 국가 혹은 사회에 대한 방향성이 복고,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으로 갈리는 것을 당시 운동이 처한 조건 속에서 찾아진 ‘전략’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전략’을 선택하는 과정이 바로 능동-수동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에 따라서는 독립운동의 방향설정 과정을 너무 수동적 형태로 보는 것 아니냐고 받아들일 수도 있어 보인다. 특히 신규식의 예가 동제사와 신한혁명당을 오가면서 민주주의와 복고를 갈팡질팡하는 것으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보충적인 설명을 요청 드린다.

그리고 본서의 결론부에서 저자의 주장은 저는 조금 위험성이 있어 보였다. 3·1운동(혁명)이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목표한 운동이 아니었다는 지적에는 십분 동의한다. 3·1운동의 참가자들 모두가 의식적으로 ‘민주공화제’라는 정치체를 지향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공화제의 표방은 파리강화회의를 의식한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해석도 타당하다. 그러나 큰 틀에서는 3·1운동의 참가자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길 바랐고, 그 결과 성립할 것이라고 예상하거나 소망한 정치체는 과거의 조선(대한제국)과는 다른 ‘유토피아적’인 정치체 혹은 더 나아진 정치체였다. 거기에는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1운동에 등장했던 수많은 전단정부들도 그러한 소망과 연결된 기획들이었을 것이다. 어떤 역사적 선택의 결과물이라도 그 전략적 선택의 의도와는 별개의 효과를 발휘하기 마련이고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으로 계보적으로 이해하는 시선은 어느 정도 가능한 해석은 아닌가 느껴진다.

그렇지만 토론자 역시 저자와 동일하게 지금은 남북 사이에서 소거되어버린 수많은 ‘갈래길’들, 당대의 선택들, 그리고 혹은 달성되지 못한 미래들을 역사적으로 복원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에 크게 동의하며, 이를 일국사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살필 수 있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그렇기에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은 저자가 결국은 돌고 돌아 현재 한국 건국의 기원은 1948년 8월 15일이라고 결론 짓는 부분이었다. 차라리 3·1운동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소략하나마 수많은 ‘갈래길’이 포함된 사건-단체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로 국한시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뉴라이트가 노리는 효과를 반복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건국’이라는 화두를 걷어차 버리자는 파괴적 접근이 더 생산적일 수 있다는 생각마저도 든다(이에 대해서는 역사비평 2019년 8월호 참고. 홍석률, 「역사전쟁을 성찰하며: 정사(正史)·정통성(正統性)론의 함정」; 이용기, 「임정법통론의 신성화와 대한민국 민족주의」; 임종명, 「건국절 제정론과 비(非)·몰(沒)·반(反)역사성: 1948년 8월 직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성을 중심으로」).

2.8독립선언을 3.1운동의 ‘도화선’ 혹은 전사(前史)로만 국한시켜 보지 말자는 저자의 주장에 큰 감명을 받은 바 있다(오노 야스테루, 「2·8독립선언의 전략성과 영향」,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 휴머니스트, 2019). 그런데 본서 134~135쪽에서는 다시금 ‘도화선’이라는 표현을 등장시켜 아쉬움이 컸다. 저는 2.8독립선언이 3.1운동에 대해서 역설적이게도 큰 규정력을 가졌던 사건이라고 생각한다(이에 대해서는 최우석, 「2·8과 3·1 사이: 3·1운동 준비과정을 중심으로」,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도쿄에서 함흥으로: 일제 문서로 보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 민족문제연구소, 2019를 참고. 미완성 원고이므로 인용 및 활용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2.8독립선언서 초안이 송계백을 통해 국내로 소개되지 않았다면 과연 3.1운동이 기획되었을까라는 의문부터, 독립청원이 아니라 독립선언이라는 형태를 규정한 것 역시 2.8독립선언이 진행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심지어 독립선언서 형태에서 공약 3장이 출현하게 된 것도 2.8독립선언서의 영향이지 않나 생각한다. 본서가 개설적인 형태를 취하다보니 논문에서 주장한 것보다 평범하게 서술했다고도 느껴지지만 아쉬움이 있다.

앞서 신규식(+박은식)이 1910년대에 너무 갈팡질팡했던 것 같다고 평하였는데, 이와 연관하여 신한혁명당은 실체가 존재한 기획일까 하는 의문도 있다. 신한혁명당에 대한 구체적 서사는 성낙형의 조사보고문서와 판결문이 유일하다. 그런데 중국 상하이에서 그와 논의에 참여했다는 인물 중 이상설의 경우에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끊임없이 일본에게서 러시아로부터의 추방 요구를 받고 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다시 러시아에 복귀하지 못할 수도 있는 위험성을 갖고 중국 상하이까지 갔다가 다시 러시아로 복귀하였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일제의 감시망이라는 것이 100%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주요하게 언급된 인사들에 대한 불령단관계잡건 속 보고 문건들에서도 아직까지 신한혁명당과 연관시켜 볼 수 있는 행적을 확인하지 못했다. 행위의 부존재를 밝히는 것은 이 정도의 조사로는 달성되지 않는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신한혁명당은 실질적인 기획이 안착된 것이라기보다는 고종 망명이 달성된 뒤에 출범하고자 한 기획 정도였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에 참여한 면면도 현재 언급된 이들 전부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연구들은 이미 실체화된 신한혁명당을 전제한 경우들이 있어, 오노 선생님께서는 신한혁명당을 어떻게 파악하고 계신지 묻고 싶다.